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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29화 (1,030/1,567)

1029화. 다만 이해하십시오. (4)

멀리 지는 해를 바라보던 혜평(慧平)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에는 갑갑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어째서 숭산을 떠나 이 먼 장강에서 이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혜평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사패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란 말은 몇 번을 들어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들이 장강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매화도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저 먼발치에서 구경한 것뿐이니까.

막상 수로채와 싸운 것은 소림이 아닌 천우맹이었다. 그러니 사패련을 상대하기 위해서 장강을 떠날 수 없다는 말을 들어 봐야 공허할 수밖에.

짙게 밀려오는 노을을 바라보던 혜평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사형.”

“……왜 그러느냐?”

함께 번(番)을 서던 혜공(慧空)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혜방 사형은 숭산에 잘 도착했을까요?”

“…….”

혜공의 대답은 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무거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왜? 너도 숭산으로 돌아가고 싶으냐?”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저…….”

혜평은 말을 하다 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습니다, 사형. 혜방 사형이 방장께 무례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나, 그게 정녕 참회동에 들어야 할 정도의 잘못인지는…….”

“참회동에 들기로 한 것은 혜방 사형이 스스로 정한 일이다.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이 아니다.”

“……예, 그렇죠.”

혜공이 이제야 시선을 돌려 혜평을 응시했다.

“따라가지 못한 것이 후회되느냐?”

혜평은 입을 꾹 닫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연히 혜방을 따라 숭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장강에 도착한 이후 방장에게서 받았던 명들은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은 소림을 위한 것이리라. 법정의 선택이 오직 소림에 대한 걱정에 기반한단 사실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중생들을 위해 스스로 거름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불자라 배웠습니다.”

“…….”

“그렇다면 저희는…….”

“됐다.”

혜공이 혜평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끊어 버렸다.

“의혹이 있다 해도 그리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말거라.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

“사유할 것이 있다면 깊이 사유하고,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고 믿음이 설 때 비로소 입 밖으로 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미혹일 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형.”

혜평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한 번씩 생각하게 된다. 그가 혜방을 따라가지 못한 이유는 그저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지. 방장의 명을 거스르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은 아닌지 말이다.

‘나는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중생들을 위해 한 몸을 바치겠다 다짐한 불자이거늘, 방장의 진노가 두려워 스스로 옳다고 여긴 일을 행하지 못하였다. 그런 그에게 법정의 옳고 그름을 따져 물을 자격이 있겠는가?

혜평이 내면으로 침전해 가던 바로 그때였다. 혜공이 말했다.

“누군가가 온다.”

“예?”

혜평이 고개를 들어 장원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누구…….’

해가 지는 이 시간에 굳이 이곳에 찾아올 이가 또 있던가?

선자불래(善者不來)라는 말을 떠올린 혜평이 얼굴을 굳혔다.

“어?”

하지만 이내 그의 입에서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가오는 이들, 그중 선두에 선 이가 낯이 익어서였다.

“사형. 저자……. 아니, 저분은?”

“……맞는 것 같구나.”

혜공의 얼굴도 굳어졌다.

‘저분이 여길 왜?’

다가오는 이는 다름 아닌 화산의 장문인 현종이었다.

물론 현종이 이곳에 오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나 지금 소림과 화산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어색한 방문인 것은 분명했다.

“어찌…….”

“경거망동하지 말고.”

혜공이 혜평을 진정시켰다.

“예의를 갖춰 맞이해라.”

“예, 사형.”

그 짧은 말에선 현종에 대한 혜공의 공경심이 느껴졌다. 비록 소림과 화산의 관계가 경색된 것은 사실이나, 소속을 떠나 한 사람의 강호인으로서 현종은 분명 공경과 존중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현종이 그들의 앞에 다다르자 혜공이 절도 있게 반장을 해 인사를 건넸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현종 역시 포권을 하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레 나오는 예의였다.

“화산의 현종입니다. 전갈 없이 갑작스레 방문한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장문인. 불편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혜공이 고개를 내젓고는 넌지시 물었다.

“어쩐 일로 방문하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현종이 짧게 숨을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

“논의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화산의 현종이……. 아니, 천우맹의 현종이 방장을 뵙고자 한다고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방장을 말입니까?”

“예.”

혜공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지금 법정은 외인의 방문을 받지 않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선 이는 외인이되 그저 단순한 외인이라 치부할 수 없는 사람이다.

천우맹의 맹주가 직접 방문했는데, 원칙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잠시 고민을 하던 혜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구하지만 이곳에서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방장께서 외인의 방문을 받고 계시지 않아, 먼저 맹주님께서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전하고 허락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혜공이 혜평에게 눈짓한 뒤 재빠르게 문을 열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종은 심유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장원을 바라보았다.

“장문인.”

그의 뒤에 서 있던 현영이 걱정이 묻어나는 말투로 넌지시 말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달리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적어도 먼저 약속이라도 잡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달려와 매달리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그리 곱게 보이지 않을 겁니다. 이러다 문전박대라도 당하면 웃음거리가 됩니다.”

강호의 예의를 따지자면 문전박대를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현종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우선은 달려오는 쪽을 택했다.

“알고 있다.”

“그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현종은 현영을 보는 대신 한산한 장원을 응시했다.

- 다만 이해하십시오.

이해하기에 체면을 차릴 수 없다. 이해하기에 절차를 지킬 수 없었다. 그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 정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잃고 있을 이들의 희생에 비한다면 한 푼의 값어치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강남의 상황도 강남의 상황이지만…….”

현종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는 그 아이가 언제까지 참아 줄지가 걱정이구나.”

“……청명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무리 청명이 녀석이 특별하다고는 하나, 장문인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엄벌을 내려야지요.”

언제나 청명을 싸고도는 현영이지만, 이 일에 있어서 만큼은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이건 어쩌면 문파와 맹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종의 생각은 달랐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두고,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를 시험하는 것은 도인이 할 일이 아니다.”

“……그 말은 맞습니다만…….”

“최선은 서로에게 더 나은 길을 찾는 것이겠지. 나는 제자들을 억압하는 장문인이 되고 싶지 않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장문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야 이렇다고 해도, 저 소림이 어찌 나올지는 의문이었다…….

그때.

빠른 걸음으로 다시 나온 혜공이 현종을 향해 정중히 반장 했다.

“방장께서 뵙겠다 하십니다. 소승이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종이 긴장한 얼굴로 장원에 발을 내디뎠다.

무릎 위에 얹힌 현종의 손이 불편한 듯 미미하게 꼼지락거렸다.

관계의 정의는 마주 앉았을 때 드러난다고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이와 현종의 관계는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그의 앞에 종남의 장문인이 앉아 있다고 해도…… 아니, 설사 장일소가 앉아 있다 해도 이토록 불편한 기분은 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상대는 현종을 앞에 두고도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지 표정이 여유로웠다.

“그래…….”

현종의 앞에 앉은 이, 법정이 앞에 놓인 찻잔을 채우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천우맹의 맹주께서 어쩐 일로 소승을 찾아 주셨습니까?”

찻잔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부연 김이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현종은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눌렀다.

사실 법정과 그의 관계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천하후기지수비무대회에서 처음 법정을 보았을 때만 해도 이런 악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조금쯤 동경했을지도 모른다. 강호 무림 태산북두 소림의 방장인 그를, 현종은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위치에서 천하를 경영해 가는 그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음.”

그런 현종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법정이 빙그레 웃었다.

“저희가 처음으로 본 게 벌써 몇 해가 흘렀습니다.”

“……그렇습니다, 방장.”

“그때도 제가 이리 마주 앉아 차를 따라 드렸던 것 같은데.”

“그러셨지요. 그때 방장께서 하신 말씀을 저는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음. 제가 그때 뭐라 했는지…….”

현종이 가만히 법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방장께서 따라 주시는 차에 황송해하는 저를 보며 이리 말씀하셨지요. 차는 그저 차일 뿐이다. 황제가 따른 차도, 양민이 따른 차도 그저 차일 뿐이다.”

법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게는 그 말씀이 정말 크게 와닿았습니다. 같은 말이라 해도 누구의 입에서 나왔느냐에 따라 그 무게가 다르지요. 소림의 방장께서 그런 말씀을 해 주시니, 무거웠던 어깨가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법정의 눈가가 살짝 실룩였다.

현종은 그저 과거의 소회를 풀어 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정의 귀에는 저 말이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정녕 같은가?’라고 묻는 것처럼 들렸다.

어떤가? 그때의 법정과 지금의 법정은 정말 같은 사람인가?

법정은 그 질문에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말했다.

“나무는 그저 그곳에 있으나 바람이 내버려 두지 않는 법이지요.”

현종이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사가 참 우습습니다, 맹주.”

법정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이리 차 한잔 나누기도 어색한 사이가 될 거라고 그때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민망할 따름입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지나고, 법정이 말없이 찻잔을 바라보았다. 뜨겁게 김을 피워 올리던 차는 점점 식어 갔다. 사람도 이럴 것이다.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시간은 모든 걸 변하게 만든다.

“그래. 어인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발길 주시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법정의 물음에 현종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강남의 일을 들으셨습니까?”

“사패련의 전언 말씀이시군요.”

“예, 방장. 마교의 발호 말입니다.”

현종은 마교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법정은 그저 평온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 일을 논의하고자 찾아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현종이 마른침을 삼켰다.

애초에 먼저 방장을 찾아왔다는 사실부터 이미 현종이 숙이고 들어온 셈이다. 법정 같은 이라면 이 사실을 구실 삼아 무슨 말을 해 댈지 모른다.

하지만 이어진 법정의 말은 현종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정말 잘 오셨습니다.”

“……예?”

뜻밖의 반응에 현종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법정은 그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제가 직접 찾아뵙고 상황을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던 참이었는데, 이리 와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과연 맹주님께서는 천우맹주 자격이 충분할 만큼 마음이 넓으십니다.”

“아…….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마교에 관한 일은 언제든 모든 강호가 나서서 처리해야 할 만큼 중차대하지요. 당연히 논의를 해야 하고말고요.”

“예, 그렇습니다.”

현종은 순간 자신이 그동안 법정을 오해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문득 생각해 보았다. 그가 보였던 이기심도 사실은 강호의 안위를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기에 빚어진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 것이다.

하나 그때.

“한데…….”

법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작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맹주님.”

어쩐지 낯선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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