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8화. 지금 뭐라고 했어? (3)
상유천당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 하늘 위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그 아름다운 풍광으로도 땅 위의 천당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도시가 바로 항주다. 그러나 그 항주의 진정한 진가는 아름다운 풍광을 비추던 해가 서산 너머로 모습을 감춘 뒤에 드러난다.
불야성(不夜城).
거리마다 내걸린 오색 등이 어둠을 환히 밝히면, 세상 모든 환락이 모여 있다 불리는 화려한 항주의 밤이 시작된다.
주루를 가득 채운 이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
거리마다 자리한 노점에 몰려든 이들의 웃음소리.
거기에 어디선가 기녀가 타는 금(琴)소리와 아름다운 노랫소리까지 뒤섞여 흐르는 곳.
그곳이 바로 항주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법.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커다란 대로변 옆으로 난 작은 골목에 들어서면 대낮처럼 밝았던 세상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어둡고 으쓱한 소로만이 접어든 이를 반겼다.
불과 몇 걸음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셈이다. 항주에서 뼈가 굵은 이들, 심지어는 관병들조차도 웬만한 각오 없이는 그곳에 쉽사리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 골목에 접어들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건, 척 보아도 눈빛이 위험한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뻐끔거리며 피워 대는 모습이다.
밝은 빛은 꼭 그만큼 짙은 어둠을 만들어 낸다.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항주의 밤거리는 그 어느 도시보다 더 어두운 이면을 간직하고 있다.
그 골목을 따라 더욱더 안으로 들어가면, 외부에서는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작은 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경계를 서고 있는 이들을 지나 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욱한 연기와 함께 실내를 가득 채운 이들을 볼 수 있다.
골이 지끈거리고 얼굴이 일그러질 만큼 퀴퀴한 냄새, 거기에 미묘한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뜨거운 열기. 분노, 절망에 물든 고성과 세상 모든 환희를 담은 폭죽 같은 환호가 공존하는 곳.
이곳은 바로 항주의 도박장이다.
그 항주의 도박장 중에서도 가장 높은 판돈이 걸리는 환희원(歡喜院)의 중앙에 다섯 명의 사내가 둘러앉아 있었다.
타악!
골패 짝을 내던진 사내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겼군.”
“빌어먹을.”
“다 쓸어 가는군.”
손을 뻗은 사내가 판 위에 쌓인 은자들을 모조리 쓸어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오늘은 운이 좋은 모양이야.”
“……마음껏 즐겨 두시라고, 나갈 때는 빈손으로 나가야 할 테니까.”
“그 목이라도 챙겨 나가면 다행이지. 안 그래?”
위협적인 말들이 쏟아졌지만 사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도박장 내에서는 누구도 폭력을 쓸 수 없다. 그게 이 환희원을 운영하는 흑귀보의 원칙이었다.
악명 높은 사파의 마두도, 신분을 숨기고 방문한 고관대작도, 심심풀이를 위해서 장포로 온몸을 두른 상가의 거두도 이 원칙만은 어기지 않는다.
원칙을 어기는 이가 있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 그 껍데기를 벗겨 죽이는 것이 흑귀보이기 때문이다.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우르르 쌓인 은자들을 바라보며 사내의 입가가 절로 실룩거렸다.
도박판을 어슬렁대는 이들은 누구보다 도박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 도박판에 영원한 승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높이 쌓여 있는 이 은자들은 단 한 판 만에 모조리 그의 손아귀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한 번의 승리가 주는 쾌감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전낭 차기가 무섭게 이곳에서 가진 모든 것을 걸고 판을 벌이는 것이다.
하지만…….
“끌끌끌끌.”
사내의 입에서 다시 한번 비릿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도박판에서도 절대적인 승리가 보장되는 때가 있다. 바로 이렇게 도박이 뭔지도 모르는 돈만 많은 애송이가 판에 끼어든 상황이다.
사내는 슬쩍 눈만 들어 건너편에 앉은 이를 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불길해 보이는 시뻘건 장포. 제대로 빗어 본 적도 없어 보이는 장발을 봉두난발로 풀어헤친 꼴에, 얼굴을 반쯤 덮은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입술은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쩍쩍 갈라져 있다.
묘하게 섬뜩한 인상이지만, 사내는 앞에 앉은 이에게서 그 어떤 위협도 느끼지 못했다.
‘멍청한 애송이 놈.’
보나마나 어디서 떠돌던 낭인 나부랭이가 모은 돈을 가지고 도박하러 온 것이 분명했다. 침착한 모양새를 보아하니 떠돌이 낭인치고는 실력이 좀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 봤자다.
실력 있는 낭인이든, 천하에 이름 높은 고수든, 감히 흑귀보가 관리하는 이 환희원에선 난장을 피우지 못하니까. 그랬다가는 제대로 목청을 돋우기도 전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항주 뒷골목 어딘가에서 썩어 가는 신세가 될 것이다.
아니, 설사 흑귀보의 가호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내는 굳이 남의 도움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왜냐하면 그가 바로 흑귀보 항주지부 제삼대주. 흑심염라(黑心閻邏) 채규(蔡揆)이기 때문이다.
“자자, 잃은 돈을 되찾고 싶으면 얼른 다음 판 시작하자고.”
“쯧.”
사내들이 제 앞에 놓아 뒀던 은자를 다섯 개씩 원탁 중앙으로 던졌다. 승을 딴 채규가 골패를 모아 섞기 시작했다.
“어이. 삼대주.”
그의 옆쪽에 앉아 있던 이가 시큰둥하게 물어왔다.
“윗놈들은 뭘 어쩔 작정이래?”
“뭐가?”
“장강 말이야, 장강.”
사내는 대답 대신 떨떠름한 얼굴로 장죽(長竹: 담뱃대)을 물었다. 그의 입에서 새하얀 연기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련주……. 아니, 장일소 그놈이 저러고 있는데, 계속 구경이나 할 셈이래?”
“그걸 왜 나한테 물으시나. 일개 대주가 뭘 안다고.”
“그래도 나보다는 더 알 것 아닌가.”
“개소리 집어치워. 어디 신성한 골패 판에 바깥 이야기를 끌고 들어오고 지랄이야.”
“쯧.”
사내는 영 못마땅한 얼굴로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댔다. 그가 뻑뻑 피워 대는 장죽에서 흘러나온 연기만 희뿌옇게 흩어졌다.
“자, 패 받으시고.”
촤라락.
패를 나눈 채규가 중앙에 있는 골패 짝 중 하나를 뒤집었다.
“역(逆)이군.”
원탁에 앉은 이들이 패를 교환했다. 적당한 눈치 싸움이 오가고, 미묘한 긴장이 돌았다. 채규가 제 앞에 놓인 은자 한 움큼을 집어 중앙에 집어 던졌다.
“열 냥.”
“씨발……. 세게도 나오네. 나는 죽었어.”
“따라간다.”
그러자 채규의 시선이 건너편에 앉은 낭인에게로 향했다. 제 패를 두고 살짝 고민하는 듯하던 낭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에 놓인 은자를 모조리 앞으로 밀었다.
드르르륵.
중앙에 쌓인 은자를 바라보는 채규의 두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이곳에 모인 판돈만 해도 그의 일 년치 녹봉(祿俸: 월급)은 될 것이다.
“자, 패 까 봐.”
“나는 삼.”
그의 좌측에 앉은 사내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패를 열었다. 건너편의 낭인도 느릿하게 제 패를 뒤집었다.
“사(四).”
낭인의 손이 중앙의 은자 더미로 향하자 채규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
“거 성급하시네.”
채규가 남은 한 손으로 제 패를 툭 건드렸다. 좌라락 넘어간 패는 오(五). 채규의 승리였다.
“하하핫. 이거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 형씨.”
채규가 앞에 놓인 은자들을 모조리 제 앞으로 쓸어 담았다.
“거 처음에는 꽤 땄던 것 같은데.”
“도박이 다 그렇지.”
“이러다가도 한 방에 넘어가는 게 도박이지.”
좌우에 앉은 이들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시 재빠르게 골패 짝을 정리한 채규가 다시 중앙에 다섯 냥을 던졌다.
촤락. 촤락.
좌우에서 은자들이 날아들었지만, 건너편에 앉은 낭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형씨 돈 다 떨어졌어?”
“그럼 일어나셔야지. 자리 비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낭인의 턱 끝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채규의 눈에는 저 가려진 머리카락 아래로 일그러진 낭인의 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잠시 침묵하던 낭인은 천천히 제 품 안에 손을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본 채규의 두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이 새끼가?’
아무래도 놈이 난장을 피울 모양이라 생각하고 그도 기운을 끌어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턱!
별안간 낭인이 품 안에서 꺼낸 종이 뭉치가 원탁 중앙에 턱 떨어졌다.
“……이게 뭐야?”
“전표 같은데?”
“전표? 전표가 뭐 이리 누레. 몇십 년은 된 것 같은데…….”
“저게 다 얼마야. 대체?”
채규가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자 낭인의 거무튀튀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판돈으로 쓸 수 있나?”
“……기다려 봐.”
채규가 잠깐 양해를 구하고 목청을 높였다.
“야, 쥐새끼(鼠崽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판을 관리하던 쥐 상의 사내가 채규를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인?”
“저거 봐 봐. 저 전표 환전되나?”
“전표요? 전표라…….”
쥐 상의 사내가 원탁에 놓인 전표를 잽싸게 확인하고는 가느다란 눈을 슬쩍 치떴다.
“대륙금장의 전표로군요. 그런데 발행이…… 백 년이 넘었는데 이거.”
“돼, 안 돼?”
“물론 됩니다. 다만 제값을 쳐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희도 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라…… 오 할 쳐드리지요.”
채규가 낭인에게 턱짓했다.
“그렇다는데?”
낭인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규는 도무지 감정을 알 수 없는 그의 반응이 묘하게 껄끄러웠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럼 은자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이거 양이 좀 많을 것 같은데.”
“아니.”
그때 처음으로 낭인의 입에서 부정적인 언사가 흘러나왔다.
“예? 무슨 문제라도…….”
“은원보(銀元寶)로 하지.”
“으, 은원보 말씀이십니까?”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채규를 바라보았다.
“판돈을 올리지.”
“……은원보 하나로?”
“그래.”
은원보 하나는 은자 오십 냥의 가치다. 이놈은 지금 순식간에 판돈을 오십 배로 올려 버린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제아무리 채규라 해도 끼어들 만한 판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채규의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묻어났다.
‘이 낭인 놈이 아무래도 어딜 턴 모양인데. 호구 새끼처럼 여길 기어들어 왔군.’
이곳은 항주에서도 내로라하는 꾼들만 모이는 곳. 골패가 뭔지도 모르는 애송이 하나 털어먹는 건 일도 아니다. 운으로 하는 도박이라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운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판이었다.
“거, 성격 한번 화통하시군. 좋아! 내가 딴 것도 모두 은원보로 바꾸지.”
“……판이 너무 커지는데. 난 돈이 모자라.”
“내가 빌려줄 테니까 도망갈 생각 하지 말라고.”
“제기랄. 속곳까지 털리다 못해 목숨까지 저당 잡힐 판이군.”
좌우에 앉은 그의 동료들도 짐짓 엄살을 부려 가며 은근슬쩍 보조를 맞추었다. 저 많은 돈을 딸 기회가 생겼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탐욕에 물든 이들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판돈이 은원보로 바뀌자 눈빛이 금세 흉흉해진 이들이 골패를 섞기 시작했다.
음울하기 짝이 없는 이 도박판에서, 붉은 장포를 두른 낭인만이 처음과 변화 없이 무심한 눈으로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다.
절망과 기쁨, 공포와 환희.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휘몰아치는 인세의 끝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