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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26화 (1,027/1,567)

1026화. 다만 이해하십시오. (1)

백천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사람에게는 누구나 역린이 있다.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 건드리는 순간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노기를 드러내는 부분.

청명에게 있어 그 역린은 분명 마교다.

문제는 역린을 자극당한 청명의 반응이 다른 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다는 점이었다. 마교라는 말을 들은 청명은 평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백천은 알지 못한다. 도대체 왜 청명이 이토록 마교라는 말만 들어도 격렬하게 반응하는지. 하지만 지금 백천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대응이었다.

“청명아. 이건…….”

백천이 어떻게든 대화를 해 보려 했지만, 청명의 차가운 목소리는 여지없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대답해, 사숙.”

청명의 눈빛이 스산했다.

“뭐가 나타났다고?”

흘러나오는 살기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저게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아는 백천조차도 순간 몸을 떨 정도였다.

“청명아. 우선…… 진정해라.”

“대답부터 해.”

“청명아.”

순간 청명의 얼굴이 노기로 일그러졌다. 거의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청명은 제 팔을 잡은 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이설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다.

“진정해.”

“…….”

“진정.”

흔들림도 없이 차분한 그 목소리에, 결국 청명의 입에서도 긴 숨이 토해져 나왔다. 질끈 물고 있던 입술에도 핏기가 점차 돌아왔다.

“……그래. 진정했으니 이야기해 봐.”

“…….”

“사숙.”

백천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숨기는 건 상책이 아니다. 결국은 청명도 알게 될 테니까.

백천이 설명하라는 듯 조걸을 돌아보았다. 조걸은 백천과 청명을 번갈아 보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끄응. 그게…… 나도 아직 상황을 정확하게 안 것은 아니지만…… 사패련에서 사자가 온 모양이야.”

“사패련?”

“내가 듣기로는 그랬어.”

청명의 눈빛이 조금 더 가라앉았다.

“계속해 봐.”

“……그 사자가 장문인을 뵙고 싶다고, 강남에 마교가 발호했다는 사실을 전하러 왔다고 하더라고.”

말을 하는 내내 조걸은 청명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굳어 있는 얼굴에서는 감정을 읽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조걸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들은 건 그게 전부야. 운암 사숙조께서 그를 데리고 장문인께 가셨거든. 당가주님 이야기도 나온 것 같으니, 아마 지금 함께 계시겠지.”

한 번 더 청명의 눈치를 살핀 조걸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일 같으면 곧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

청명은 잠시간 말없이 조걸과 다른 오검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백천이 다급하게 그를 향해 소리쳤다.

“야! 어디 가!”

청명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한다.

“확인해 봐야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장 강남으로 달려가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뒤이어진 말은 백천이 혼비백산하여 청명에게로 달려가게 했다.

“사패련 새끼들한테.”

“야, 이 미친놈아!”

전력으로 달려간 백천이 청명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걸 왜 사패련에 확인해, 인마!”

“…….”

“일단 진정해라! 이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잖느냐?”

“서둘러?”

청명이 백천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백천은 순간 잡은 팔을 놓아 버릴 뻔했다. 청명의 눈이 순간적으로 너무도 낯설게 느껴져서였다. 분명 청명의 눈이되, 그가 알고 있는 청명의 것과는 무언가 달랐다.

“사숙.”

“으응?”

“마교가 뭔지 알아?”

백천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알고 있다. 이미 마교를 겪어 보았으니까.

하지만 저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 마교를 조금 더 안다는 게 마교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이 되진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놔.”

“……아니.”

백천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된다. 넌 지금 이성을 잃었어.”

“알았으니까, 놔.”

“빌어먹을! 왜 말귀를……!”

백천이 청명의 멱살을 콱 틀어잡았다. 노호성을 내지르려는 바로 그때였다.

“뭐 하는 짓이냐!”

커다란 호통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움찔한 백천이 청명의 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현영이 진노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잘하는 짓들이구나.”

“……사숙조님, 이건…….”

할 말이 없어진 백천이 말끝을 흐렸다. 노기를 숨기지 않고 두 사람을 노려보던 현종이 차갑게 말했다.

“따라오너라.”

두 사람이 바로 움직이지 않자 현영이 혀를 찼다.

“장문인께서 부르신다.”

백천이 슬쩍 청명을 돌아보았다. 침묵하던 청명이 현영을 향해 걸음을 옮기자, 백천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 뒤를 따랐다.

긴장해 있던 오검 역시 일제히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소매로 훔친 조걸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윤종을 돌아보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형?”

“……글쎄.”

앞선 청명의 등을 주시하는 윤종의 얼굴이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우선은 장문인을 뵈어야겠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건지 확인해야 할 테니까.”

“……예, 사형.”

어딘가 개운치 않은 조걸의 대답을 들으며 윤종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평소답지 않게 낯빛이 어두운 현종의 곁에 당군악이 앉아 있었고, 그 좌우로는 화산과 당가의 중진들이 모였다.

이 방 안의 분위기를 이토록 어둡게 만드는 건 현종이나 당군악이 아니었다. 그 건너편에 좌정한 청명이었다. 그가 얼굴을 굳힌 채 침묵하니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청명의 존재가 이 천우맹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맹주님.”

“……예.”

침묵이 너무 길어진다고 생각했는지 당군악이 슬쩍 채근했다. 그러자 현종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패련에서…….”

그러고도 잠시간 말을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말은 모두가 한숨을 두세 번 쉰 뒤에야 이어졌다.

“사패련에서 상황을 전해 왔습니다. 항주에 마교로 짐작되는 이들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마교.”

누군가가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침묵하는 이도, 어찌하지 못한 탄식을 흘리는 이도 그 심정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마교라는 두 글자가 주는 무게는 그 누구에게도 가볍지 않으니.

특히나…….

“마교…….”

화산의 제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당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했다. 당연한 일이다. 화산은 마교에 대한 감정이 실로 복잡하고 어두울 수밖에 없다.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현상의 물음에 현종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선은 이게 전부라고 하더군. 그리고 추가적인 사항은 따로 전달해 준다고 하더군.”

현상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현영이 입을 열었다.

“사패련에서 전하라 한 말이라면, 장일소 그자의 지시일 텐데 그 말을 모두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장일소의 수작질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군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확률은 높지 않을 것입니다, 장로님.”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발호했다 알려진 지역이 항주이기 때문입니다.”

당군악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도 떼어 내듯 말했다.

“화산 분들은 특히 잘 아실 겁니다. 저 마교는 강호인과 양민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공적이 된 것이 아닙니까?”

현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그러한 사실을 미처 잘 알지 못했다. 화산의 몰락은 화산의 역사만 잊게 한 것이 아니니까. 화산에는 마교에 대한 정보 역시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항주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거하는 곳이지요. 특히나 항주는 천하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입니다. 만약 사패련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이 모두 퍼지는 데 채 며칠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으음. 과연…….”

“장일소가 굳이 그런 뻔히 들통이 날 수작을 부리지는 않을 겁니다.”

당군악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현종의 말대로라면 사패련에서 딱히 뭔가를 요구한 것도 아니다. 그저 상황을 전한 정도이지 않은가? 아무리 장일소의 수작질에 치가 떨린다고는 해도, 벌써 장일소를 의심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하면…….”

그때 당패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들이 전해 온 정보가 사실일 확률이 높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크흠.”

현종이 크게 헛기침해 분위기를 환기했다.

“여하튼 전달받은 상황은 그러합니다. 하여…… 우선은 개방에 문의하여 강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한 뒤에 맹의 향방을 정할 생각입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는 그게 분명히 정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현종은 여전히 무언가가 걸리는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은 건너편에 있는 한 사람에 고정되어 있었다.

“청명아.”

나직한 그 목소리에, 청명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현종을 응시했다. 눈빛이 섬뜩할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현종은 나직이 침음성을 흘리고는 물었다.

“혹여 달리 할 말이 있더냐?”

청명은 잠시간 가타부타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청명아?”

“제가 말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번 더 불리고서야 그가 입을 뗐다.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날카로웠다.

“마교의 출현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있다면, 이 자리에서 느긋하게 정보를 기다리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겠지요.”

“……그게 무슨 의미더냐.”

“천마는 강호인과 양민에 차이를 두지 않는다. 분명 그리 말하셨습니다.”

청명의 시선이 이번에는 당군악에게로 향했다. 그건 분명 그가 한 말이었다. 당군악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네.”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하신 말씀입니까?”

당군악이 되물으려 하는 순간 청명이 먼저 말했다.

“오늘은 항주였지요.”

“…….”

“내일은 소주가 될 겁니다.”

당군악은 차마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그다음은 온주(温州)가 될 것이고, 다음은 복주(福州)가 되겠죠.”

온기라고는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싸늘한 건 그 말에 담긴 의미였다.

“마을이 지워지고.”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도시가 지워지고.”

“…….”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지워집니다.”

현종의 손끝이 절로 떨렸다.

“장문인께서 기다리자고 한 그 하루 동안.”

청명의 눈이 그런 현종을 꿰뚫듯 응시했다.

“수백이 아니라 수천의 목숨이 사라집니다.”

“…….”

“그래서!”

청명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제 잇속을 찾아 대며 발을 빼는 이들이 등 뒤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이 있었던 겁니다.”

으드득.

청명이 이 가는 소리가 정적뿐인 방 안에 울렸다.

“청명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해하십시오, 장문인.”

“…….”

“그렇게 손 놓고 기다리는 하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현종은 순간 아뜩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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