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2화. 우리가 그 옆에 없는 거다. (2)
다가오는 현종을 발견한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현종은 가볍게 손짓해 그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옆에 털썩 같이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청명이 빤히 보자 현종이 작게 웃었다.
“왜? 한 문파의 장문인이 하기에는 너무 경박한 행동이더냐?”
“그런 건 아닙니다만…….”
“나도 날 때부터 장문인은 아니었다.”
현종이 씁쓸한 얼굴로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았다.
“내가 화산에 입문했을 때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자유로웠단다.”
“……예?”
“음. 말이 조금 이상하구나. 자유로웠다기보다는…… 그래, 그냥 체계가 없었다는 말이 적절하겠지.”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윗대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사람이 사라지고, 함께 수련하던 동문들까지 어느 날 갑자기 화산을 떠난다. 문파의 꼴이 제대로 유지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현종과 현상, 그리고 현영.
현자 배 중에 지금 화산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 셋이다.
애초에 화산에 현자 배로 입문한 게 그들뿐이었을까? 그럴 리 없다. 그 많은 이들이 떠나가고 지금의 인원이 남은 것이다. 고작 셋만이.
“나도 내가 장문인이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입문했을 때만 해도 내 항렬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거든. 사형들이 꽤 많았지.”
“…….”
“당연히 대사형이 장문인이 될 줄 알았단다.”
“그때 그 작자요?”
청명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현종은 그 작자라는 말에 웃고 말았다.
“그래. 그 작자가 장문인이 될 줄 알았단다.”
“…….”
슬쩍 청명의 얼굴을 본 현종이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한 가지는 알아 두거라.”
“…….”
“그때 네가 본 그 작자는 추하기 짝이 없었겠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그런 이가 화산의 장문이 된 꼴을 보았다면, 청명은 정말 화산에 학을 뗐을지도 모른다. 아니, 화산을 포기하지는 않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장문인을 갈아 치우려 했을 게 분명하다.
생각해 보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믿을 수 있는 이가 화산의 장문 자리를 역임하고 있었다는 게.
“하지만 청명아. 사형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란다.”
“…….”
“내가 어린 나이에 본 사형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었지. 적어도 그때의 내 눈에는, 기울어 가는 화산을 맡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단다.”
현종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세월이란 그런 게지. 풍운의 꿈을 꾸던 젊은이도 욕심 많은 늙은이로 만들고, 소심하기 짝이 없었던 더벅머리 청년을 한 문파를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만들기도 해.”
잠시 말을 멈추었던 현종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는 항상 네게 고마웠다.”
청명이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현종은 하고픈 말을 먼저 다 끝내야 한다는 듯 먼저 입을 뗐다.
“네가 화산을 이끌어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했어야 할 일을 네가 해 주었기 때문도 아니란다. 내가 네게 항상 고마움을 느꼈던 이유는 그저 하나, 네가 온전히 나를 믿어 주었기 때문이란다.”
“……화산의 모두가 장문인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조금 다르구나. 그렇지?”
청명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 화산의 모두는 현종을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처럼 현종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사제인 장로들조차도, 현종을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화산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믿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현종이 사형이라 따랐을 뿐.
그런 현종을 오롯이 전적으로 믿어 준 사람은 청명뿐이었다.
현종의 권위란 다른 곳에서 생겨난 게 아니다. 다른 이는 그게 누구라도 미친개처럼 물어뜯던 청명이 오직 현종의 말에는 거역하질 않으니, 지켜보던 이들도 자연스레 현종을 존중하고 믿게 된 것이다.
당사자인 현종은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네게 고마웠던 만큼, 나는 화산의 장문인으로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 무던히도 애를 써 왔단다.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구나.”
“……장문인.”
“너는 항상 내게 말했다. 장문인께선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게 그런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구나.”
현종이 빙그레 웃었다.
“천성이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하늘이 검게 물들며 들어찬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했다. 현종은 그 광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소림은 강남으로 갈 생각이 없더구나.”
“…….”
“너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
청명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나직이 덧붙였다.
“장문인께서도 짐작하고 계셨잖아요.”
“그래. 짐작이야 했지.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단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라도 시간을 벌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뻔한 대답을 들으러 가는 동안에는 나는 저 강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외면하지 않고 무언가라도 하고 있다고 나 자신에게 변명할 수 있었으니까.”
현종이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손 놓고 보내는 하루에 대한 대가라고 했더냐?”
“…….”
“그래. 그게 무엇인지는 이해했단다. 이해했지. 하지만 청명아…….”
현종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 대가를 안다고 해도…… 모르지 않는다 해도 그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기에 나는 너무도 겁 많은 사람이구나.”
“장문인…….”
현종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쓸쓸한 그의 시선이 무엇에 향해 있는지, 청명은 알 수 없었다.
“네가 말했지.”
“…….”
“세상에 옳고 그름으로 나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고. 어떤 것을 택하든 그저 다른 것뿐이니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가 현종에게 했던 말이다.
“하지만 청명아…….”
현종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틀리지 않다는 게 옳다는 말은 아니잖느냐.”
“…….”
“그건 내게, 세상에 정답이 없다는 말과도 같이 들리더구나.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데, 정답이 없고, 더 옳은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대체 어느 쪽을 택해야 좋겠느냐?”
청명은 보았다. 소매 아래로 살짝 드러난 현종의 손끝이 애처롭게 떨리는 모습을.
“……강 건너에서 죽어 가는 이들을 외면할 용기가 내게는 없다.”
“…….”
“그렇다고 저 강 너머로 향할 용기도 내게는 없다. 그토록 너희에게 협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줄 알아야 한다 말하고도 나는 너희가 저 강 너머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자신이 없단다.”
현종이 제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어쩐지 사뭇 지쳐 보였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다. 나는 그 선택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작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작은 사람이고 모자란 인물이란 걸 늘 그랬듯 쉬이 인정했다. 오랜 세월 현종을 끝없이 괴롭혔을 숱한 번뇌와 자책을 청명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현종이 말했다.
“방장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
“너무도 비겁하고…… 너무도 간악한 짓이었지. 어떻게든 이익만을 추구하겠다는 게 보이더구나. 실로 추악한 모습이었지.”
법정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현종의 목소리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런데…… 돌아오던 와중에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현종이 천천히 눈을 감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쩌면 나는…… 비겁할 용기조차 없는 게 아닌가?”
“…….”
“방장의 선택은 비겁할지언정 이유가 있다. 그는 저 강 너머에서 제 제자들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비난받고, 욕을 먹고 협의를 져버렸다며 손가락질당한다 해도, 철저하게 제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겠단 의지를 보인 것이지.”
“장문인…….”
“네 말대로라면 그것 역시 틀린 게 아니잖느냐. 그게 정말 잘못된 것이냐?”
“…….”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것 역시 용기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과거 저 허도진인이 택했던 것처럼, 법정 역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이는 오히려…… 나란다.”
청명은 현종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눈가가 붉어진 게 어둠속에서도 보였다. 순간 청명은 치미는 한숨을 어쩌지 못했다.
“모르겠구나. 저들과 나의 차이가 무엇에서 기인하였는지. 그저 보고 배울 선인이 없었던 탓인지. 그게 아니면…….”
“그런 건 아닐 겁니다.”
청명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화산이 전해야 할 것은 장문인께 이미 전해졌습니다. 모든 것을 선인의 뜻대로 행한다면 후대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겠죠.”
“…….”
“스스로 고민하지 않는 이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현종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시선을 돌렸다. 붉어진 그의 두 눈이 청명을 응시했다.
“그러니 청명아…….”
“예. 장문인.”
“조금만…….”
현종은 잠깐 말을 멈추었다. 도무지 뱉기가 버겁다는 듯. 하지만 잠시 후 끝내 그 무겁디무거운 말을 입 밖으로 밀어 냈다.
“……조금 비겁하면 안 되는 것이더냐?”
“…….”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제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듯했다. 뒤쪽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검이라고 그 목소리에 어린 떨림을 모를 리 없었다. 모두가 차마 현종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나 역시 안다……. 이건 후안무치한 짓이라는 걸. 저 소림과 다를 바 없이 추악한 선택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모르겠구나. 정녕 모르겠어. 왜 우리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더냐.”
“…….”
“저 소림도, 무당도 눈을 감고 자신의 비겁함을 외면하는데, 어찌하여 화산만이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냐? 어째서……. 대체 무엇을 위하여?”
청명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이 질문은 언젠가 그가 청문에게 던졌던 것이다. 어째서 화산이어야 하냐고, 어째서 화산만이 이래야 하는 것이냐고.
그 역시 노기와 증오를 담아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그 질문을 지금 현종이 그에게 똑같이 하고 있다.
현종이 탄식하듯 말을 이었다.
“피하지 않아 얻을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 분명히 있겠지.”
“…….”
“하지만 그렇게 얻을 것이…… 그 때문에 잃어야 할 것보다 더 크더냐?”
현종은 청명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가 없다. 그럴 자신이 없어…….”
“……장문인.”
“나는…… 협의를 위해 죽은 백천에게 훌륭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윤종이의 무덤 앞에서 웃어 줄 용기도 없고, 조걸이 놈의 관을 앞에 두고 그 뜻을 기릴 용기가 없다! 이설이의 주검을 안고 울부짖을 용기조차 없다.”
“…….”
“나더러…….”
현종의 턱이 덜덜 떨린다.
“나더러 싸늘하게 식은 네 시신을 두고, 살아남은 제자들에게 그 협의를 닮으라 훈계라도 하란 소리더냐? 내게? 이 내게?”
현종의 목소리에 격한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가 얻어야 할 협의에 대한 자부심이! 저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보다 더 중요하더냐? 그 가치를 위해서라면 저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며 누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냐? 대체 무엇을 위해서!”
“…….”
“이럴 바에야…….”
격앙된 어조로 외치던 현종은 이내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듯 웃고 말았다.
“차라리 섬서의 작은 문파로 남는 게 나았을 것을…….”
그 표정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청명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과거의 화산을 되찾는다는 것이 이토록…… 이토록이나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일인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
“나는 결코…….”
현종이 무너지듯 고개를 떨궜다.
청명은 차마 그쪽을 보지 못하고 흐르는 강에 망연한 시선을 던졌다.
‘사형.’
낮은 탄식이 한숨처럼 새어 나왔다.
‘어렵습니다, 사형.’
청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