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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17화 (1,018/1,567)

1017화. 지금 뭐라고 했어? (2)

조르르륵.

티 없이 맑은 술이 명주실처럼 길게 늘어지며 잔으로 떨어졌다.

찰랑이는 술을 가만 바라보던 장일소가 묘하게 미소 지었다.

“……지원을 올 수 없다?”

“그렇습니다.”

“흐음.”

장일소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하지만 호가명은 그의 미소에 불편한 내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사유는…….”

“됐다.”

장일소는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보나마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나 지껄였겠지.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흥.”

가볍게 코웃음을 친 그는 천천히 술을 머금었다. 독하고 향긋한 술이 입 안에 향을 남기고 몸속에 느리게 퍼져 나갔다. 이 느낌을 느리게 감상하던 장일소는 문득 고개를 돌려 장강을 보았다.

“그래.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으냐?”

“적극적으로 대립하겠단 의지를 내보이는 쪽은 하오문주 같습니다.”

“……흐음.”

장일소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금대부는 입을 다물고 있겠지.”

“딱히 협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굳이 상황을 정의하자면, ‘관망’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겠지요.”

“관망이라…….”

장일소가 나지막이 웃었다.

글쎄. 그걸 관망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나서지 않고 지켜본다는 점에선 지금 만금대부의 입장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본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지금쯤 만금대부는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이득인지를 정신없이 계산하고 있을 테니까.

“주판을 튕기느라 바쁘시겠지.”

어둠이 내린 장강은 짙고 검게 그저 흐르고 또 흘렀다. 장일소는 가만히 생각에 잠긴 채 그 양을 보다 물었다.

“수로채는?”

“대부분 정리가 끝났습니다. 딱히 저항하는 이가 없어서 수월했습니다.”

흑룡왕이 들으면 격노해서 피를 토할 말이었지만, 호가명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심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나, 흑룡왕을 대신해 나서서 불만 세력들을 규합하고 저항할 만한 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장일소는 장강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조소했다.

“흑룡왕 같은 이가 이인자를 용납했을 리가 없으니까.”

사파는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그 출신이 어떻든, 신분이 어떻든 상관없다.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쟁취하는 세상. 그게 사파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구조는 모든 것을 거머쥔 이에게도 마찬가지로 가혹했다. 모든 것을 빼앗아 본 이는 자신 역시 언젠가는 전부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사파의 수괴들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자를 애초에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완벽한 지배니까.

“머저리 같은 짓이지.”

장일소의 시선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남궁세가는 이 장강에서 너무 큰 것들을 잃었다. 남궁황이라는 걸출한 가주와 세가의 기둥이나 다름없던 장로들, 그리고 주력마저 썰려 나갔다.

하지만 남궁세가는 무너지지 않는다. 지금은 애송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남궁도위를 중심으로 어떻게든 문파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반면 수로채는 전력을 거의 보존한 상황이건만, 흑룡왕이라는 수괴가 힘을 잃은 것만으로 갈팡질팡 지리멸렬하고 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장일소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희극이로군.”

이게 아마 정파와 사파의 가장 큰 차이겠지.

때때로 사파에는 천하를 위협하는 괴물들이 등장한다. 그런 이들이 이끄는 사파는 정파를 짓밟고 천하를 피로 물들인다.

하지만 그뿐.

이끄는 이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공백 역시 커진다. 절대적인 지배자의 영향력이 사라지는 순간, 사파는 다시금 저들끼리 이전투구를 벌인다.

그렇기에 천년의 역사를 가진 소림은 존재해도 백 년의 역사를 가진 사파는 찾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희극이지만 말이야.”

장일소가 낮게 웃었다.

흑룡왕이라는 머리를 잃은 수로채는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제 남은 것은 하오문과 흑귀보뿐.

물론 마라혈궁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라혈궁은 그의 입장에서는 계륵과도 같다. 새외에 있는 그들을 지배하려 든다면 얻는 이득보다 들여야 할 비용이 더 크니까.

“흑귀보는 몰라도 하오문은 빠르게 장악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장강 너머의 정파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하오문의 정보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장일소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 필요성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 왔다.

단순히 장강 이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비대해진 사패련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라도 하오문의 정보력은 필수적이다.

슬쩍 장일소의 눈치를 살핀 호가명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그 천면수사가 이리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시류를 읽을 줄 아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알기에 그러는 거란다.”

“……예?”

장일소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알기에 그러는 거야. 놈은 나라는 사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

“…….”

“한번 머리를 조아린다면 다시는 그 머리를 쳐들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반항을 시도해 보는 거겠지.”

“그런 부분은 이해합니다만…… 상황이 상황이잖습니까. 그쯤 되는 이가 지금은 련주님의 휘하로 단결해서 저 정파의 위선자 놈들과 일전을 벌여야 할 때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알지만 의미가 없는 거겠지.”

장일소가 비릿하게 웃었다.

“누군가는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는 데 목숨을 바치지만, 누군가는 죽은 이의 시체를 뒤져서 제 재산을 불리곤 하지. 사파의 승리라는 건 적어도 천면수사에게는 별 의미가 없을 거란다.”

호가명이 살짝 이를 갈았다.

물론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사파의 생리란 본디 그러한 법이니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사파의 본성 아니던가?

하지만 세상 모든 일에는 시기라는 게 있다. 지금은 그들끼리 이전투구를 벌일 때가 아닐진대…….

“어찌하시겠습니까?”

“흐음.”

새하얀 손이 맞물려 무릎 위에 걸쳐졌다. 기다란 손가락을 장식한 반지들이 서로 까라락대며 마찰했다.

“한동안은 그냥 내버려 두자꾸나, 가명아.”

장일소가 살짝 비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직접 가서 제 주제를 깨닫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장일소의 두 눈에 일순 짙은 살심이 일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눈빛으로 장강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몸에서 힘을 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될 일이지. 저 중놈들이 나를 너무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으냐?”

쿡쿡대는 그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장강에 퍼져 나갔다.

잠깐 그런 그를 지켜보던 호가명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련주님.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응?”

그는 자세를 낮추고 물었다.

“련주님께서 생각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련주님이 이곳에 존재하시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분열할 것이고, 서로 이전투구를 해 댈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일소는 그저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에도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련주님. 저들이 아무리 분열한다 해도, 사패련이 올바로 서지 못한다면 저희는 그 틈을 노릴 수가 없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 하였거늘 어째서 련주님께서 저들을 내버려 두시는지 쉬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쯧쯧.”

장일소가 혀를 차더니 술병을 들어 제 잔을 채웠다.

“가명아, 가명아.”

“예, 련주님.”

“너는 저 중놈을 너무 쉽게 보는구나.”

“……예?”

장일소의 입술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저 작자가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리 녹록한 이는 아니란다. 그랬다면 이미 저 화산검협에게 잡아먹혔겠지. 그래도 소림의 방장이라는 이름을 달 정도는 되는 작자야.”

“…….”

“지금 우리가 물러나 뒤를 정리하기 시작한다면, 저자 역시 뒤로 물러나 우리를 대비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은 저 작자의 발을 묶어 놓는 것이 최우선이란다.”

“하지만 법정은 굳이 이곳을 떠나지 않더라도 지금 상황을 이용해 구파일방을 규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가능하지.”

“그럼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일소가 묘하게 웃으며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우리가 저들이 뭉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예?”

“가명아. 너는 가진 자들의 독기를 너무 쉽게 보더구나. 지금 저들이 서로 뭉쳐 들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만만하기 때문이란다. 정말 우리가 위협이 된다면 저들은 묵은 원한을 모두 내려놓고 일치단결할 것이다. 저놈들은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호가명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러했다. 구파일방이라는 놈들은 세상이 평화로울 때는 저들끼리 권력싸움을 해 댔지만, 막상 환란이 닥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로 뭉쳐 적에게 대항했다.

상대가 사패련이라 해서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이대로 저들을 궁지에 몰아넣어 봐야 우리가 얻을 게 없단다. 우리가 진짜로 얻어야 하는 것은 따로 있지.”

“……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장일소가 입가를 뒤틀었다.

“공포.”

“……예?”

“공포. 그래, 공포지. 하지만 그게…….”

장일소의 입에 요악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에 대한 공포는 아니다. 그보단 좀 더 사소하고 하찮은 공포지.”

호가명은 장일소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차마 다시 물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딱히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아님에도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사위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포감에 질린 인간이 가장 먼저 하는 게 뭔지 아느냐?”

“…….”

“제 살길을 찾지.”

장일소의 얼굴에 귀기가 어렸다.

“협의니, 정의니 하는 허울을 집어던지고 제 살길을 찾는 것. 그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더냐.”

“……련주님.”

“어디 보자꾸나. 저 대단한 불자들께서 과연 얼마나 제 본성을 이겨 내실 수 있을지 말이다.”

장일소는 술로 젖은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거의 다 됐다. 거의 다.’

그의 눈에는 보인다.

겉으로 보이는 뻔한 세력간의 균열이 아니다. 법정이라는 이의 가슴에 박힌 쐐기가 만들어 내는 아주 작은 균열이 보였다.

조금씩 세심하게 벌려 놓은 균열이 마침내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때가 무르익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바로 그때였다.

“려, 련주님!”

누군가 그의 발치로 달려와 부복했다.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흐응?”

장일소가 심드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설마 하오문이 쳐들어온 것은 아닐 테고.”

“그, 그것이…….”

업드린 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들더니 재빠르게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지금 뭐라 했느냐?”

보고를 모두 들은 호가명의 입에서 평소와는 다른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틀림없는 사실이냐?”

“그, 그렇습니다!”

호가명은 얼빠진 얼굴로 잠깐 말이 없었다. 그의 낯이 순식간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어, 어째서…… 이런 순간에…….”

만인방의 군사로서 능력을 수도 없이 증명한 그조차도 이 순간만은 그저 당황하여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급히 장일소의 표정을 확인했다.

까라라라라락!

장일소의 양손에 빽빽이 끼워진 반지가 불편한 금속음을 토했다. 위협적인 손짓과는 달리 장일소의 입가에는 진득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이래서…….”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생이라는 건 이래서 참 재미있지. 상상도 못 한 변수가 발생하기도 하니까 말이야.”

두 눈에 광기가 일렁였다. 장일소의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진득한 노기와 저열한 쾌감이 잔뜩 실린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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