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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27화 (1,028/1,567)

1027화. 다만 이해하십시오. (2)

말이라는 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때로는 그 안의 의미보다, 그 말 자체에 실린 느낌이 더 많은 것을 전해 주기도 한다.

지금 청명이 한 말이 그러했다.

안에 담긴 의미 역시 작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절절히 전해진 것은 청명의 말에 실려 오는 감정이었다.

그저 손 놓고 기다리는 하루에 따르는 대가.

그 말이 주는 무거움에 침묵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천천히 눈을 뜬 현종은 자신을 응시하는 청명의 눈빛을 받아들였다.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 그 안엔 어떠한 질책도 재촉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다르구나.’

결정은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정이 무엇을 희생하는 것인지를 알고 정하는 것과 모르고 정하는 것이 같을 리 없다.

지금 청명은 현종에게 그의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벌어질 모든 일에 대한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말한다.

그저 이해하라고. 아무렇지 않게 잠시 미뤄 둔 선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담보로 하고 있는지를 그저 이해하라고.

“수천의…….”

현종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목숨.”

느릿하게 흘러나온 그 말이 모두의 숨을 옥죄었다.

저 말에 어떻게 떨지 않을 수 있는가. 설사 그런 이가 있다 해도, 적어도 이곳에는 함께 자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은 천우맹이니까.

“가주님.”

“예, 맹주님.”

현종이 당군악을 보며 말했다.

“방금 본문의 제자가 한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당군악이 청명을 흘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과거 마교의 행적을 감안한다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

“물론 지금 발호한 마교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니, 파급력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시간이 갈수록 민간인의 피해가 늘어날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면…….”

“수천의 목숨은 몰라도…….”

그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백의 목숨이 사라지는 것은 확실하다는 말이리라.

현종이 가만히 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그래서였구나.’

원망한 적도 있었다. 내심 미련하다고 탄식한 적도 있었다.

모두가 발을 뺐는데 어째서 마지막까지 목숨을 던져 가며 선봉에 섰냐고, 왜 조금 더 먼 미래를 보지 못했냐고 선조들을 마음속으로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화산이 뒤로 밀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 테니까. 그렇기에 선조들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천마를 죽이고, 마교를 무찌르기 위해 모든 것을 건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의 결과를 모두 지켜본 현종은 지금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눈가에서 손을 뗀 현종이 청명을 바라보았다.

“청명아.”

“예, 장문인.”

“……있는 그대로 말하마. 나는 지금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가장 옳은지 잘 모르겠구나.”

“…….”

“그러니 들어 보자꾸나. 너는 우리 화산이, 그리고 우리 천우맹이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청명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개방을 기다릴 일이 아닙니다.”

잠시 말을 멈춘 청명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 항주의 정보를 쥔 건 사패련입니다.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가장 확실한 이들에게서 들어야 합니다.”

“사패련…….”

현종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패련에게 정보를 얻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저 구파일방이 사패련과 천우맹의 결탁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천우맹이 먼저 나서 그들에게 정보를 요청하는 것은 소림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결과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청명 역시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한시라도 빨리 사패련에게서 제대로 된 정보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네 말대로 사패련이 항주의 정보를 가장 먼저 얻고 있기는 하겠지만, 그들을 신뢰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당군악의 말에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있는 그대로 말할 겁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저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주었다는 건 어떻게든 우리도 끌어들이겠다는 작정이겠죠. 그런데 굳이 적의 규모를 축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장하면 과장했지.”

“하지만…….”

청명이 당군악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망설이고 있을 시간에 또 한 사람이 죽습니다.”

당군악의 입에서 절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그도 이게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인지 슬슬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항주에 거지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평범한 거지들은 마교의 전력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교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개방의 고수는 강남불침의 조약 때문에 항주에서 모조리 물러난 상황이다.

결국 지금 이 시점에서 발호한 마교의 전력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줄 수 있는 창구는 사패련이 유일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 정보를 쥐고 있는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이들이니, 당군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민에 빠졌다.

저 사패련을 신뢰할 수 없으니 확실하게 정보를 검증해야 한다. 하지만 정보를 검증하느라 시간을 끌수록 양민들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상황을 대체 어찌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그럼 지금 자네는 사패련의 말을 믿고 저 강남이라는 사지를 향해 제 발로 걸어 들어가자고 말하는 건가?”

“상황이 그렇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청명의 시선이 당군악에게서 현종으로 옮겨 갔다.

“선택은 맹주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 눈빛이 현종을 무겁게 짓눌렀다.

“옳은 선택 같은 건 없습니다, 장문인.”

청명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세상일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명확하지 않으니까요. 선택이란 정답을 맞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옳은 선택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선택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소매 안에 감춘 현종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나, 그렇기에 틀린 선택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를 뿐이지요.”

“…….”

“장문인이, 맹주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옳고 그름이 나뉘지 않는 일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해야 할 이가 있어야 하니까요. 무엇을 택하든 결정하지 않고 미루는 것보다는 반드시 나을 것입니다.”

현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그러니 그저 택하십시오. 그걸로 충분합니다. 맹도들과 문도들은 맹주님의 선택을 따를 것입니다.”

비로소 현종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렇다면…….”

그가 입을 열어 대답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나 묻자.”

지금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천이 입을 열었다. 그를 바라보는 현종의 눈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

백천은 화산의 회의가 아닌 천우맹의 회의에서 이렇게 먼저 입을 여는 경우가 드물었다. 심지어 현종의 말을 자르면서까지 말이다.

차게 굳어진 백천의 얼굴에선 어쩐지 살기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장문인께서 저 마교를 상대하지 않고 이곳에서 지켜본다는 결론을 내리신다면…….”

“…….”

“너는 어쩔 셈이냐?”

그건 청명에게로 향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청명은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백천에게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그저 현종만 채근하듯 바라볼 뿐이었다.

“대답해라.”

“장문인.”

청명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현종만을 부르자 결국 백천의 언성이 높아졌다.

“장문인이 아니라 내게 대답해, 이 새끼야!”

목소리에 노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실로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이곳의 누구도 그런 백천의 행동을 탓하지 않았다.

청명이 침묵으로써 한 대답을 이곳의 모두가 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저놈은 갈 것이다.

이곳에 모두를 남겨 두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서라도 마교가 있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당가는 몰라도 화산의 사람들은 확실하게 청명의 의도를 이해했다.

결국 백천이 청명의 멱살을 틀어쥐고 제 쪽으로 콱 잡아당겼다.

“문도들과 맹도들은 장문인의 명에 따를 것이라고?”

“…….”

“그럼 너는? 너는 맹도가, 화산의 문도가 아니냐? 너는 그럴 필요가 없는 거냐? 이 개 같은 새끼야.”

거의 들어 올려 버릴 것처럼 청명을 끌어당긴 백천의 얼굴은 낯설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껏 보여 준 적 없는 노한 얼굴이었다.

“대답해!”

청명은 무심한 눈으로 그런 백천을 마주 보았다.

“이거 놔, 사숙.”

“사숙? 네가 정말 나를 사숙으로 생각은 하고?”

“…….”

“이 망할 놈이…….”

“그만하거라! 이 무슨 추태더냐!”

결국 보다 못한 현상이 일갈했다. 백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마지못해 멱살 쥐었던 손을 놓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청명을 노려보는 눈빛만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백천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뒤를 지키고 있던 다른 오검 역시 백천과 다를 바 없는 눈으로 청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현종이 굳은 얼굴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절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현종은 그 사실을 이해하고도 남는 사람이었다.

그의 입이 열리고 위엄 넘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우맹의 맹주이자,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명하겠소.”

“예, 맹주님.”

현종의 눈빛이 사위를 짓눌렀다. 천우맹의 맹주라는 자리에 걸맞은 강인한 모습이었다.

“강남의 상황이 시급을 다투기는 하나,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강남에 진입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오. 다음 행동을 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정보가 필요하오.”

청명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어찌 되었든 개방에서 나올 터, 개방과 논의하는 동시에 근방에 머물고 있는 구파일방과 접선하여 공조를 논해 보도록 하겠소. 그리고 구파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수급하지 못할 시에는…… 사패련과 접촉하는 것 역시 마다하지 않을 것이오.”

“…….”

“하루.”

현종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 모든 것은 하루를 넘기지 않을 것이고, 그 뒤에는 천우맹의 대응 방향을 결정할 것이오. 그러니 이 시간부로 맹도들의 자리 이탈을 엄격히 금하겠소. 모두 이 장원에서 벗어나지 않고, 다음 명을 기다리도록 하시오. 이건 맹주로서의 명이오. 명을 어기는 이는 반드시 엄벌에 처할 것이오!”

“맹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현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청명만은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서늘한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 깊은 눈빛 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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