1033화. 우리가 그 옆에 없는 거다. (3)
한 번씩 저 하늘이 청명을 서글프게 만든다.
지금 현종의 곁에 앉아서 보는 하늘이, 청문에게 모진 말을 퍼붓고 돌아서던 그때 보았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말이다.
청명은 이따금 혼란스러웠다.
되살아나서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살면서도 계속 위화감을 마음 한편에 숨겨 놓았다. 벗어나고 싶어도 지독한 위화감은 불현듯 따라붙었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깨어나 습관처럼 의복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을 때, 보이는 얼굴들이 순간 너무 낯설어 몸을 떨 때가 있다.
그 낯선 얼굴들이 익숙해서, 익숙하지만 너무도 낯설어서 제 마음조차 어쩌지 못할 때가 있다.
그는 지금을 살아가지만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고, 과거를 살아가지만 이 현실에 홀로 동떨어져 있다.
왜 다시 살아난 것일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청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산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장문인.”
청문이라면 어찌 대답했을까?
청명은 그 대답을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일부러 떠올리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니까. 그의 대답을 대신 전해야 할 때가 아니니까. 지금은 청문의 대답을 좇을 때가 아니라 청명의 대답을 내어 놓아야 할 때다.
그는 화산의 검. 누구보다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화산의 적을 베는 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화산의 검이어서는 안 된다.
화산의 제자이자 화산의 선인. 따르는 자이자 이끄는 자.
그리고 그저 청명이라는 한 명의 사람이다.
청명이 담담하게 말했다.
“화산이 지켜야 할 것들과…… 화산이 이룩해야 할 명성, 화산이 이어가야 할 정신. 그 모든 것은…….”
“…….”
“적어도 저에게는 제자 한 사람의 목숨만 한 가치조차 없습니다.”
굳이 청문이 했을 만한 대답을 좇지 않고 스스로 대답을 찾으려 했다. 청명이 바라본 화산, 그리하여 했던 생각들을 모두 담아서.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게 그가 도달한 대답은 청문이 했을 말과 다르지 않았다.
“협의요?”
청명이 중얼거리다 피식 웃었다.
- 처음에는 그런 것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네, 그런 게 있었을지도 모르죠.”
- 하지만 이제는 닳고 닳아 하나밖에 남은 게 없구나. 그게 뭔 줄 아느냐?
“그런데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이제 제게 남은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청명의 담담한 소회를 듣던 현종이 가만히 물었다.
“……그게 무엇이냐?”
청명의 입이 열렸다. 그 어느 날의 청문처럼.
- 미래.
“화산의 제자들입니다.”
그때는 청문이 논하던 ‘미래’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청명도 안다. 청문에게 있어서 미래란 화산에 남겨진 어린 제자들이었다는 것을.
그건 청문에게 있어선 그 어떤 것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지켜 내야 하는 것이었다.
청명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셨죠.”
현종의 물음 역시 과거의 그가 가졌던 의문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얻게 될 협의에 대한 자부심이 저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보다 더 중요하냐고.”
- 그렇게 얻은 것으로 잃은 것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습니까?
-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 가며 얻은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청명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굳이 하지 말았어야 할 모진 말도 했었다.
- 저는 이 결정을 죽는 순간까지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그래. 그랬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청문이 보는 세상과 그가 보는 세상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대답해야 한다.
그날 청문이 그에게 하지 못했던 대답을. 지금의 그이기에 과거의 매화검존에게 해 줄 수 있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의 본심을.
“……저도 달아나고 싶습니다, 장문인.”
현종이 순간 청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역시 감정이 격해져 말을 쏟아 내었지만, 설마 청명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다른 이도 아닌 청명이기 때문에 상상할 수가 없었다.
“달아나서 해결될 문제였다면, 달아나는 걸로 피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이라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산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습니다. 당장에 눈과 귀를 막아 버리고 싶습니다.”
“…….”
“무서우니까요.”
청명의 손끝이 떨렸다.
“저는 두렵습니다, 장문인. 너무 무섭습니다. 저 강대한 이들이, 그리고 저들 뒤에 있을 그가. 언젠가 올 그가…… 저는 사무치게 무섭습니다.”
“……청명아.”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청명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것도 지켜 내지 못한 채, 모두의 죽음을 이 눈으로 직면할 제 모습입니다.”
언제쯤 그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요원하기만 했다.
그가 지키려 했던 모두가 천마의 손에 죽어 가던 날. 오직 그 혼자만 살아남아 천마를 향해 절규하던 그때의 악몽.
하지만…….
최근의 악몽은 그보다 더 끔찍해졌다.
화산에 찾아온 천마의 손에 모두가 죽는다.
현종도, 현영도, 현상도. 백천도, 유이설도, 윤종도, 조걸도. 혜연과 당소소도.
그들의 목숨이 그 지독한 악(惡) 앞에 허무하게 쓰러진다. 피 묻은 그의 손은 아무것도 지켜 내지 못한다.
그래. 또다시 말이다.
비명을 지르다 가까스로 깨어나면 얼굴에 와 닿는 공기가 너무도 차가웠다. 해가 뜰 때까지 몸을 떨곤 했다.
어떻게 무섭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꿈이 현실이 될까 봐, 또다시 무력하게 모든 것을 잃어버릴까 봐 두렵다.
“왜 싸워야 하냐고 하셨죠.”
“…….”
“지켜야 하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니 청문이 웃어 주는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염려 서린 듯한 얼굴과, 입가에 드리운 담담한 미소. 청명이 아는 얼굴이되, 모르는 얼굴이었다.
“누군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일이라면 스스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지켜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화산이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
“저이기 때문에 가야 하는 겁니다, 장문인.”
현종이 고개를 숙였다. 이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하겠는가?
“때로는…….”
청명이 살짝 머뭇거리다 입을 연다.
“피하지 않는 것이 멍청해 보일지 모릅니다. 약삭빠르지 못하고 어리석어 보일 때가 있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았을 때 깨닫게 되더라고요. 사실은 그 어리석어 보이는 우자(愚者)의 길이 가장 빠른 길이었다는 걸요.”
달라졌을까?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청명은 이제 이해할 뿐이다. 그저 찾았을 뿐이다.
싸워야 할 이유를.
마교라는 말을 들을 때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 분노가 그저 과거에 대한 복수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말이다.
저들이 또다시 그가 지키려 하는 것들을 앗아 갈 거란 사실에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청명이 이를 악물었다.
“여전히 저는 두렵고, 겁이 납니다. 저 강을 넘는 게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보다 더 무섭습니다.”
“…….”
“하지만…… 뻔히 다가올 결과를 앉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건 그보다 더 무섭습니다. 제가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 언젠가 맞이하게 될 결말이, 그 순간 제가 느껴야 할 후회가…… 그보다 백 배는 더 무섭습니다.”
이번만은 그때처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기에 가야 한다.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청명의 이야기엔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되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청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건 말과 논리로써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니까.
“어렵구나.”
“…….”
“참으로…… 참으로 어렵구나.”
현종의 목소리에 짙은 회한이 묻어났다.
여전히 그는 잘 알 수 없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하지만 청명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순간 뒤에서 백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라서 가야 한다고 했지. 그게 너의 의지니까.”
현종과 청명이 백천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받고도 백천은 담담했다.
“그렇다면.”
그가 단정한 입매를 끌어 올렸다.
“너도 내가 내 의지로 강 너머로 향하는 걸 말릴 수는 없겠지.”
“……어?”
백천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화산의 제자들을 지킬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가 화산에 너뿐이라는 건방진 소리를 지껄여 대지는 않을 것 아니냐?”
“맞는 말.”
“그건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그래 봐야 삼대제자 주제에.”
그 말을 들은 청명이 멍하니 되물었다.
“……아니. 너희가 제일 어린 제자들인데 뭘…….”
“어리긴 네가 제일 어려, 이 새끼야.”
조걸이 발끈하자 백천이 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지금 당장 강남으로 달려가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저들이 막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섬서마저 뒤덮을 거라 이 말 아니냐.”
“……그래.”
“그럼 나도 간다.”
“아니…….”
“내 말 똑바로 들어라, 이 멍청한 새끼야.”
백천이 단호하게 말허리를 끊었다.
“누군가 지켜 주기를 바라며 뒤에서 손가락 빨고 기다리는 걸 못 참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청명은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백천이 말을 이었다.
“내가 검을 배운 이유는 지키는 쪽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사숙.”
“네가 네 의지로 싸우고자 한다면, 그래 좋아. 그걸 무슨 수로 말리겠어. 대신!”
백천의 목소리가 화인처럼 청명의 가슴에 박혔다.
“나 역시 내 의지로 싸우는 쪽을 택할 거다.”
백천의 등 뒤를 지키고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설도, 윤종과 조걸, 당소소도. 그리고 이제껏 대화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혜연마저도 단호한 의지를 두 눈에 싣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그들을 보던 청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병아리들 주제에…….”
“막으려면 막아 보든가.”
깊게 한숨을 내쉰 청명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천은 본능적으로 제 검에 손을 올렸다. 저놈이라면 그들을 때려눕혀 기절시키고 홀로 강 건너로 향하고도 남는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명은 그저 고개를 돌려 강을 바라보았다.
“남은 말은 이따 하자.”
“……응?”
“손님이 오니까.”
그 말에 모두가 강 쪽을 응시했다. 짙은 밤에 잠긴 강 중앙에, 작은 조각배가 보였다. 이쪽을 향해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청명이 중얼거렸다.
“손님이라고 불러 주기에도 짜증 나는 새끼지만…… 일단 지껄이는 말은 들어 봐야겠지. 듣고 나서 결정하자고. 그 주둥이를 찢어 버려야 할지, 아니면…….”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에도 이제 분명하게 보였다.
어둠의 무채색으로 물든 강에 뜬 조각배, 그 위로 흩날리는 피처럼 선명하고 붉은 의복이 말이다. 온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선명한 것 같았다.
“……장일소.”
백천이 앓듯 중얼거렸다.
청명은 다가오는 장일소를 싸늘하게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