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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30화 (1,031/1,567)

1030화. 다만 이해하십시오. (5)

“문제라 하셨습니까?”

현종은 순간 가슴속에 이는 불길함을 애써 모른 척하며,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맹주님.”

“어떤…….”

법정은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전에, 우선 상황부터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방장.”

“아시다시피 지금 항주에 마교가 발호한 상황입니다. 개방을 통해 저희가 입수한 정보대로라면, 마교는 지금 항주를 지배하고 있는 흑귀보는 물론이고, 항주에 있는 양민들조차 가리지 않고 학살해 대고 있습니다.”

현종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짐작했던 일이지만, 법정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확실한 정보입니까?”

“조금 전 개방에서 전해 온 소식입니다. 그들 역시 항주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나, 그곳에서 참혹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한 듯합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현종은 참담한 심정으로 연신 도호를 외었다.

머뭇거리는 시간에도 사람이 죽어 간다는 청명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적의 규모는 어찌 됩니까?”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개방 역시 구파일방에 속한지라, 삼 년 전에 이미 대부분 철수를 했지요.”

“그렇겠지요.”

평범한 거지들도 개방의 영향 아래 속해 있으니, 상황을 전달받는 데엔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방도가 직접 확인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맹주님.”

“예, 방장. 말씀하십시오.”

“아시다시피 마교의 발호는 모든 강호인들이 나서야 하는 일입니다. 선인들께서도 마교가 나설 때마다 정사를 가리지 않고 힘을 합쳐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습니까?”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나 화산의 장문이신 맹주님께서는 저 마교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법정은 잠시 목이 탄다는 듯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아시다시피 저는 마교의 발호에 촉각을 곤두세워 왔습니다. 그들은 물러날지언정 사라지지 않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만은 현종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산이 마교라는 존재를 잊고 살아갈 때도, 마교의 종적을 쫓아 그들에게 북해로 가 달라 부탁했던 이가 바로 법정 아니던가?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법정에게 가졌던 신뢰가 많이 흩어졌지만, 적어도 그가 마교를 경계해 왔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마침내 저들이 마각을 드러낸 이상, 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마교의 뿌리를 뽑을 생각입니다. 그건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이 당연히 져야 할 의무입니다.”

현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까지 오는 내내 우려가 컸다. 워낙 법정과 뜻이 어긋난 적이 많았기에 마음에 깃든 불안을 쉽사리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마교에 관한 한은 그의 뜻과 법정의 뜻이 그리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종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기에 맹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때 법정이 현종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사가(私家)의 예의. 그건 소림의 방장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전하는 감사였다.

“왜, 왜 이러십니까. 방장!”

현종이 당황해하자 고개를 든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좋게 말한다고 한들, 맹주님과 제 사이에 전에 없던 껄끄러움이 자리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 힘든 걸음을 해 주신 이유는 오직 이 강호의 안녕과 양민들의 삶을 위한 것일 터. 한 사람의 불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서 맹주님의 결단에 감사드리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방장. 낯이 뜨겁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법정이 불호를 외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은 채 잠시 그렇게 불호를 외던 그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깊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현종을 마주 보았다.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맹주님.”

“예.”

“저는 우선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구파일방을 비롯한 천하의 문파들에게 협조를 요청할 생각입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만으로는 충분치 않을지도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우맹 역시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현종의 힘 있는 대답에 법정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조금 전에 말씀드린 문제점 때문입니다만.”

“예. 말씀하시지요.”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자면 이건 시급을 다투는 일입니다. 이것저것 따지고 잴 일이 아니지요. 양민들을 구하고 마교의 기세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당장 누구라도 저 강남으로 향해야 합니다. 느긋하게 지켜보기에는 피해가 너무도 클 것입니다. 저 사패련이 양민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것이란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습니다.”

“으음.”

그 역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맹주님.”

“예, 방장.”

“아시다시피 지금 소림은 강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예?”

그 순간 현종의 안색이 급변했다.

“저주받아 마땅할 강남불침의 조약이 아직 그 효력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지금 구파일방은 저 강을 넘어 마교를 상대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아, 아니, 방장. 그게 무슨…….”

현종은 당황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런 조약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잖습니까!”

“물론 저 역시 그리 생각합니다. 하지만 맹주님. 그건 저희가 정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법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패련의 장일소가 맹주님처럼 대의를 위해 작은 것을 내려놓을 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는 어떤 식으로든 이 조약으로 이득을 취하려 할 것입니다. 아니, 무엇보다 그를 상대로 대화가 통하기나 하겠습니까?”

이제 법정을 보는 현종의 시선은 망연했다. 현종이 말했다.

“장일소가 구파일방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 아니었다면, 어찌 마교의 소식을 굳이 전했겠습니까?”

“그 의도는 섣불리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상대는 저 장일소가 아닙니까?”

“그건…….”

현종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외통수다.

소림이 처한 상황, 그가 처한 상황은 현종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장일소도 경우를 아는 이니 협상을 시도해 보라’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여.”

법정이 은근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죄송하지만, 맹주님께 어려운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현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법정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법정의 목소리는 현종이 일어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무심히 귀를 파고들었다.

“제가 알기로 천우맹은 강남불침의 조약에 제약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방장.”

“부탁드립니다, 맹주님.”

법정이 다시 한번 현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강남의 고통받는 양민들, 그 생때같은 목숨을 위한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천우맹이 강을 건너 우선 마교를 상대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에 힘을 준 현종이 들끓는 눈으로 법정을 노려보았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방장께서 하신 부탁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느라 현종의 말은 뚝뚝 끊기는 듯했다.

“……정말 강남의 양민들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저희 천우맹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함입니까?”

“당연히 전자입니다.”

법정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그 단호한 태도에 현종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방장의……. 아니, 소림의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녕!”

현종이 목소리를 높인다.

“정녕 그게 소림의 뜻이라고요?”

법정은 답이 없었다. 현종은 씹어뱉듯 말했다.

“가는 길이 다를 뿐이라 여겼습니다. 물론 섭섭할 때도 있었고,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건 그저 서로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에! 서로 세상을 위하는 방법이 다르기에 벌어지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

“천하만민을 위하는 마음만은 다르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소림은 그런 곳이니까! 그런 곳이어야 하니까! 그런데 그게 정녕 소림의 뜻입니까? 정녕?”

법정이 묘한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어 뱉은 말은 현종의 어이를 저 멀리 날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빈승은 대체 왜 맹주님께서 이리 노하시는지 그 연유를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뭐라고…….”

“그날!”

법정의 단호한 목소리가 현종의 말허리를 끊었다.

“장강에서 저희가 서로 마주했던 그날, 맹주님께선 제게 분명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천우맹은 천우맹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겠다고.”

“…….”

“쓰라린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감탄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관철하기 어려운 말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데…….”

법정이 미소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이제 보니 천우맹이 말하는 옳음이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법정!”

결국 노기를 누르지 못한 현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법정이 차갑게 말을 뱉었다.

“보름.”

“…….”

“장강불침 조약이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보름.”

“…….”

“그 보름이 지나는 순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마교를 응징하기 위해 곧장 저 강을 건널 것입니다. 그러니 맹주님께서는 그저 선택하시면 됩니다. 먼저 강을 건널 것인지, 그게 아니면…….”

법정의 서늘한 시선이 현종을 훑었다.

“구파일방이 출진하기를 이곳에서 보름 동안 기다리실지 말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현종과 달리 법정은 느긋이 아직 희미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목을 축이는 얼굴이 놀라울 만큼 태연했다.

“맹주님. 저 역시 궁금합니다.”

“…….”

“과연 천우맹이 말하는 그 협의와 옮음이라는 것이 자신들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관철되는 것인지, 아니면 형편 좋을 때만 나오는 얄팍한 수작질에 불과한지 말입니다.”

“지금 그게…….”

법정은 손을 뻗어 현종의 찻잔을 살짝 눌렀다. 식어 가던 찻물이 단숨에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물론 저는…… 천우맹이 진정으로 협의를 관철하는 곳이기를 더없이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이건 거짓 없는 진심입니다.”

현종은 말없이 법정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선 더 이상 법정에 대한 어떤 신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법정이 말을 이었다.

“개방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물자를 비롯한 필요한 것을 모두 지원해 드리지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러니 부디 현명한 결단을 내리시기를.”

현종의 눈에선 도인답지 않은 증오와 분노가 넘실거렸다.

“……가겠습니다.”

“예. 살펴 가시지요.”

현종은 이내 찬바람이 나도록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밖을 향해 발을 떼었을 때, 등 뒤에서 법정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산검협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

현종은 대답 없이 문을 쾅 닫고 떠났다.

홀로 방 안에 남은 법정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피어났다.

“사람 참.”

그가 외는 불호가 고요한 방 안에 공허하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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