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화. 쟤 오늘 날 잡았네. (4)
“묻고 싶은 것이 있단 말이냐?”
“예.”
남궁도위가 제 머리를 작게 긁적였다.
지금 불현듯 떠오른 것은 이들에게 강요해선 안 된다던 청명의 말이었다. 남궁혁이 무엇을 물을지 아는 남궁도위는 이들의 선택을 제 뜻대로 좌지우지하고 싶지 않았다.
“해 주고 싶은 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선택은 온전히 너희의 몫이다. 나는 강요할 수 없구나.”
하지만 남궁혁은 그런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소가주님. 다만.”
“응?”
“그냥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화?”
“예, 대화요.”
남궁혁이 남궁도위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사실 그동안 저는…… 소가주님께서 명하시면 그저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저희의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
“그런데 여기까지 와 보니…… 차라리 왜 소가주님께서 이런 수련을 시키셨는지 진즉에 허심탄회하게 묻고 대화했다면 상황이 좀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남궁도위가 멍하니 남궁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어색한 얼굴로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소가주님께서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될 수 있으면 함께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습니다. 안 그러면 후회할 것 같아서요.”
“…….”
“안 됩니까?”
남궁도위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손을 내저었다.
“아, 안 될 리가 있느냐?”
“되는 거죠?”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당연하지. 외려 내가 부탁하고 싶구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궁의 검수들이 남궁도위의 주변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그들 역시 남궁혁과 같은 심정인 모양이었다.
“저…… 소가주님께서는 저들이 저리 강하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수련을 따라가면 정말 저희도 저토록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당황한 남궁도위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자, 잠깐만!”
“예?”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하자꾸나. 밤은 길지 않느냐.”
다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남궁도위의 주변에 빙 둘러앉았다.
남궁도위는 새삼 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이들을 설득하고 이끌어 가려고 한 적은 있다. 하지만 남궁혁의 말대로 정말 ‘대화’라는 걸 해 본 기억은 없다.
앞에서는 이끌고 뒤는 믿고 따른다. 그게 남궁세가의 방식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남궁도위는 강인한 가주가 되려 애썼다. 이들을 남김없이 일으켜 세우고 이끌어 갈 수 있는 강인한 가주.
하지만…….
‘그렇구나.’
굳이 그 방식을 고수할 필요는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도 이들도 아직은 부족하다. 부족한 이들끼리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줘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는 결심을 굳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혁아.”
“예, 소가주님.”
“가서 단이도 불러오거라.”
“예.”
“그리고…….”
남궁도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청명과 닮은, 사특한 표정이었다.
“조용히 장원을 빠져나가서…….”
“예?”
“술을 좀 구해 오거라.”
“수, 술을요?”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화들짝 놀라 남궁도위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술.”
“가, 갑자기 웬 술입니까?”
“필요할 것 같구나.”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내가 한번 겪어 보니, 술이 있으면 말이 쉽게 나오더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다 풀어 내고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 보자꾸나.”
“…….”
“안 되느냐?”
남궁혁이 세상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한 수레를 구해 오겠습니다!”
“좋지.”
남궁혁이 몇 명을 골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남궁도위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하자꾸나. 어쩌면…… 우리는 서로 해야 할 말을 너무 많이 쌓아 둔 걸지도 모르니.”
처음부터 이랬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너무도 많은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남궁도위가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무게에 짓눌리고 있듯이, 이들 역시 스스로 주역이 되어 남궁세가를 지탱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필요한 것은 서로의 의무를 되새기는 무거운 말들보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서로를 보듬어 주는 대화가 아니었을까?
조금의 기다림 끝에, 술을 구해 온 남궁혁이 그들의 앞에 술병을 쫘르륵 깔았다. 남궁도위는 제 앞에 놓인 술병을 가볍게 집어 들었다.
“한잔하자꾸나.”
“…….”
하지만 그를 제외한 이들은 선뜻 술병을 집어 들지 못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이 얼굴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남궁도위는 그런 그들을 기다리지 않고 제 손에 든 술을 보란 듯이 꿀꺽꿀꺽 시원하게 들이켰다.
“크으!”
일전에 본 청명이 하던 것처럼 소매로 입가를 슥 문질러 닦고는 빙긋 웃으며 모두를 보았다.
“나 혼자 마실까?”
내내 눈치를 보던 이들이 그제야 하나둘 술병을 집어 들고 기울였다.
“크으.”
“아으. 쓰다.”
한 모금씩 술을 넘긴 그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가 마신 술병과 남궁도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쿡쿡.”
“하하핫.”
너나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소가주님과 술을 마셔 보는 건 처음입니다.”
“그러게요. 소가주님께서 원체 술을 즐기시지를 않으니까.”
“이상한 기분이네요.”
하나하나 조심스레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꽁꽁 싸매 두었던 이야기들, 차마 쉬이 내어 놓지 못했던 이야기들.
느슨하게 풀려나오는 그 말들 속에서 남궁도위는 작게 웃었다.
- 강요하지 마.
어쩌면 그 말은 이들이 선택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라는 의미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디 날 밝을 때까지 한번 마셔 보자꾸나.”
“예, 소가주님!”
남궁도위가 웃으며 술병을 들어 올렸다.
오늘 밤은 그에게도 꽤 길 것만 같았다.
“쯧.”
꼴꼴꼴꼴.
짧게 혀를 찬 청명이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술병을 작게 돌리며 피식 웃었다.
“이래서 명문이니 어쩌니 하는 것들은…….”
아래에선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나누는 대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청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야 겨우 뭘 해야 하는지 이해한 모양이네. 청명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그래도 뭐…….’
나름대로 재미는 있다. 예전 화산 생각도 좀 나고 말이다.
“그래. 마셔라, 이것들아. 어린노무 시키들이 세상 짐은 다 짊어진 것 같은 얼굴로 죽지 못해 살지 말고.”
적당한 긴장감은 도움이 되지만, 과도한 중압감은 사람을 좀 먹는 법이니까.
“끄응. 하여튼 손이 더럽게 많이 가는 것들이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청명은 하늘에 뜬 달을 보며 또 한 모금의 술을 머금었다.
* * *
청명은 앞에 선 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 숫자는 만족스럽다.
삼 할은 도망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언뜻 보아도 딱히 빠진 자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술자리가 제대로 힘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적당히 수가 줄어 주면 가르치는 청명이야 편하겠지만, 어쨌건 남궁세가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수련을 받는 것이 이득이니까.
그러니 숫자에는 불만이 없는데……. 그런데…….
“우욱.”
“토, 토하지 마십쇼!”
“위가…… 위가 찢어질 것 같아…….”
“아니, 저기로 가서 토하라니까!”
“우웨에에에엑!”
“…….”
청명의 두 눈에서 생기가 급격히 빠져나갔다.
‘이건 뭐 꽃밭도 아니고.’
울긋불긋 달아오른 얼굴과 새하얗게 질린 얼굴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아주 알록달록했다.
그뿐인가?
분명 거리를 어느 정도 두고 있음에도 이들에게서 풍겨오는 술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코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
“예?”
“……대체 뭘 얼마나 퍼 마신 거냐?”
“…….”
청명은 황당함에 무어라 말을 하지도 못했다.
‘아니, 남궁황 그 인간만 정도를 모르는 줄 알았더니.’
딱 봐도 여기 모이기 직전까지 술을 있는 대로 퍼부어 댄 것이 분명했다. 언제부터 남궁세가의 가풍이 이렇게 바뀌어 버렸단 말인가?
팽가도 이 짓은 안 하겠다, 이것들아!
“내 살다 살다…….”
“…….”
“아니…….”
청명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슬그머니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마시자고 했잖습니까!’
‘아니, 나라고 해 뜬 줄 알았나.’
‘그거 남은 술이 뭐가 아깝다고!’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소가주님 맛이 가신 것 같은데? 저, 저! 넘어간다! 얼른 잡아!’
콰당.
“아이고! 소가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빨리 일으켜 드려!”
“끄으으으…….”
끝내 정신줄을 놓아 버린 남궁도위에게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기는 했지만, 차라리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을 일으켜 세우는 게 더 쉬워 보였다.
“더, 더 마실 수…….”
“아이고, 소가주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누가 가서 찬물 좀 가져와라! 빨리!”
청명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꾹 눌러 댔다. 저것들을 보고 있으니 두통이 안 도질 수가 없다.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화산 하나로도 감당 안 되는데 이제는 이것들까지 난리네, 이것들까지.
“어쨌거나…… 여기 나왔다는 건 수련을 받겠다는 거지?”
“예!”
우렁찬 대답이 쏟아졌다.
“……그 꼴로?”
“…….”
이번엔 묘한 침묵이 흘러나왔다. 청명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수련이 만만하냐, 이것들아? 어? 만만해? 그 꼬라지로 훈련을 받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이제 정말 불만 없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눈빛만 보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충의지사가 따로 없었다. 몸뚱이를 보면 방금 돌아온 패잔병 꼴이라서 그렇지.
하지만…….
“도장.”
휘청거리던 남궁도위가 어느새 바로 서서 청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저 명하시면 됩니다.”
“…….”
그 두 눈엔 이제껏 없었던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남궁의 소가주라는 직위가 주는 자신감이 아니라 스스로가 처한 입장을 이해한 이가 가지는 자신감이다.
“그럼 저희는 최선을 다해 따라갈 것입니다.”
“…….”
“그러니 걱정 마시고……. 우우웨엑!”
“찬물 멀었어?”
“지, 지금 가져가고 있습니다!”
“…….”
청명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모래알 같던 어제까지와는 다르게 뭔가 똘똘 뭉친 것 같기는 하네. 뭉치지 말아야 할 것들도 같이 뒤섞여서 그렇지……. 술기운이라든가.
“아무튼.”
“예!”
“……그래, 알았으니 일단 뛰고 시작하자. 저기 산 보이지?”
“예!”
“정상 찍고 와.”
“예!”
“달려!”
“나부터 간다!”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청명이 가리킨 산 정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청명은 엎어지고 바닥을 구르면서도 벌떡벌떡 일어나 다시 달리는 그들을 지켜보다 중얼거렸다.
“……고생길이 훤하네. 고생길이 훤해.”
- 팔자려니 해라.
“아니, 거 진짜 남 일이라고!”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했지만, 잠시 후 부리나케 달려가는 남궁세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언제 저것들 사람 만드나. 에휴……. 야, 달리라고!”
전력을 다해 뛰는 남궁세가의 등 뒤로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았다.
“우, 우웨엑!”
“아 토하지 마시라니까요!”
물론 뭐…… 그저 따뜻하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