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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16화 (1,017/1,567)

1016화. 지금 뭐라고 했어? (1)

법정의 승포 자락이 불어오는 강바람에 휘날렸다.

그의 시선은 장강에 뜬 배들에게 닿아 있었다. 선단의 모습은 일견 유유자적하게까지 보였다.

하지만 법정에게는 그것들이 마치 이리의 이빨처럼 보였다. 금세라도 달려들어 그의 목을 물어뜯을지 모르는 날카로운 이빨.

“으음.”

법정의 눈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매화도 사태가 종결된 지도 열흘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사패련은 강에 띄운 배를 조금도 물리지 않았다.

수적이란 본디 강을 오가는 이들을 상대로 노략질을 해 먹고사는 단체다. 노략질에 나서야 할 배들을 이곳에 묶어 둔다는 것은 수로채에게 커다란 손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패련은 그 손실을 감수하고도 저 배들을 물리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법정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적이 칼을 집어넣기 전에 경계를 푸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까.

“……장일소.”

법정의 입에서 그 증오스러운 이름이 흘러나왔다. 강 건너로 뻔히 보이는 만인방의 진영에 그가 있을 것이다.

저벅. 저벅.

어둑한 눈으로 강을 응시하던 그의 뒤로 법계가 천천히 다가왔다.

“방장. 구파에서 보내온 회신들이 도착했습니다.”

법계가 넌지시 말을 건넸지만, 법정은 그 말을 듣고도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방장.”

법계가 두어 번 더 부르고 나서야 법정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뭐라 하더냐?”

“전체적으로는…… 우선 장강으로 지원을 보내겠다는 입장이 많았습니다.”

법정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구체적인 시기와 얼마나 지원할 것인가는 명시하지 않은 채로 말이더냐?”

“……예, 방장.”

답하는 법계의 얼굴에 노기가 서서히 차올랐다.

구체적인 사안이 없는 약속은 그저 언제든 내용을 바꿀 수 있는 허언에 불과하다. 이들은 상황이 여기까지 왔음에도 여전히 간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법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천우맹에 대한 부분은 어떻더냐?”

“대체로 천우맹의 행동에 대한 깊은 의심을 함께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내오긴 했습니다.”

“깊은 의심이라…….”

법정이 나직이 웃었다.

의심. 그것참 좋은 말이다.

천우맹이 사파의 모종의 밀약을 맺었다면 미리부터 의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테고,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의심에서 끝나 다행이라고 둘러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미적지근하다. 그래, 이들은 모든 사안에서 미적지근했다.

“방장.”

“예상대로구나.”

법정이 가볍게 고개를 내젓자, 법계의 입에서 한숨을 푹푹 새어 나왔다.

“어찌 그리 평온하십니까?”

“음?”

법계의 목소리에서 원망이 묻어났다.

“물론 저희가 모든 걸 잘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실수도 있었고, 오해를 살 만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

“하지만 최소한 저희는 이곳 장강에서 저 사패련과 대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저희에게 저들이 보내는 이 무심함을 어찌 생각해야 한단 말입니까?”

법정은 법계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원망스럽더냐?”

“……저는…….”

“원망할 것 없다. 사람이란 애초에 그런 것이다. 내 손톱에 박힌 가시는 너무도 아프지만, 이역만리에서 누군가 죽어 나가는 것에는 감흥조차 느끼지 못하지.”

법계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방법이야 옳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어쨌거나 선의로 이곳까지 왔다. 법계에게는 그 선의에 대한 저들의 보답이 너무도 가혹하게 느껴졌다.

“그럼 이것을 그저 참아 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법정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답변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찌하면 좋겠느냐?”

“…….”

법계는 순간 말문이 막힌 얼굴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매화도 일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때의 법정은 여유를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불과 며칠이 지난 지금, 그는 과거의 많은 날 지녔던 여유를 어느 정도 되찾았다.

“문제로구나. 문제야.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을 어찌해야 할꼬.”

법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강 건너를 넘겨보았다.

“우선은 다시 서찰을 보내 이곳의 상황을 지속적으로 전하고,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하거라. 될 수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지원해 줄 것인지를 명시해 달라는 요구도 함께 보내면 좋겠지.”

세세한 지시였다. 하지만 법계는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저 한숨만 쉬었다.

“……방장. 그리 말한다 한들 저들이 내어놓겠습니까?”

“내어놓지 않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예?”

법정이 뜬금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사람은 급할 게 없단다. 어쩌면 재미난 심정으로 타오르는 것들을 지켜볼 수도 있겠지.”

“…….”

“지금 저들에게 우리는 강 건너에서 불길을 잡기 위해서 날뛰고 있는 이들일 뿐이란다. 저들이 급할 이유야 없겠지.”

법정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법계를 응시했다.

“너는 그런 이들의 마음을 덩달아 급하게 만드는 법이 무엇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방장.”

“불길이 강을 넘어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법정은 낮게 불호를 외었다.

“강 너머의 불은 나를 위협하지 못하기에 재미난 것이다. 하지만 내 발등에서 타오르는 불은 더 이상 재미난 것이 되지 못하지. 그 불길이 내 집을 태우고, 전답을 태우고, 결국에는 내 가족과 나마저도 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법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지금 구파일방이 제대로 된 호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소림의 지배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결국 저들이 사패련의 존재를 실질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삼 년의 시간이 모든 것을 망쳤지.’

만약 장일소가 그 장강참변에서 그곳에 있었던 모든 이들을 죽여 없앴다면, 아마 지금 사패련은 존재조차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남은 정파들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사패련을 말살하려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장일소는 삼 년의 시간 동안 강남에 머문 채 조용히 힘을 길렀다. 어느 순간 저 강 너머에 사패련이 존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질 만큼의 시간 동안 말이다.

그러니 익숙해진 것이다. 저 강 너머에서 타오르는 불길의 존재에.

익숙한 것은 더는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에서 아무리 소리쳐 외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장. 사패련이 얼마나 위험한 불길인지를 말입니다.”

“그래. 나도 그리 생각했단다.”

“……예?”

태연한 법정의 목소리에 법계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대답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는데…….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법정의 말이 잘못 듣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법정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살짝 변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들이 모르는 것은 저 불길이 얼마나 거친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법계는 여전히 법정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저 사패련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누가 있겠는가?

“내 생각과는 달리, 저들은 불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린 것 같다.”

“방장?”

법정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그래. 애초에 불길이랄 게 없는 세상이었지. 전화가 무엇인지 잊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잔불은 존재할지언정 겁화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었다는 말이 더 맞겠구나.”

“…….”

“그렇기에 잊어버린 것이지. 불이 무엇인지. 왜 두려워해야 하는지 말이다.”

법정을 바라보는 법계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그때 법정이 법계를 돌아보았다.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어두웠다.

“법계.”

법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예, 방장.”

법정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 느릿하고 다정했다.

“……불을 모르는 이에게 불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느냐?”

“잘…….”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순간 법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법정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불이라는 것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그 불에 내 손이 닿았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불길에 살이 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몸소 느끼게 해 주는 것이지.”

“바, 방장.”

“물론!”

법계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법정은 단호히 끊었다.

“아플 것이다. 고통스러운 일이겠지. 하지만…… 불이 뭔지 몰라 어리석게도 스스로 불구덩이에 걸어 들어가는 건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

“…….”

법계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분명 법정의 입가에 드리운 옅은 미소도, 자애롭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법계는 그런 법정의 모습 속에서 선명한 한 줄기의 귀기를 느꼈다. 너무도 차가워 심혼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귀기를 말이다.

법정이 그런 법계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내 말이 너무 가혹하게 들리더냐?”

“바, 방장. 저는 그저…….”

“가혹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불자는 잃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법정은 법계를 향해 반장을 취했다. 양손으로 하는 합장이 아닌 한 팔만을 들어 올리는 소림 특유의 반장이었다.

“소림은 어째서 반장(半掌)을 취하더냐?”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법계는 당연히 이 질문에 대답을 알았다. 소림의 소속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이조(二祖)를 기리기 위함입니다.”

“그렇지.”

법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의 근원은 사조인 달마에게 기원하지만, 그 정신적인 기원은 이조 혜가(慧可), 그 무학적 완성은 육조(六祖) 혜능(慧能)에 닿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이어져 온 게 지금의 소림이 아니던가?

“이조께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한쪽 팔을 스스로 잘라 내셨지.”

“예, 방장.”

“거꾸로 말하자면 커다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팔 하나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단 의미다.”

“…….”

“그건 그저 불문에 속한 이들에게만 통하는 이야기는 아닐 터. 때로는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희생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법계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법정이 풍기는 부드러운 기운 속에 설명하기 힘든 압박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숨 쉬기조차 버거웠다.

반장을 취한 법정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러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뜨며 말했다.

“그저 알게 하자꾸나. 그거면 될 것이다.”

“……예, 방장.”

“답신을 보내거라.”

“예.”

법계는 깊이 반장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어쩐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가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려는 찰나 장강에 시선을 고정한 법정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산은 어찌하고 있더냐?”

걸음을 멈춘 법계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잡고, 당가와 함께 칩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딱히 움직임이랄 게 보이지 않습니다.”

“화산검협은?”

“……그 아이는 최근 남궁의 젊은 검수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궁을 가르친다?”

“예.”

법정의 시선이 살짝 위쪽으로 향했다.

“……그 아이가 끝끝내 남궁마저 품겠구나.”

“…….”

“가 보거라.”

그 말을 끝으로 법정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무심히 흐르는 장강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뒷모습을 잠시 보던 법계는 깊이 반장을 하고 물러났다.

홀로 남은 법정의 두 눈에 반짝이는 장강이 가득 담겼다.

“……불공평한 것이 세상이라더니.”

그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어렸다.

“아미타불…….”

마침내 감아 버린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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