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1015화 (1,016/1,567)

1015화. 쟤 오늘 날 잡았네. (5)

남궁단은 정말 자신 있었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라는.

물론 그는 기본적으로 이런 근성론을 신봉하는 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같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가짐 하나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은 믿으며 살아왔다.

이제 전적으로 청명의 수련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각오를 새로이 다졌으니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라고, 남궁단은 그리 생각했다.

불과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후두두둑!

남궁단이 덜덜 떨며 눈을 내려 아래를 보았다.

그의 발이 미끄러진 곳에서 떨어져 내린 돌무더기가 까마득한 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남궁단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렸다.

“흐…… 으으…….”

숨도 크게 못 쉬며 덜덜 떨던 그는 이번엔 위를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아래 삐죽이 솟은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렇다. 지금 그는 절벽을 오르는 중이었다.

“끄읍!”

갈 곳을 모르는 발을 어떻게든 절벽 면에 붙이고 바짝 달라붙었다. 절박하다 보니 거의 절벽에 파고들 기세였다.

“후욱! 후욱! 후욱!”

숨이 절로 가빠 오고 몸이 진동했다. 저 까마득한 아래를 볼 때마다 심장이 제멋대로 영영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까짓것 죽기야 하겠냐는 마음이었지만…….

‘아니, 죽어! 죽는다고! 이 미친놈들아!’

이 화산파 놈들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얼씨구, 팔에 힘 빠지지?”

저 먼 위에서 이제는 절로 소름을 일으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디 힘 빼 봐. 그래 봐야 떨어지기밖에 더 하겠어?”

그 말에, 남궁단은 또다시 저도 모르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 돼!’

얼른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절벽에 찰싹 붙였다. 저 까마득한 아래를 볼 때마다 다리에서 힘이 모조리 풀리는 듯했다.

적어도 이 팔다리에 매달려 있는 각반이라도 없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이걸 달고 이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이 미친놈들아!’

“후욱! 후욱! 후욱!”

한참을 심호흡한 그는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어깨로 훔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도, 도장.”

“예?”

조금 아래에서 태연하게 절벽을 따라 오르던 화산파 제자에게 말을 붙인 것이었다.

“저, 저기…… 이 수련은 너무 심한 것 같지 않습니까?”

“아…….”

남궁단은 나름의 희망을 품었다.

화산파 놈들이 하나같이 뭔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이제 슬슬 그도 알아채 가는 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윤종’이라 불리는 화산의 제자는 그나마 정상인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자라면 그래도 저 마귀에게 대항해서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남궁단의 기대는 이어진 윤종의 대답에 여지없이 산산조각 났다.

“심해요?”

“예. 예! 도장! 이건 너무 위험하잖습니까!”

“……위험……이요?”

윤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지금 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쌀알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저, 도장?”

“위험요? 여기가요?”

“…….”

그 순간 남궁단은 지금 둘 사이에 뭔가가 어긋나 있다고 느꼈다.

“이, 이 상황이 정말로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확실히 이상하기는 합니다.”

윤종이 절벽에서 한쪽 손을 떼더니 느릿하게 제 머리를 긁적였다.

“저놈이 이렇게 느슨한 놈이 아니었는데.”

“예?”

“기껏해야 이런 절벽 하나 오른다고 무슨 수련이 될는지……. 적어도 단장애의 반 정도는 되는 절벽을 올라야 수련이 될 텐데, 아무리 여기가 장강 근처라 높은 산이 없다고는 해도 이래서야…….”

“……예?”

이 인간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윤종이 걱정이 된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궁세가 분들이 모처럼 굳게 마음을 먹으셨으니 우리도 최선을 다해 화답해 드려야 하는데, 이리 물에 물 탄 듯한 수련만 하고 있으니 걱정이지요. 생각 같아서는 절벽 높이를 두 배쯤 올리고, 경사도 조금 더 가파르면 딱 좋겠는데.”

……제정신인가?

할 말을 잃은 남궁단은 순간 자신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윤종을 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여긴 저, 절벽 아닙니까, 도장! 떨어지면 죽는다고요!”

“……예?”

그러자 윤종은 또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라는 얼굴로 아래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굉장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 그게 걱정이셨군요.”

“예! 바로 그…….”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 죽거든요.”

“……예?”

남궁단은 뒤통수를 느닷없이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윤종을 보았다. 윤종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티 없이 해맑았다.

“여기보다 두 배 정도 높은 곳에서 대여섯 번 떨어져 봤는데 죽지는 않더라고요.”

“…….”

“그리고 떨어지는 것도 처음에나 무섭지,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게 됩니다.”

정말 사람을 돌게 만드는 건, 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악의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마음 놓으시…….”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어?”

윤종이 고개를 획 돌렸다. 그들보다 앞서서 절벽을 오르던 이들 중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쿠우웅!

“…….”

바닥에 처박힌 남궁세가의 검수는 거품을 물고 꺽꺽 넘어갔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도 윤종은 오히려 거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보십시오. 안 죽잖습니까.”

“……죽은 것 같은데요?”

“하하. 농담도 참 재밌게 잘하십니다.”

이게 농담으로 들리냐? 이게?

“대, 대체 이런 수련을 왜 하는…….”

남궁단은 질문을 하다 말고 황급히 입을 꾹 다물었다. 앞으로 수련에 대한 불만은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 다짐을 다른 이도 아닌 그가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그건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

윤종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검수에게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손목의 힘과 손가락의 힘입니다. 싸우다 검을 놓치는 검수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만도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러니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손아귀에서 힘을 빼지 않는 수련이 필요한 겁니다. 내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목숨이 날아간다는 위기감을 몸으로 체화시키는 데는 이런 절벽만 한 곳이 없지요.”

말을 하던 윤종은 아래를 힐끗 보았다. ‘이런 낮은 절벽에서 그런 위기감이 제대로 들지 모르겠지만.’ 하는 그의 중얼거림을, 남궁단은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아. 그리고 절벽을 오르면 자연히 무릎과 발목, 그리고 허리 힘까지 단련이 됩니다. 게다가…….”

윤종은 말을 하다 말고 남궁단이 디디고 있던 돌부리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돌부리가 뚜둑 하고 꺾이더니 남궁단의 몸이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으아아아아아악!”

팔다리를 좌우로 활짝 벌린 남궁단이 기겁하며 절벽을 부여잡았다. 겨우겨우 몸을 멈춰 세운 그는 식은땀으로 범벅된 얼굴로 윤종을 획 돌아보았다.

“이, 이게 무슨……!”

“보시다시피 절벽에서는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지요.”

“그게…….”

남궁단은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냐 이 미친놈아!’라는 말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윤종은 평온하게 말했다.

“돌부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갑자기 돌풍이 불어오기도 합니다. 심지어 지나가던 수리가 등을 쪼겠다고 달려드는 일도 있지요.”

“……예?”

“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우다 보면 갑자기 나무뿌리에 걸려 엎어지기도 하고, 부러진 칼이 등으로 날아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엎어진 아군의 칼이 다리를 찌르는 일도 있습니다.”

“…….”

“검수는 그 모든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하죠. 그러니 절벽을 오르는 것이 좋은 수련이 되는 겁니다.”

윤종이 턱짓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라고 저놈이 주장하더군요. 뭐 저도 나름 동의합니다. 효과는 톡톡히 봤거든요.”

“…….”

“그러니 어서 올라가시지요. 시간 끄시면 식사 시간에 늦습니다.”

남궁단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한번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올라온 높이가 앞으로 올라갈 높이와 별다르지 않다. 이리되면 이 말도 안 되는 절벽을 내려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올라가는 쪽이 더 안전하다.

“끄으으응!”

남궁단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절벽을 움켜쥐었다.

‘이 새끼들은 다 미친놈들이야!’

“흐음.”

절벽 위에 드러누운 청명이 손에 든 술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찰랑. 찰랑.

가볍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의 눈살이 슬쩍 구겨진다.

“……얼마 안 남았네.”

순간적으로 짜증이 확 밀려왔다.

“절벽 하나 오르는 데 뭔 놈의 시간을 이렇게 끌어! 이 새끼들이 다 빠져 가지고.”

“처음이잖느냐.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 있어? 물론 그럴 수 있지. 당연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응?”

청명이 슬쩍 발을 뻗어 절벽 위에 세워 둔 무언가에 발을 가져다 댔다. 사람 머리통만 한 돌이 잔뜩 쌓여 있었다. 돌무더기의 밑둥에 발을 댄 채 청명이 히죽 웃었다.

“하지만 얘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

“…….”

백천의 뒤통수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그거…… 좀 과하지 않을까?”

“응? 과해?”

“그래, 청명아. 생각해 보거라. 격한 수련도 좋지만, 사람이라는 게 본디 감당할 수 있는 수준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키워 가야 하는 법이다. 일단은 진정하고…….”

“흐음.”

백천의 말에 청명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사숙 말이 맞네.”

“그, 그렇지? 그러니까 일단 거기서 발부터 떼고. 응?”

“그래야……. 어이쿠우!”

그 순간 청명이 발을 쭉 뻗어 돌무더기를 절벽으로 굴려 버렸다.

쿠르르르르릉!

“으아아아아아악!”

“돌이 떨어진다아아아아아!”

“어떤 새끼야! 으아악! 어떤 새끼냐고오오!”

처절한 비명이 아래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백천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잠시 후 눈을 슬그머니 다시 떴을 땐 청명이 씩 웃고 있었다.

“아이코. 발이 미끄러졌네.”

‘악마.’

“낄낄낄낄낄.”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욕설 속에 사악하게 웃어 젖힌 청명이 팔짱을 끼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평화롭네.’

장강의 물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구파일방과 사패련의 형국이 무색하도록 말이다.

구파도 사패련도 지금 상황에서는 먼저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그 말인즉, 이 평화로운 일상이 한동안은 유지가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뭐 법정 중대가리나 장일소 그 재수 없는 놈은 머리가 복잡하겠지만, 청명이 굳이 그들 대신에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었다.

“흐음.”

탐색하듯 강 너머를 바라보던 청명의 시선이 다시금 하늘로 향했다.

눈을 천천히 내리감으니 불어오는 바람이 청명의 뺨을 간질였다.

‘조금은 더 이어지면 좋겠는데 말이야.’

소원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작은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청명의 바람과는 다른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천하의 누구도, 법정도, 장일소도, 심지어는 청명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격한 바람이 짙은 피 냄새를 싣고 불어오고 있었다.

세상을 다시 한번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을 폭풍의 전조가 말이다.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