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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22화 (1,023/1,567)

1022화. 지금 뭐라고 했어? (7)

사내는 무감정한 얼굴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참혹한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시신을 한군데 모아 쌓는다면 말 그대로 시체의 산이 이루어질 테지만…… 딱히 그리할 이유는 없다.

사내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갈기갈기 찢긴 두 구의 시신과 그들이 들고 있던 병장기가 주인을 잃고 바닥에 박혀 있다.

피를 잔뜩 머금은 대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모든 광경에도 사내의 눈엔 스쳐 가는 감흥조차 없었다.

그는 천천히 제 손을 들어 올렸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손을 빤히 응시하다 다시 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주교시여.”

그때 집법사자가 다가와 부복했다.

“이 구역에 있던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지웠습니다.”

하지만 주교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집법사자는 그의 입이 열리기를 마냥 기다리며 차가운 바닥에 부복해 있었다.

마침내 주교의 입이 열렸다.

“……이상하지 않은가?”

“무슨 말씀이시온지…….”

한때 단자강(段自强)이라 불렸던 사내, 하지만 이제는 그 이름을 잃어버린 사내가 어둑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토록이나 쉽다니.”

“…….”

“교에게 중원이란 언제고 반드시 세상에서 지워야 할 곳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너무도 나약하구나.”

주교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들이 나약한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강한 것이냐?”

“저는 답을 알지 못합니다.”

“하긴,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주교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와 시신뿐인 대지를 가로질렀다.

“이토록 쉬운 것이었다면…… 교는 어째서 그 긴 시간을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버텨 내었단 말인가?”

“그것이 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사명이지. 우리에게 주어진.”

그분께서 내린 명이니까.

주교의 두 눈은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모르겠군.’

그가 신실(信實)하지 못한 탓인가? 아니면 교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인가?

그토록 증오하던 중원의 실체를 목도하고 나니 강렬한 의문이 주교를 사로잡았다.

“교는 어째서 패배한 것인가?”

“……교는 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말을 바꾸지. 어째서 교는 중원을 마저 짓밟지 못하고 스스로 척박한 곳을 찾아 숨어들어야만 했는가? 이토록 나약한 이들을 상대로.”

“……그건…….”

집법사자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대답이 어긋나는 순간 신앙심이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였다.

그런 그를 보며 주교는 나지막이 웃었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

이유야 간단하겠지.

이 중원이라는 곳이 지난 백 년간 평화에 젖어 과거의 힘을 완전히 상실했든가……. 그게 아니라면…….

주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상상을 지워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렇듯 홀로 고개를 내젓는 것은 그의 오래된 버릇이었다.

고개를 드니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 우리의 사명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생각하지 마라. 의심하지 마라. 그분의 종복 된 이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오직 신실한 믿음뿐이다.

‘늙은이들…….’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강산이 열 번은 더 바뀔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은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언제인지 기약도 없는 그 ‘재림’을 믿으며 말이다.

그걸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그것을 정말 삶이라 해도 될까?

그 역시 처음부터 이런 마음을 품은 건 아니었다. 그에게 천마에 대한 신앙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기억이 있을 때부터 그는 천마를 모셨다. 그분을 기다리는 것을 기쁨으로 배웠고, 그분에게 목숨을 바치는 것을 환희로 익혔다.

의심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던 그에게 처음으로 의문이 찾아온 계기는 아주 작은 사건이었다.

누군가의 죽음.

그와 마찬가지로 천마의 존안을 본 적도 없는 이였다. 전란 이후에 태어나 그저 그분의 가르침을 전해 들어 배우고 살아가던 이가 병들어 죽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기다리는 자는 재림의 광명을 목도하리라.

그래.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치자.

그럼? 그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이는?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천마의 존재를 그 스스로 확인하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는 무엇이 주어지는가?

오직 그 순간만을 위해서 지옥과도 같은 수련을 참아 내고, 의미조차 존재하지 않는 삶을 버텨 온 이들에겐 대체 무엇이 남는가?

아무것도 주어지는 것이 없다면 교도들은 어째서 그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해야 하는가?

어째서?

주교의 두 눈은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의문을 표해 봐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믿고 기다리라는 말뿐.

교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는 건 지난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든 경험한 이들이다. 그 죽지도 않는 노괴들은 천마에 대한 지독한 광신에 젖어 그 어떤 의심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천마를 위해서라면 제 가죽을 스스로 벗겨 발싸개로 쓰는 것도 영광으로 여길 이들과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단자강은 기다렸다. 그 긴 세월을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의심을 떨쳐 내고 자신을 오롯이 신앙으로 채우려 애썼다.

하지만 한번 싹튼 의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의심은 마치 심마처럼 그를 잠식해 왔다.

이대로 영원히 천마가 재림하지 않는다면? 아니, 그가 죽은 다음에야 재림하신다면?

그렇다면 대체 단자강의 삶은 무엇을 위해 존재했다 말할 수 있겠는가?

제아무리 대단한 명검이라 해도 검집에서 나와 휘둘러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명검으로 태어났으되 한 번도 휘둘러지지 못한 채, 녹이 슬어 고철로 전락하는 것을 누가 원하겠는가?

“주교시여…….”

부복한 집법사자의 목소리에 미묘한 불안이 스쳤다.

“아직은 되돌릴 수 있습니다. 주교시여. 지금이라도…….”

“그만.”

단자강은 이번에도 완강히 고개를 내저었다.

“주교시여.”

집법사자는 입술을 짓깨물었다.

“제 목숨 따위는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주교께서 하시려는 것 역시 그분에 대한 신앙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데?”

“하지만 그분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분들은 의심을 용납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신다면…….”

“왜? 내가 그 늙은이들의 손에 잡혀 갈기갈기 찢겨 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더냐?”

“……주교시여.”

“쓸데없는 걱정이다.”

단자강의 시선이 아득히 먼 곳을 향했다.

“중원에 발을 들이지 않고 재림을 기다린다.”

“예. 그것이 저희의 사명입니다.”

“천마의 명을 거역하는 이는 오직 죽음으로 다스린다.”

“그것 역시…….”

집법사자가 입을 다물었다. 단자강의 의도를 이해한 것이다.

그 두 가지 사항은 교도라면 누구라도 지켜야 할 절대적 명제다. 하지만…….

“나를 잡기 위해 중원에 발을 들이는 순간, 늙은이들 역시 사명을 어기는 게 되겠지. 그들은 절대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해.”

단자강은 쓰게 웃었다.

‘모순투성이다.’

천마의 가르침은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 역시 주교가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들이 믿어 왔던 천마의 가르침은 그저 그분이 내뱉었던 짧디짧은 어구들을 얼기설기 이어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 없다.”

단자강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분께서 정녕 우리를 보듬어 살피고 이끄신다면, 우리의 간절함에 반드시 화답하실 것이다. 나는 그저 교도들을 대표해 그분께 울림을 전하는 종이 되려는 것뿐이다.”

“…….”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슬쩍 집법사자를 내려다보았다.

“말하라.”

“……감히…….”

“말하라.”

독촉을 이기지 못한 집법사자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입을 뗐다.

“하오면 감히 여쭙건대…… 만약……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그분께서 저희의 외침을 듣지 않으신다면…… 바로 재림하지 않으신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단자강이 무심한 눈으로 답했다.

“그럴 리 없다.”

“주교시여.”

“그분은 반드시 화답하신다.”

그는 집법사자에게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무심을 가장한 그의 눈 깊은 곳에선 작은 무언가가 일렁였다.

‘대답하지 않으시면?’

그 질문은 이미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혼자 아무리 묻고 또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때 가서 알게 되겠지.’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음울함을 짓누르던 단자강의 눈이 순간 살짝 가느스름해졌다.

“손님이 오셨군.”

그 말을 들은 집법사자가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날 같은 시선으로 앞을 주시했다.

“저들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단자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쩌면 저들은 그가 실감하지 못했던 중원의 진정한 힘을 경험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내버려 둬라. 우선은 들어 보지.”

단자강이 느릿하게 앞으로 나섰다. 상대도 단자강을 알아봤는지, 그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이윽고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예기를 내뿜는 무사들이 단자강의 맞은편에 도열했다. 그 수가 일백이 넘었다.

“흠.”

단자강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그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청삼을 입은 냉막한 표정의 중년인, 만금대부가 마침내 단자강을 마주한 것이다.

“책임자인가?”

단자강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금대부는 이미 들었다는 듯 더 기다리지 않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이들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와 만금대부의 앞에 내려놓았다.

턱!

사람 몸통만 한 상자 십여 개가 동시에 앞으로 엎어졌다. 뚜껑이 열리며 온갖 진귀한 보석과 금괴가 우르르 쏟아졌다. 그 모습은 흡사 곡식 자루가 터진 듯 보였다.

단자강은 눈이 돌아갈 만큼 많은 보물을 무심하게 일별했다.

“이건 뭐지?”

“선물.”

“……선물?”

만금대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의 마교를 맞이하는 자리인데, 선물도 없이 찾아올 수는 없지. 이건 흑귀보의 성의라고 생각하시오.”

단자강의 입술이 작은 미소를 그렸다.

“원하는 건?”

“대화. 그리고 협의.”

“대화라…….”

단자강이 더 말을 이어 가지 않자, 만금대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소.”

“어째서?”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협조할 수도 있을 테지.”

만금대부의 눈은 그 뜻을 짐작하기 힘들 만큼 어두웠다. 단자강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원하는 것이라…….”

저벅. 저벅.

그는 태연하게 앞으로 걸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패물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풍요롭군.”

으득. 으드득.

그의 손에 잡힌 패물들은 삽시간에 일그러지고 부서졌다. 금이 찢겨 녹아내리고, 보석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너무도 풍요로운 땅이야. 이런 먹지도 못하는 쓸모없는 것들이 가치를 가질 만큼.”

“원한다면…….”

하지만 만금대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대가는 산처럼 쌓인 곡식이 될 수도 있소. 그게 아니라면 그대들이 살아갈 땅이 될 수도 있겠지.”

“…….”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다고는 보장하지 못하오. 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은 내어 줄 수 있지.”

“흠.”

“말하시오. 그대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요. 우리가 내어 줄 것에 비한다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너무도 작을 테니까.”

단자강이 거무스름한 입술을 말아 올렸다.

“곡식도, 땅도, 재물도…… 우리에겐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만금대부는 흔들리지 않았다.

저들이 뭔가를 원한다는 건 분명하니까. 그러니 흔들릴 이유가 하등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쪽이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기는 한 것 같군.”

단자강이 만금대부를 똑바로 응시했다.

“말해 보라, 불신자여.”

“…….”

“너의 명성이 이 중원을 떨게 할 만큼 드높은가?”

만금대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성이 그리 낮지는 않소.”

“그래. 그렇군. 그럼 그걸로 됐어.”

단자강이 하얗게 웃었다.

“네 죽음은 반드시 천하에 알려지겠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걸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내내 침착하던 만금대부의 눈가가 순간 꿈틀했다.

“원하는 것을…….”

“이제 그 더러운 입을 닥쳐라, 더러운 불신자여.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귀가 썩어 버릴 것 같으니.”

단자강의 두 눈에서 혈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너의 단말마뿐이다. 소리쳐라. 그 목이 터지도록 소리쳐라. 하찮은 너의 비명이 세상에 울리도록.”

“미친…….”

만금대부의 안색이 일변했다.

단자강이 뿜어내는 광기가 순간적으로 숨통을 틀어쥐는 듯했다.

“대부!”

“협상은 결렬이다. 적의 머리부터 친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어쨌거나 적의 수뇌를 바로 앞에서 마주했다는 것. 저자만 제거할 수 있다면 남은 교도들 따위야 지리멸렬할 터!

“죽여라!”

만금대부의 명이 떨어지자 흑귀보의 정예들이 칼날 같은 살기를 내뿜으며 주교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단자강을 중심으로 가공할 마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검은 마기는 마치 거대한 용권풍처럼 하늘로 끝없이 솟구쳤다.

그 대경할 광경 앞에, 달려들던 흑귀보의 정예들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추고 말았다.

“어…… 으…….”

이게 정말 인간이 만들어 낸 광경인가?

불길할 만큼 어둡고 검은 소용돌이 안에서 혈광이 쏟아졌다.

“오직 죽음만이 너희를 가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단자강의 마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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