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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21화 (1,022/1,567)

1021화. 지금 뭐라고 했어? (6)

천하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은 누구인가?

누군가는 바로 황제를 떠올릴 것이다. 천하에 황제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황제의 부란 그 황궁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 부를 사용할 자유가 없단 측면에서 진정한 의미의 ‘부자’라 부를 수 없다 생각하는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저 중원전장의 장주인 황금왕(黃金王) 석대립(石大立), 석노야(石老爺)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중원 최대 전장인 중원전장에는 오늘 하루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액수의 현금과 전표가 오가고 있다. 그 중원전장의 주인이자, 저 중원십대상단의 둘이나 소유하고 있는 석대립이야말로 진정한 중원 최고의 거부라고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말에도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세상에는 드러난 돈보다 드러나지 않은 돈이 더 많다. 진짜 돈을 움직이는 이들은 밝은 세상이 아닌 저 어둠 안에 있다고.

권한 없이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삼대가 멸족당한다는 밀염은 물론이고, 도박과 인신매매 등 온갖 검은돈이 오가는 일은 모조리 손대고 있는 저 흑귀보의 보주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많은 돈을 만지는 이라고 말이다.

설령 그 말에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흑귀보의 보주, 만금대부가 천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거부(巨富)라는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그 만금대부가 기거하는 흑귀보의 보주실은 생각보다 무척 단출했다. 아니, 단출하다기보다는 삭막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지경이었다.

오래되어 손때 탄 책상과 낡아 비틀어진 의자, 그리고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서책과 장부들이 그 방에 있는 물품의 전부였다.

그 흔한 싸구려 족자 하나, 난초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살풍경한 방 안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자못 심각한 얼굴들이었다.

끼이이익.

만금대부가 앉은 낡은 의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말 대신 의자 소리로 불편함을 표현한 만금대부의 손이 주판에서 떨어졌다.

본디 주판을 튕기는 만금대부의 손은 멈추는 법이 없다. 적어도 이 책상에 앉아 있는 한, 그는 보고를 받을 때나 서류를 작성할 때도 습관처럼 주판을 굴렸다.

심지어 저 남궁세가가 매화도로 쳐들어오고, 장일소가 직접 장강에 행차해 소림과 대립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멈추지 않았던 손이다.

그런 손이 지금 이 순간 멈춰 선 것이다.

“어디라고?”

만금대부의 입술 새로 싸늘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앞에 선 이들 중 하나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항주에서 살육을 벌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확인한 정보대로라면 아마도…… 그 마교의 무리들 같습니다.”

만금대부의 입가가 살짝 실룩였다.

“마교?”

“예.”

“확실한가?”

“……완벽하게 확인했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항주지부의 생존자가 그리 전해 왔습니다.”

“생존자가 있다?”

만금대부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이 마교라는 것을 확인할 정도라면 보자마자 달아난 것도 아닐 텐데, 마교를 상대하고도 살아남았다고?”

“살려 보내 준 모양입니다.”

“이상하군.”

만금대부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것 역시 마교의 방식은 아니야. 우리가 들어 왔던 과거의 마교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라면 말이야. 자네가 이런 사실을 놓칠 리는 없을 테지. 그런데도 그들을 마교라 판단한 이유가 있나?”

“……생존자가 그리 말했습니다.”

“그건 대답이…….”

“정확하게는 생존자가 아니라, 생존자였던 이가 그리 말했습니다. 말을 전하는 데 입 말고는 필요 없다고 얼굴 가죽을 모조리 뜯어내고, 눈을 뽑고, 양팔을 잘랐더군요. 그걸로 부족했는지 몸뚱이에 구멍을 숭숭 뚫어 놓은 채 살고 싶으면 앞으로만 달리라고 한 모양입니다.”

“…….”

천하의 만금대부조차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후위대가 그 생존자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정신이 나가 버린 뒤였습니다. 마교다. 마교가 왔다는 말만을 죽을 때까지 반복하다가 탈진해 절명했습니다.”

“……맞는 모양이군.”

만금대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파에게 잔인하다는 건 딱히 욕이 아니다. 심지어는 담대하다는 말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이건 도를 넘었다. 그 어떤 사파도 사람을 이런 식으로 죽이지는 않는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이들만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

“마교란 말이군. 그 항주에…….”

만금대부의 손가락이 주판 위에 올려졌다. 하지만 몇 번이나 움찔한 그의 손가락은 차마 움직이지 못했다.

“제대로 꼬였군.

그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때란 말이지……. 하필 이때?”

그때 위충이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대부. 주제넘은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사족은 빼고 이야기하지. 빠르게.”

“예, 대부.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나 마교를 상대하는 것은 언제나 전 중원의 일이었습니다. 괜스레 우리가 덤터기 쓸 필요 없이 마교의 발호를 알리고 지원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랬어야겠지.”

“네? 하면…….”

“시기가 하필 지금이 아니라면 말이야.”

만금대부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그랬겠지. 아니, 굳이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도 없다. 적당히 마교가 나타났다는 것만 알리면 저 강북에서 신선놀음을 하던 정파 놈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놈들과 싸우려 했을 거야.”

과거 천마를 막아 낸 것도 결국에는 정파 놈들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어째……. 아, 강남불침!”

만금대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이유지. 하지만 더 큰 것은 지금 정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소림이 장강에서 만인방과 대치하고 있다는 거지. 서로 으르렁대며 싸우던 이들이 갑자기 나타난 마교를 보고는 태도를 바꾼다?”

“…….”

“그럴 수 있다면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부처나 신선이겠지. 적어도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만금대부가 가볍게 제 얼굴을 훑었다.

‘시기가 너무 나쁘다.’

장강에 칩거한 채 대립해 모두를 균열 내려던 장일소의 전략이 뜻하지 않게 최악의 결과를 내 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누가 장일소를 탓할 수 있겠는가?

백 년이나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마교의 잔당들이 하필 이 순간, 하필 항주에서 발호할 것이라 예측한 이가 천하에 단 한 명이라도 있었겠는가?

‘만일 저 장강의 고착이 풀리지 않고, 서로 병력을 움직이지 않게 된다면? 최악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능한 일이다. 만인방도 소림도 먼저 발을 빼기 힘들 상황이니까. 누구 하나가 굽히지 않는다면 등 뒤에서 칼이 날아들기 전까지는 자리를 지켜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흑귀보만으로 저들을 상대해야 한다.

저 마교를.

만금대부의 손이 재빠르게 주판알을 튕겼다.

“마교가 과거만큼의 힘을 보존했을 리가 없다. 기껏해야 삼 할도 넘지 못하는 수준이겠지. 그렇다면 그들이 실질적으로 지닌 힘은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야 간단하다. 과거 중원을 피로 물들였던 마교, 그 힘의 태반은 오로지 ‘천마’라는 존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만금대부는 당연히 천마의 존재가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구전되는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일 테니까.

하지만 그 황당한 전승들을 모조리 걷어 내고 본 인간 ‘천마’ 역시 강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천마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지금 모습을 드러낸 마교 역시 그들이 알던 마교가 아닐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주판알을 튕겨 대는 만금대부의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대부.”

탁!

그리고 마침내 활짝 펼쳐진 만금대부의 손이 주판을 꾹 눌렀다. 결심을 굳힌 듯한 그의 얼굴에 얼음장 같은 싸늘함이 내려앉았다.

“……위충(尉充).”

“예, 대부.”

“쓸만한 놈들을 끌어모아라.”

드르르륵.

주판알들이 마찰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만금대부는 차게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그들이 생존자를 굳이 살려 보냈다고 했었지?”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건 자신들이 마교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는 거겠지.”

“확실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만금대부는 제 눈가를 가볍게 눌렀다.

“스스로를 알린다는 것은 따로 노리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힘으로 얻어 낼 작정이었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지는 않았겠지. 놈들에겐 대화할 의지가 있다.”

위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금대부의 말이 맞다. 그들은 따로 노리는 게 있고 얻어 낼 생각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게 아닌, 단순한 살육이라면 굳이 자신들이 누구인지 번거롭게 알리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

“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선은…….”

만금대부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부터 확인해야겠지. 들고 있는 패를 알지 못한 채로 도박을 걸 수는 없으니까.”

위충은 새삼 감탄한 눈으로 만금대부를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뻔한 결론일 수 있겠지만, 당장 마교가 항주에서 학살을 벌이고 있단 말을 듣고도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위충의 말에, 만금대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간다.”

“대부! 너무 위험합니다.”

만금대부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고리타분한 역사에서 기어 나온 놈들이라고는 하나, 저들이 정말 마교라면 그 격에 걸맞은 이가 상대해 줘야지.”

“하지만…….”

“겁먹을 것 없다.”

만금대부의 어둑한 눈이 위충을 응시했다.

“마교도 어차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일 뿐이다. 말 못 하는 짐승이 아니라 대화를 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협상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말을 마친 만금대부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마교가 그의 예상보다 강하든, 아니면 이제는 과거의 위명을 잃고 나약해졌든, 그들을 단독으로 상대하는 건 손해뿐인 일이다.

만에 하나 마교를 상대하다 흑귀보가 크게 피해를 입기라도 한다면?

‘저 장일소의 칼날이 우리에게로 향하겠지.’

부상을 입은 승냥이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어디선가 나타날 범이 아니라 조금 전까지 함께 사냥하던 무리다. 그리고 장일소는 피 냄새를 결코 놓치지 않는 승냥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져 있다.

“준비해.”

“예, 대부. 이행하겠습니다.”

예를 갖춘 이들이 바람처럼 밖으로 빠져나갔다. 시간을 금으로 여기는 흑귀보다운 신법이었다.

만금대부는 나가는 이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따악! 따악. 따악.

주판알이 움직이는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동시에 만금대부가 내뱉는 숨소리도 점점 더 가늘어졌다.

“삼두육비의 괴물도 아닐 테고, 그래 봐야 인간 아닌가.”

인간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정확히는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 인간이 있을지언정 이익에서 자유로운 집단은 없다.

그렇다면 언제든 협상대 위로 끌어 올릴 수 있다. 그게 흑귀보의 방식이 아니던가.

하지만 만금대부는 몰랐다.

세상에는 상식이라는 게 전혀 통하지 않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이들을 자신의 상식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실수인지 말이다.

세상은 마교를 잊었다.

하지만…… 이제 곧 다시 머리에 새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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