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화. 쟤 오늘 날 잡았네. (2)
쿠웅!
또 하나의 검수가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남궁도위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고 바닥에 엎어진 이들을 헤아렸다.
‘하나, 둘, 셋……. 여섯…….’
정확하게 여섯.
그 여섯은 남궁세가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숫자인 동시에, 사형제들이 머리가 터져 기절하는 꼴을 똑똑히 보고도 끝끝내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고 앞으로 달려 나간 남궁의 근성을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이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를 외치고 달려 나갔다가 똑같이 대가리가 깨져 기절한 근성 넘치는 이가 자그마치 여섯이란 것이다.
저 당소소의 검에 말이다.
‘모르겠구나.’
웃어야 할까? 아니면 울어야 할까?
당소소가 시원하게 남궁세가의 검수들을 처발라 버린 덕분에 그의 선택이 더없이 옳았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이 이상 확실하게 증명할 방법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기뻐할 일인가?’
검술을 익힌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당소소에게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가랑잎처럼 쓸려 나간 광경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남궁도위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남궁세가 검수들은 과연 귀신이라도 본 듯한 낯이었다.
충격, 불신, 그리고 경악. 그 모든 게 뒤섞인 복잡한 얼굴로 쓰러진 이들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짝짝짝.
누군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앞으로 나섰다.
"자, 친선 대련은 이 정도면 충분할 듯하니, 이만 정리하지. 그냥 대련에 불과하니까 결과에는 연연하지 말고……."
어색한 얼굴로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려 나선 백천이었다. 남궁도위는 그를 보며 뭐라 말할 수 없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어떻게든 남궁세가의 마지막 체면만은 살려 주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담긴 행동이니까.
하지만…….
"잠시만요, 사숙."
"소소야. 이제 그만……."
"아직 할 말이 남아서 그래요. 잠깐이면 돼요."
"……그래."
결국 당소소에게 밀려난 백천이 고개를 숙이고 터덜터덜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가 앞으로 한 발 나와 남궁세가의 검수들을 쭉 훑어보았다.
누구도……. 심지어는 남궁도위조차도 그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너희 말이야."
"……."
"사형이 친히 수련을 시켜 준다고 했는데, 불만을 지껄여 댔다며?"
"……."
"너희가 뭐가 그리 대단해서?"
남궁세가 검수들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이미 자욱하던 패배감 위로 모멸감이 쏟아졌다.
"남궁세가? 명문? 물론 대단하지. 당연히 대단해. 그런데…… 너희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남궁세가의 이름을 너희가 만들었어?"
"……."
"정신 좀 차려."
모두를 노려보는 당소소의 눈빛이 차가웠다.
명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자존심만 높은지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당소소다. 그녀 역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가에서 한발 물러서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이들과 다름없이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너희는 그냥 애송이들일 뿐이야. 남궁세가라는 이름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애송이들."
그 말에 남궁도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가슴이 욱신거렸다.
"남궁세가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알아서 강해질 줄 아는 모양인데, 너희 같은 것들이 남궁의 이름을 대표해야 한다면 남궁세가의 이름이 땅에 떨어질 날도 멀지 않았네."
"누님!"
"……말씀이 조금 심하시잖습니까?"
"심해?"
즉각적으로 돌아온 반박에 당소소는 오히려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검을 몇 년 배우지도 않은 나한테 검으로 박살이 나고도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오는 모양이지?"
"……."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다시 입을 닫았다.
이것만은 무슨 말로도 변명이 불가능했다. 천하에서 가장 말 잘하는 이를 데려다가 변론을 시킨다고 해도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아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본도 안 된 것들이 겉멋만 들어서는."
당소소가 차갑게 냉소했다.
"정말 강해지고 싶다면 기초부터 다시 다져. 그 요란하고 실속 없는 검초에 당해 줄 적이 이 강호에 있을 리 없으니까."
말을 끝낸 그녀가 몸을 획 돌렸다.
"……."
이제야 모멸의 시간이 끝났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던 이들의 귀에 차가운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날아들었다.
"그리고."
"……."
"우리 사형한테 감사해. 그래도 사형이 너희를 생각해서 나를 내보낸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섰으면 너희는 더 처참하게 졌을 거야."
그 말이 결정타였다. 더는 항거할 여지조차 잃어버린 남궁세가 검수들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꺼졌다. 눈동자는 빛을 잃었고 손끝은 애처로울 만큼 가늘게 떨렸다.
그 안쓰러운 광경을 가만 지켜보던 백천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조걸이 그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저기, 사숙."
"……왜?"
"이거 완전 사기 아닙니까?"
"……조용히 해라."
백천이 가만히 검지를 제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아니. 사기 맞잖……."
윤종은 말없이 손을 뻗어 조걸의 주둥아리를 움켜쥐었다.
"조용히 하라고, 새끼야."
"읍읍!"
백천이 어딘가 찔리는 표정으로 남궁세가를 바라보았다.
‘……사기 맞지.’
다른 이들이 나섰으면 더 박살이 났을 거다?
‘글쎄…….’
물론 오검 정도가 나섰으면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소소가 화산에서 약한 축에 드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냉정하게 평가해서 당소소의 실력은 이제는 화산에서도 상위에 들었다. 워낙 어릴 적부터 당군악의 총애를 받아 갖은 영약을 간식처럼 먹어 댄 데다, 자소단의 내력까지 더해졌다.
화산의 제자들 중에서 내력으로만 따지자면 첫째 둘째를 다투는 이가 당소소다.
게다가 다른 이들이 나섰다면 좀 더 수월하게 저들을 상대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리는 모습은 웬만해서는 만들어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뒤늦은 것을 따라잡으려면 오히려 기초부터 공을 들여야 한다고 지난 삼 년 동안 죽어라 기초를 다져 온 당소소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실력이 오르는 속도만 보고 있으면 ‘더러운 세상, 재능이 전부로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와 검을 집어 던지게 만들지만, 막상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러니 실력이 늘지’라는 말과 함께 집어 던진 검을 주섬주섬 주워 들게 만드는 이가 바로 당소소다.
그러니 이건 오직 그녀이기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청명이 놈도 이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어서 소소를 내보낸 거겠지.’
자신들보다 한참 늦게 검을 익힌 이에게 기본으로 박살이 난다는 건 그만큼 굴욕적인 일이니까.
남궁세가 검수들의 표정엔 충격이 고스란히 생생하게 어려 있었다. 그 양을 보고 있으니 백천은 새삼 당소소가 대견스러웠다.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악의 딸이라는 신분.
그녀의 존재는 화산과 사천당가의 교류를 상징하는 것과 다름없다. 검을 배우기 위해 왔다고는 하나, 그녀가 적당히 수련을 빼먹고 교류의 꽃 정도로 살아가려 했다고 해도 나무랄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소소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다 버렸다. 오직 한 사람의 검수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 노력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는 곁에서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그 눈물겨운 노력이 무엇을 이루어 냈는지 마침내 오늘 증명된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소소 자신도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될 터.
"사고오오오오오!"
당소소가 어느새 기척도 없이 와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유이설을 붙잡고 늘어졌다.
"저 잘했죠! 그죠?"
무표정한 유이설의 몸이 옆으로 획획 젖혀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소소야. 네 힘이 예전보다 훨씬 세졌다는 걸 생각해야지……. 사매 허리 분질러지겠다…….
그 와중에도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유이설도 참 대단했다.
"……팔꿈치가 아직 뻣뻣해."
"그, 그래요? 신경 썼는데."
당소소가 팔을 접었다 펴는 시늉을 했다.
"하체는 단단하게, 팔은 좀 더 유연하게."
"네! 명심할게요!"
당소소가 진지하게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은 그 모습을 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니, 소소만이 아니지.’
지난 삼 년 동안 당소소를 끊임없이 가르쳐 온 유이설이 없었다면 오늘의 광경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뒤쪽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청명이 휘적휘적 앞으로 나섰다.
"흐음."
그 짧은 목소리만으로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는 담담한 눈으로 남궁세가를 바라보았다.
"그럼."
"……."
"뭘 더 증명해 줄까?"
청명이 피식 웃자 남궁세가 검수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들의 생떼가 저 화산검협에게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지 실감이 되어서였다.
화산검협은 고사하고 당소소에게도 박살이 나 버리지 않았는가.
"장난은 여기까지 하자고."
청명이 손가락을 가볍게 튀겼다.
"말로 해도 못 알아 처먹고, 행동으로 보여 줘도 이해 못 하는 놈들까지 억지로 끌고 갈 정도로 내가 한가한 사람은 아니거든?"
"도장……."
"내일 아침까지 거취를 정해."
그는 거두절미하고 딱 잘라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내일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맛보기 같은 수련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수련을 할 거야. 아마 지금보다 배는 힘들어지겠지."
"……."
"그게 싫은 놈들은 내일부터 수련하러 나오지 마. 안 잡을 테니까."
남궁도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도, 도장! 그건……."
"너도 입장 똑바로 해."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따라오지 않겠다고 악을 쓰는 놈들까지 일일이 끌고 가는 건 과욕이야. 그건 진짜 의욕을 가진 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밖에 안 돼. 네가 정말 남궁세가를 위한다면 썩은 부분은 도려내고 갈 줄 알아야 해."
남궁도위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도장."
남궁도위는 결국 청명의 말이 맞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과 같은 마음가짐으로는 모두가 어정쩡한 수련을 반복하게 될 뿐이니까.
"그럼 내일까지……."
"하나만……."
그때 끼어든 목소리에, 청명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슬쩍 내려갔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궁단이 어느새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뭐, 그러든지."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남궁단은 청명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희가 도장의 수련을 따라가면…… 강해질 수 있습니까?"
청명이 피식 웃는다.
"강해질 수 있냐고?"
"예. 저희는……."
"적당히 해. 이 머저리 새끼들아."
조금 놀라 고개를 든 남궁단은 청명의 눈빛을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청명은 날카롭게 남궁단을 노려보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나는 하려고 하는 놈들 엉덩이를 걷어차 주는 사람이지, 우는 애새끼들을 어르고 달래는 사람이 아니야."
남궁단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이 정도면 봐줄 만큼 봐줬어."
"도, 도장……."
"강해지고 싶으면 너희가 더 노력해. 나더러 해 달라고 징징대지 말고."
남궁단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 그를 차갑게 일별한 청명이 남궁도위를 향해 다시 한번 말했다.
"강요하지 마."
"……."
"제 길은 제가 정하게 해. 남은 이들이 적더라도 대가리 수만 채운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말을 끝낸 청명이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허리춤에 찬 술병을 뽑아 들더니 터덜터덜 멀어졌다. 그 뒤를 오검과 화산의 제자들이 따랐다.
커다란 장원 마당에 덩그러니 남겨진 남궁세가 검수들은 멀어지는 화산파 제자들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