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화. 쟤 오늘 날 잡았네. (3)
커다란 내실 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방 안에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음에도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침울하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 무겁디무거운 방 안 분위기 한중간에서 남궁단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의 그라면 어떻게든 이 처진 분위기를 살리려 애썼을 것이다. 물론 이들을 이끄는 것은 남궁도위의 역할이다. 하지만 소가주가 직접 나서기 애매한 부분에서 그를 돕는 것은 늘 남궁단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남궁단은 애석하게도 다른 이들의 기분을 헤아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왜 아니겠는가? 이 처참한 분위기에 가장 일조한 이가 바로 남궁단인데.
그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주물렀다.
말로 채 다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패배다. 검을 배운 지 채 오 년도 되지 않은 당소소에게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패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남은 최소한의 변명의 여지조차 날려 버렸다.
대체 그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아직도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던 당소소의 검이 눈에 선했다.
특히 그를 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승리에 요행이라 할 만한 부분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기본에서 밀렸다.
검에 실린 힘. 정확한 검로. 그리고 내력까지.
도대체 어떻게 그가,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검에 바친 그가 당소소에게 기본으로 밀릴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되지만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그때 누군가 흘린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남궁혁이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우리가…….”
침묵만이 흘렀다. 누구도 그 말에 대답해 주지 못했다.
“형님. 우리가 잘못된 겁니까?”
“…….”
“어떻게 저희가 누님께…….”
“그만.”
남궁단이 살짝 짜증 어린 목소리로 남궁혁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만해라. 추하니까.”
“형님…….”
“아무리 변명해 봐야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패했다. 그것도 처참하게.”
“…….”
“이유야 하나밖에 더 있겠느냐? 그냥 우리가 소소 누님보다 약했던 것뿐이다.”
“그게 말이 안 되니까 이러지 않습니까?”
남궁단이 피식 웃어 버렸다.
‘말이 안 된다라…….’
뭘 어쩌겠는가?
물론 그가 알고 있는 상식대로라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결론이야 뻔하다.
“그럼 우리의 상식이 잘못된 거겠지.”
“형님!”
남궁단이 가라앉은 눈으로 남궁혁을 노려보았다.
“왜? 인정할 수 없다고 우겨 보기라도 할 셈이냐?”
“그, 그건…….”
“그게 아니면 네가 직접 검을 들고 다시 싸워 보기라도 하겠느냐?”
남궁혁이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억울하다 소리쳐 봐야 근본적인 실력 차가 좁혀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의 그들로서는 저 당소소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정말 이해를 할 수 없어서 그럽니다, 형님.”
남궁혁의 희미한 목소리에, 남궁단이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해할 필요 없다.”
“예?”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우리가 화산의 후기지수들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고개를 툭 떨구었다.
남궁단은 살짝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미 매화도에서 그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렇지 않으냐?”
“……예.”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손도 써 보지 못한 수적들을 일방적으로 쓸어 버리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고서도, 그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력이 아닌 무언가 다른 요인이 있었을 거라 제멋대로 믿어 버렸지.”
말을 하면서도 남궁단의 얼굴에는 허탈함이 묻어났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수적들을 지치게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뒤늦게 나타난 그들이 활약할 수 있었다. 만약 입장이 반대였다면 우리 역시 수적들을 일방적으로 쓸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뭐, 그런 생각들로 말이지.”
“형님…….”
“하지만.”
남궁단은 고개를 느리게 내저었다.
“겪어 보니 알겠구나. 그저……. 그래, 그저 저들이 우리보다 강한 것뿐이라는 걸.”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당소소만 해도 저토록 강하다.
그렇다면 당소소보다 먼저 화산에 입문했던 제자들은 지금 얼마나 강한 것일까? 또 화산의 제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힌다는 저 화산오검의 실력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소가주님이라면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불과 하루 전이었다면 남궁단은 주저 않고 ‘그렇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남궁도위는 남궁도위. 그의 실력은 다른 남궁의 젊은 검수들과 한 차원 다른 곳에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차마 쉽사리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형님.”
남궁혁이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저희도…… 저희도 열심히 해 오지 않았습니까?”
남궁단은 남궁혁의 억울함을 이해했다.
그들이 과연 게을렀던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장강참변에서 치욕을 당한 남궁은 사파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난 삼 년간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토록 벌어져 버린 차이를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혁아.”
“예, 형님.”
“소소 누님의 손을 보았느냐?”
“…….”
남궁혁이 입을 닫았다. 남궁단은 이쪽을 지켜보는 모두를 한번 쭉 훑어보았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도 납득될 만한 이유를 찾아내야 한다. 아직 본인도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니지만, 남궁혁을 설득하는 입장이 되어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네 손을 보자꾸나.”
“…….”
“내밀어 보거라.”
남궁혁이 떨떠름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도 몇 개의 흉터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그 흉터의 수는 당소소의 손에 새겨진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말없이 그 손을 바라보던 남궁단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예전의 소소 누님을 기억한다.”
“예?”
“참 아름다우셨지.”
남궁세가 검수들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그 반응에, 남궁단이 화들짝 놀라 손을 황급히 내저었다.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오해를 산 그는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예전 소소 누님의 손은 참 희고 깨끗했다. 그 화려한 궁장 아래로 보이던 새하얀 손은 섬섬옥수라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렸지.”
과거의 당소소를 기억하는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런데 지금 소소 누님의 손은 어떻더냐?”
그 말에 많은 이들이 숙연해졌다. 이번에 그들이 본 당소소의 손은 그저 검수의 손이었다. 굳은살과 상처로 빼곡한 손.
그녀가 얼마나 힘겨운 수련을 해 왔는지는 그 손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원래의 손을 완전히 잃어버릴 정도로 험난한 시간을 버텨 온 것이다.
남궁단이 제 손을 활짝 폈다. 그리고 그 손에 새겨진 상처들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했다고?”
“…….”
“그렇겠지. 그래, 노력했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노력’과 저들의 ‘노력’은 다른 모양이구나. 더 오래 수련한 내 손이 이리도 깨끗한 것을 보니 말이다.”
“……형님.”
남궁단은 새삼 부끄러워졌다.
노력했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그 노력의 흔적이 쌓여 있지 않다.
화산의 검수들이 양손이 모조리 흉터투성이가 되도록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두르는 동안에도 그들은 그동안 해 오던 뻔한 수련에 안주했다.
“우리는 정말 노력했더냐?”
“…….”
“정말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더냐? 우리도 너희만큼 노력했다고? 불과 며칠 되지도 않는 수련에 몸이 상한다고 목청을 높였던 우리가, 정말로?”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도 알아 버렸으니까.
그저 몸을 혹사할 뿐이라고 비난했던 수련을 저 화산의 제자들은 일상적으로 해 내고 있다는 것을. 심지어는 남궁 검수들이 며칠 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높은 강도로 말이다.
남궁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시작한 말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그의 말에 진심이 어려 있었다.
“재능을 논하고, 환경을 논하고, 검술의 우월함을 논하는 것은 적어도 같은 노력을 한 이들 사이에서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저들과 검을 논할 자격이 없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를 더 부끄럽게 하는 것은…….”
남궁단이 입술을 깨물었다.
“매화도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어 가신 분들의 최후를 똑똑히 보았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건…….”
“정말 화산에 배우는 게 창피한 일일까?”
질문을 던진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나보다 더 노력하는 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쓸데없는 자존심만 내세우고 있는 지금의 내가 훨씬 더 창피하구나.”
아무도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나는 내일 수련에 참가할 것이다.”
“형님…….”
“강요 같은 건 할 생각 없다. 각자의 선택이겠지. 하지만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남궁세가의 이름을 되찾을 방법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말로만 지껄이는 게 아니라, 정말 내 한계가 어디인지 시험해 볼 생각이다.”
남궁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구석에 앉아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남궁도위. 그가 말없이 남궁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소가주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겠지.’
화산과 남궁 사이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말이다. 그러니 자존심만 내세우는 그들을 보며 얼마나 답답했을까?
남궁단은 남궁도위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떠난 자리엔 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벽에 기대앉은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저마다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구석에 앉은 남궁도위는 그 모습을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겨우 시작점이로군.’
돌고 돌아 이제야 출발선에 선 것이다.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부터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
아마 이들에게 오늘 밤은 무척이나 길 것이다.
누구도 대답해 주지 않는 사안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야 할 테니까.
하지만 남궁도위는 이들을 믿었다.
적어도 이들이 남궁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든 존중받아야 한다.
남궁도위는 그저 그 선택을 지켜볼 뿐…….
“소가주님.”
“응?”
그때 남궁혁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남궁도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그는 뭔가 주저하는 듯 남궁도위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소가주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