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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23화 (1,024/1,567)

1023화. 지금 뭐라고 했어? (8)

인간은 망각한다.

시간이라는 독을 삼킨 인간은 천천히 모든 것을 잊어 간다. 배운 것, 들은 것, 심지어 자신이 겪은 것조차.

그렇기에 인간은 다시 도전할 수 있다.

뼈저린 실패를 경험한 인간도 망각으로 인해 다시 도전할 수 있고,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쳤던 인간도 망각하기 때문에 다시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인간들이 이룩한 눈부신 발전의 태반은 ‘망각’이 가져다준 선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흑귀보의 모두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세상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어떤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다 해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을…… 그들이 잊고 있었음을.

콰아아아아아아아!

이질적이기 짝이 없는 검은 소용돌이는 두 눈으로 목도하는 이들의 심혼마저도 깊이, 또 깊이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어…… 어…….”

숨이 막혀 왔다. 짙고 짙은 기운이 그들을 짓눌렀다. 마치 심해에 잠긴 듯한 압력이었다.

흑귀보의 정예들도, 심지어 흑귀보의 보주이자 사파제일검으로 불리는 만금대부조차도 그 가공할 광경 앞에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게…… 마공(魔功)?’

먼저 위기감을 느낀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건 무언가 다르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은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무학의 궤(軌)를 모조리 부정하는 듯했다.

정, 사 그리고 새외. 그 어떤 무학과도 그 본질을 달리한다.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할까? 저 무학을. 아니, 무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온당치 않은 저 괴이한 무언가를?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소용돌이치는 마기가 대기를 찢는 소음은 흡사 누군가의 처절한 비명 같았다.

뭉클뭉클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세차게 휘돌아 폭풍처럼 주교의 사방을 감쌌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나무를 뿌리째 뽑아 날리고, 땅거죽을 뒤집어엎었다.

기운에 저항하기 이전에 그 바람에 멀리 휘날려 가지 않기 위해 몸을 웅크려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두 눈을 의심할 만큼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어찌할 바 몰라 하던 그들 중, 선두에 있던 두 사람이 점차 앞으로 빨려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전방에서 느껴지는 인력(引力)에 무인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기운은 분명 그들을 밀어 내고 있다.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게도 몸은 앞으로 또 앞으로 당겨지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응하지 못하고 일순간 머뭇거린 이들의 운명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어, 어어?”

강제로 자꾸 앞으로 이동되던 선두의 둘은 결국 적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날린 것처럼 가공할 속도로 휙 빨려들었다.

그때까지도 무슨 일인지 파악하지 못했던 그들은 보았다. 검은 마기의 소용돌이가 맹렬히 회전하며 그들을 환영하는 것을.

그건 흡사 컴컴한 아가리 같았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운명을 직감한 이들의 입에서 처절하기 짝이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은 마기의 폭풍은 이내 게걸스레 그들의 몸을 집어삼켰다.

콰가가가가가각!

벤다. 찢는다. 가른다.

그 어떤 말도 어울리지 않는다. 굳이 조악한 언어로 표현하자면 ‘갈려 나갔다’라는 말이 그나마 적절할 듯했다.

그 어마어마한 마기를 버텨 내기에 인간의 육체는 너무 나약했다. 폭풍에 휩쓸린 육체가 순식간에 한 줌의 핏물로 화했다. 붉디붉은 피는 검은 마기의 소용돌이에 휘감겨 한없이 위로 솟구쳤다. 하늘이 모조리 붉게 물들어 버린 것만 같았다.

후드드득.

흩뿌려진 피는 땅에 흩뿌려졌다. 말 그대로 피의 비(血雨)가 내렸다.

그 모든 광경을 두 눈 뜨고 지켜본 이들은 숨조차 내쉬지 못한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피를 그저 그 온몸으로 맞았다.

‘뭐……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급히 모여 완전한 전력을 갖출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곳에 모인 이들은 흑귀보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이들이다. 천하의 어떤 문파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예 중의 정예라는 소리다.

그런 이들이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한순간에 한 줌의 핏물로 화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믿지 않은 도리가 없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핏물의 뜨거움이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현실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 막아……!”

쇄애애애애액!

그때 검은 폭풍에서 뿜어져 나온 세 개의 시커먼 날이 고함을 치려던 이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

제 몸이 베이는 감각조차 느끼지 못한 그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쩌적.

그의 몸에 긴 붉은 선이 세로로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

쩌어어억!

네 조각으로 갈라진 몸뚱이가 바닥으로 허물어진다.

털썩.

진득하고 둔탁한 소음이 여러 번 겹쳐 울렸다. 갈라져 버린 몸이 땅에 닿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전하는 섬뜩함은 지금껏 살며 들어온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었다.

“어, 어어…….”

그 순간, 또 한 사람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검은 마기의 폭풍으로 빨려들어 갔다.

“으, 으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맹렬하게 코앞까지 다가온 마기의 폭풍을 본 이는 금방이라도 목에서 피를 토할 듯 소리쳤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금방이라도 그의 몸을 집어삼킬 것 같던 마기의 폭풍이 거짓말처럼 씻은 듯 사라졌다.

당장의 목숨이야 건졌지만, 그는 기뻐할 수 없었다. 검은 장막처럼 시야를 가리던 마기가 사라진 곳에 한 남자가 오연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득!

단자강이 빨아들인 사내의 얼굴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우득. 우드득. 우드드드득!

그리고 천천히 손아귀를 조이기 시작했다. 사내의 얼굴을 뚫고 박힌 그의 손가락이 선명한 다섯 개의 구멍을 만들어 냈다.

“커……헉. 끄으…….”

단자강의 손에 잡힌 이는 제 얼굴을 붙든 손을 필사적으로 할퀴고 움켜잡았다.

“끄……륵. 끄르르륵…….”

금방이라도 머리가 터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반쯤 미쳐서 신음을 흘리면서도 끝없이 악을 쓰듯 단자강의 팔을 긁었다.

무학을 익힌 무인이, 흑귀보의 정예쯤 되는 이가 필사적으로 손톱을 세워 팔을 할퀴어 대는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더 큰 절망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이런 하찮은 것들에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단자강이 사내의 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콱 주었다.

퍼석!

끝내 머리가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머리를 잃은 몸은 썩은 짚단처럼 땅으로 추락해 털썩 허물어졌다.

아직 채 멈추지 않은 심장이 뛸 때마다 시신의 목에서 붉은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그 피가 단자강의 핏빛 장포를 더욱 붉게 물들였다.

콰득!

경련하는 이의 시신을 짓밟은 단자강이 느릿하게 흑귀보를 향해 다가왔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만금대부의 얼굴에선 핏기가 사라졌다.

언제나 침착을 잃지 않던 그의 심장도 지금 이 순간에는 별수 없이 통제를 잃고 불협화음을 냈다.

‘뭐냐? 저 괴물은?’

심혈을 들여 키워 낸 흑귀보의 정예들이다. 막대한 시간과 막대한 금력을 쏟아부어 만들어 낸 정예 중의 정예. 하지만 저 괴물은 그런 이들을 마치 손가락으로 벌레를 눌러 죽이는 것처럼 짓밟아 대고 있다.

‘어떻게 저런 자가…….’

모든 것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본 것에 삼 푼의 거짓을 더한다. 그래서 입을 통해 전해지고 또 전해진 이야기는 더해지고 더해진 거짓에 변질하고 왜곡되다, 종내에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리기 십상.

그러니 백 년 전 중원을 피로 물들였던 마교에 대한 이야기도 그 법칙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만금대부와 흑귀보의 일백 정예가 있다면, 소수의 불과한 적들 따위야 언제든 상대할 수 있다 여겼다.

설령 최악의 사태가 터지더라도 다소 피해를 감수한다면 몸을 빼내 후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직면하고 말았다.

그 전설, 이제는 고리타분할 정도로 빛이 바래 버린 과거에서 흘러나온 지독한 피비린내를. 너무도 생생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그 죽음의 냄새를.

마교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 어떤 과장조차 없었던 것이다.

저벅. 저벅.

단자강이 점차 가까이 다가오자 흑귀보의 정예들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마, 막아!”

“상대는 한 놈이다!”

“포위해서 상대해라!”

만금대부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의 이해를 따지고, 세상 모든 것을 계산하는 자. 하지만 지금 눈앞에 현신한 과거의 망령은 규정이 불가능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상대의 크기를 가늠할 격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맹렬하게 달려오는 수레를 향해 양 앞다리를 들어 올리는 사마귀처럼.

마기의 소용돌이에 비하면 지금의 주교는 평범한 무인과 그리 다를 바 없어 보이니 달려드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끌어내어서 말이다.

그걸 용기라 불러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제 한계를 과도하게 뛰어넘어 버린 용기는 어리석음과도 같다.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무인들을 향해 주교가 느릿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귀곡성과 함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기의 칼날이 달려드는 이들의 사지를 수백 조각으로 찢어발겼다.

파아아앗!

육편과 핏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괴이하게도 두렵다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았다. 두려움보다 낯설다는 감각이 더 커서였다. 주교가 만들어 낸 죽음이 그들이 알던 죽음과는 너무도 달라서.

저벅. 저벅.

죽음은 대지를 선명한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주교는 그 대지 위를 무심히 걸었다.

그리고 그 순간, 굳어 있던 만금대부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그대가…….”

지금까지 본 모든 광경이 단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그대가…… 당대의 천마인가?”

저벅.

그 말이 떨어진 순간, 결코 멈출 것 같지 않았던 단자강의 발이 처음으로 우뚝 멎었다. 시종일관 담담하던 그의 얼굴 역시 처음으로 괴이하게 뒤틀렸다.

“……뭐라고 했지?”

“그대가…… 당대의 천마인가를 물었다.”

“하…….”

단자강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하.”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그의 웃음은 점점 커져서 광소에 다다랐다.

모두가 질린 눈으로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물까지 쏟아내며 웃어 댄 단자강은 이내 마른기침까지 토하더니, 순간 일변한 얼굴로 만금대부를 노려보았다.

“감히…… 벌레만도 못한 놈이 그 광명 된 이름을 더러운 주둥아리로 지껄여 대?”

“…….”

“너는…….”

으드드득.

섬뜩하게 이를 갈아붙인 단자강이 마귀 같은 얼굴로 외쳤다.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고통을 느끼며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흉악한 기세를 폭발시키며 만금대부를 향해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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