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화. 우리가 그 옆에 없는 거다. (1)
강은 그저 흘러간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강은 그저 도도히 흐를 뿐이다. 변하는 것은 그저 그 강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청명은 불어오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강변에 홀로 앉아 있었다.
오른편에는 평소처럼 새하얀 술병이 놓여 있지만, 평소와 달리 그득 찬 채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할 뿐이었다.
술도 마다한 채 그는 그저 말없이 강 너머만 응시했다. 가라앉은 그의 눈빛은 내심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다.
그는 천천히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턱 즈음에서 멈춘 뒤에야 청명은 흉터와 상처로 가득한 손을 내리고 문득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세상으로 처음 돌아왔을 때, 자신의 흉 없는 작은 손을 보고 얼마나 당황했던가. 그런데 몇 해 지나지도 않아 어느새 과거 매화검존의 손과 별다를 것 없이 변해 버렸다.
결국 사람이란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 공연히 입이 썼다.
한참 그렇게 제 손을 바라보던 청명은 다시 이끌리기라도 한 것처럼 강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앉아 있는 내내 위장이 쥐어뜯기는 기분이었다. 저 너머에 그 저주받을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리고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청명은 거친 손으로 제 가슴을 꾹 눌렀다.
‘달라졌을까?’
청명은 정말 예전과는 달라졌을까?
어쩌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그라면 결코 이곳에 이리 잠자코 앉아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마교라는 말을 듣자마자 주변 상황을 모조리 제쳐 놓고 현황을 제 눈으로 파악하기 위해 강을 건넜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명은 이곳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러니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로?
‘뭐가…….’
어느새 짓깨문 입술에선 피가 비쳤다.
‘대체 뭐가?’
달라졌다면 이런 기분은 아니어야 한다. 마교라는 두 글자를 듣는 것만으로 영혼을 쥐어뜯기는 듯한 고통을 느끼진 않아야 한다.
저들에게 느껴지는 이 뿌리 깊은 증오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건, 결국 청명이 그 지독했던 과거에서 단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나?
대체 그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는가?
눈을 감을 때마다 그 차디찬 십만대산에서 눈조차 감지 못하고 죽어 간 이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생각나는데.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고 절명해야 했던 이들의 심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데.
대체 어떻게 변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청명은 조용히 제 무릎을 움켜잡았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청명은 그저 강 너머의 어딘가를 이를 악물고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오검이 그런 청명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내 불안한 시선을 감추지 못하던 조걸이 슬쩍 백천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백천의 표정을 본 순간 그는 거의 목구멍 밖으로 뱉었던 말을 도로 삼켰다.
얼음장처럼 굳은 사숙을 보니 도저히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왜?”
하지만 백천은 그런 조걸의 기색을 놓치지 않았던 모양으로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해.”
“아니, 그게…….”
잠깐 망설이던 조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놈을 말릴 거라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사숙?”
“…….”
“저놈이 저기서 마음먹고 강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막을 도리가 없는데.”
백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다.
“가까이 가면 막을 자신은 있고?”
“그건…….”
조걸이 입을 다물었다.
백천의 말도 맞다. 그들이 포위한다 해도, 청명이 정말 마음을 먹는다면 말릴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놈의 실력이라면 이곳에 있는 이들의 합공쯤이야 쉽게 뚫어 내고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아니…… 그래도…….”
조걸은 계속 미련이 남는다는 듯 청명이 있는 쪽을 힐끗거렸다.
“도대체가!”
그 순간 당소소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형은 대체 왜 저래요?”
“…….”
“마교. 저도 알아요. 증오스럽죠. 당가도 마교 때문에 거의 박살이 났었으니까요. 마교를 증오하지 않는 강호인이 어디에 있겠어요.”
“소소야.”
“아뇨. 물론 화산이 마교 때문에 가장 심하게 피해를 입은 문파인 것도 알아요. 하지만…… 화산은 이제 그 과거의 상처를 웬만큼 극복했잖아요?”
“…….”
조걸이 대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사형은 대체 왜 저러는 건데요? 대체 마교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마교 소리만 들으면 저렇게 정신이 반 나가 버리는 거냐고요!”
“그만해라.”
백천이 단호한 어투로 당소소의 말을 막았다.
그러자 당소소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단 얼굴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사형의 이해 못 할 행동 때문에 가장 화를 냈던 건 사숙이잖아요.”
“……이해 못 할 행동 때문이 아니다.”
백천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사연이 있지. 그리고 밝힐 수 없는 역린도 존재한다.”
“그럼 우리한테 말을 해 주면 되잖아요.”
당소소가 볼멘소리를 하자 백천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는 네가 가진 모든 사연을,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느냐?”
“그건…….”
당소소는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럴 리 없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이들에게 밝힐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 그게 설사 가족과 같은 사이라고 해도. 아니, 설령 정말 가족이라고 해도 내보일 수 없는 건 분명히 있다.
백천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너희가 화산에 들어오기 전에 뭘 했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
“…….”
“생각과 과거를 모두 알아야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거라면, 그건 이해라는 이름의 가식에 지나지 않아.”
“……그럼 왜 그렇게 화를 내신 건데요?”
백천이 청명 때문에 화를 낸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백천이 그렇게나 진심으로 청명에게 화를 낸 건 처음이었단 걸.
백천은 청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해 못 해 그런 게 아니야.”
그 옆얼굴에 다시 한번 언뜻 노기가 스쳤다.
“이해시키지 못할 테니까, 이해하게 만들 수 없으니까 설명하지 않고 나 혼자 뒤집어쓰겠다는 그딴 태도가 엿 같은 거다.”
“…….”
“차라리 이유고 뭐고 설명할 생각 없으니까, 닥치고 나를 따라 강남으로 가자고 했다면…… 욕이야 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체 없이 놈을 따라나섰을 거다.”
그 말에 윤종과 조걸이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내 가족은 종남에 있다.”
다소 뜬금없는 말에 모두가 살짝 당황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내 아버지는 종남의 장로고, 내 형은 종남의 대제자다. 하지만 놈은 그걸로 나를 놀려 댔을지언정, 그 사실을 걸고넘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종남 이야기만 나와도 이를 갈고 경기를 일으키는 놈이면서, 내가 화산 사람이란 이유로 내 과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윤종이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잖습니까, 사숙.”
“그럼 묻겠는데.”
그러자 백천이 진지한 얼굴로 윤종을 보았다.
“내 가족이 위험에 처해서, 내가 종남을 지키기 위해 종남산으로 달려가는 일이 벌어졌다면 어떨 것 같으냐. 아니면, 내 가족이 누군가에 의해 피살을 당해 내가 그 복수를 하겠다고 종남으로 달려간다면 저놈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
“그야…….”
그건 생각할 것도 없다.
그들이 아는 청명이라면 백천이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먼저 칼 뽑아 들고 종남산으로 전력 질주했을 것이다. 그들은 종남 사람이기 이전에 백천의 가족이니까. 혈육이니까.
그리고 그건 이곳에 있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놈은 그랬겠지. 당연히 그랬겠지.”
“…….”
“그런데 그 당연한 걸…… 그 너무도 당연한 걸 놈은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아.”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건, 그리고 내가 걱정하는 건, 저 빌어먹을 놈이 괜한 짓거리를 하다 죽어 버릴까 하는 게 아니야. 놈이 괜한 짓거리를 하다 죽어 버릴 때…….”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우리가 그 옆에 없는 거다.”
“…….”
“나는……. 그래, 나는 그게 화가 난다.”
꽉 쥐어진 백천의 주먹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당소소가 천천히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사숙.”
“아니……. 네가 죄송하다고 할 일이 아니야.”
결국 당소소의 말도 청명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아니 그녀를 탓할 리 없었다.
“애 같아.”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이설이 퉁명한 어조로 입을 뗐다. 대체로 같은 어조를 유지하는 그녀이지만 어쩐지 오늘은 미미하게 격앙된 느낌이었다.
“바보같이.”
“…….”
백천은 말없이 한숨만 푹 내쉬었다.
‘망할 놈 같으니라고.’
알고는 있다. 그들이 청명을 바라보는 시선과 청명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온도 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건 처음이다.
그 선명한 차이가 백천을 견딜 수 없게 했다.
“사숙.”
그 순간 윤종이 입을 열었다. 불안하고 떨떠름해 보이는 다른 이들과 달리 그의 시선은 여전히 고요하고 선명했다.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뭐냐.”
“지금 저 강남으로 가는 것은 더없이 위험한 일입니다. 목숨을 보장할 수 없죠.”
“그래. 당연히 그렇…….”
“그리고 화산이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청명이 녀석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의 화산에 청명이 놈보다 중요한 건 오히려 사숙일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백천이 입을 닫았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청명이 놈이 저 강남으로 같이 가자고 하시면, 사숙은 어쩌실 겁니까? 저놈을 따라 사지로 걸어 들어가실 겁니까?”
백천은 윤종의 시선이 홀로 또렷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모두가 청명의 불안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윤종만은 냉정하게 화산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백천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질문에는 건성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백천이 입술이 달싹이던 바로 그때였다.
“장문인이 오십니다!”
조걸의 다급한 말에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현종이 현상과 현영을 대동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검은 나누던 대화를 미뤄 두고 현종을 향해 예를 표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
현종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 그들의 예를 받았다. 표정이 평소와 달리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그들을 넘어 청명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잠시간을 침묵 속에 그쪽을 보던 현종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선 오검의 귀에 나지막한 현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도 따라오거라.”
“……예, 장문인.”
오검은 안색을 굳힌 채 현종의 뒤를 따라 청명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