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화. 쟤 오늘 날 잡았네. (1)
풀썩.
남궁단이 바닥으로 철퍽 고꾸라졌다. 머리에서 새하얀 김이 솔솔 피어올랐다.
윤종은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고 쓰러진 남궁단을 살폈다.
"……죽었네."
"네, 죽은 듯."
조걸이 팔짱을 낀 채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런 호쾌한 타격음은 오랜만에 들어 본다고 덧붙이면서.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놀라움은 뒤에서 지켜보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하나같이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쓰러진 남궁단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문장을 구사하여 말하지 못했다.
"혀, 형님이……."
"일격에……."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쓰러진 남궁단과, 어깨에 검을 걸친 채 생글생글 웃는 당소소를 숱하게 번갈아 보아도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끄…… 으으으……."
"혀, 형님!"
"단아!"
그때 잠깐 정신을 잃었던 남궁단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부여잡은 채 고통에 신음하던 그는 이내 떨어진 목검을 주워 들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으……."
반쯤 몸을 일으켰던 그는 다시 제 머리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었다.
‘아프지.’
‘아프겠지.’
‘그냥 죽고 싶지.’
오검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저 고통은 당해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니까.
"쿨럭! 쿠, 쿨럭!"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운 남궁단을 보며 당소소가 생긋 웃었다.
"왜? 더 하게?"
"그……."
남궁단은 반쯤 넋이 나간 눈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바, 방심……."
"아아, 방심?"
당소소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방심했으니까 무효로 하자. 그럴 만하잖아, 그치?"
본디 검수에게 방심했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고 변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건 스스로 제 낯을 깎아 먹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자루의 검에 모든 것을 건 이들이 방심한다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소소는 그런 남궁단의 변명을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 남궁단 입장에서는 더없이 고맙게도 말이다.
그러니 언뜻 듣기에는 참 마음 좋고 인심 좋은 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오검의 반응은 영 딴판이었다.
"……쟤 오늘 날 잡았네."
"제대로 빡친 모양인데요?"
"미리 관 하나 챙겨 둘깝쇼?"
"……그래라."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검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남궁단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끄으."
남궁단이 제 머리를 꾹꾹 누른다.
눈앞이 아찔아찔하고, 정신이 멍했다. 머리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무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제, 제 실력만 보일 수 있으면…….’
당소소가 날쌔고 가벼운 검을 쓸 거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저 작은 체구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중검(重劍)이 펼쳐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검을 막았던 손목이 지금도 욱신욱신했다.
"쿨럭!"
남궁단은 다시 검을 들어 당소소를 겨누었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짓이 추하다는 것쯤은 스스로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체면 따위가 아니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남궁의 검이 화산의 검에 반격조차 해 보지 못하고 박살이 났다는 결과만 남게 된다. 그것도 화산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당소소를 상대로 말이다.
그건 남궁단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
"흐음."
당소소는 검을 겨눠 오는 남궁단을 바라보다 제 검을 빙글빙글 돌렸다.
"얼마나 더 기다려 줄까?"
"……예?"
"회복 말이야. 나중에 또 정신이 없어서 제 실력을 발휘 못 했다고 할 거잖아."
"……."
남궁단은 순간 희게 질릴 만큼 입술을 짓깨물었다.
저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더 큰 굴욕을 선사했다. 이미 끝난 승부를 억지를 부려 끌고 가는 것은 다름 아닌 남궁단이니까.
"준비……됐습니다!"
"그래?"
당소소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 순간 남궁단의 두 눈에 불똥이 튀어 올랐다.
‘이……!’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그를 앞에 두고 경계도 없이 접근하다니!
"타아아아압!"
남궁단이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내리쳤다. 남궁세가의 독문검식인 철검십이식이 군더더기 없이 펼쳐졌다.
쿵!
검과 검이 허공에서 맞닿는 순간, 그는 손목을 뒤틀며 검을 폭풍처럼 휘둘렀다. 당소소의 전신을 휩쓸어 버릴 듯 맹렬한 검세였다.
‘제 실력만 발휘하면 된다!’
검을 몇 년 익히지도 않은 당소소에게 당할 그가 아니다. 이 일 초, 일 초의 검격에는 그의 피와 땀이 어려 있지 않은가! 아무리 당소소가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가 이 검에 바친 시간을 따라올 수는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분명.
분명 그럴 터인데…….
쾅! 쾅! 쾅! 쾅! 쾅!
막혔다. 모조리.
그가 휘두르는 맹렬한 검격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당소소의 검에 막히고 있었다.
‘어, 어떻게?’
남궁단은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얻어맞은 덕에 그의 검이 약해졌는가?
아니다.
검이란 본디 몸에 새겨 넣는 것이다. 그의 검은 그가 원하는 검로를 정확하게 그려 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도무지 당소소의 몸에 닿질 않았다.
욱신! 욱신!
오히려 검이 충돌할 때마다 그의 손목이 부러질 듯 아파 왔다.
충돌할 때마다 검신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을 그의 손목이 버텨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럴 리가 없다!’
남궁단은 괴성을 내지르며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광포한 폭풍 같은 검이 당소소를 향해 쏟아졌다.
"혀, 형님!"
"안 됩니다, 형님!"
지켜보던 남궁세가 검수들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남궁단의 검이 더는 대련에 어울리지 않게 변해 간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저대로라면 당소소의 몸이 맹렬한 검기의 폭풍에 갈기갈기 찢기고 말 터!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몰리고 있는 것은 되레 남궁단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검과 검이 연이어 충돌하는 와중에도 당소소의 눈빛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남궁단을 주시하는 시선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순간 남궁단의 귓가에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다 했니?"
"헉!"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웅!
검과 검이 서로 맞닿는 순간, 당소소가 손목을 가볍게 뒤틀어 맞닿은 남궁단의 검을 위로 튕겨 냈다. 자연히 남궁단의 상체가 활짝 열렸다.
"머리!"
당소소의 검이 빛살처럼 그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남궁단은 필사적으로 검을 끌어당겨 제 머리 위를 막았다. 그리고 이번만은 당소소의 검에 짓눌리지 않도록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마, 막아 냈…….’
하지만 검끼리의 충격을 각오한 바로 그 순간, 당소소의 검이 빙글 회전했다. 그리고 남궁단의 검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뭐?’
그 순간, 남궁단은 똑똑히 보았다. 머리를 지나쳐 내려간 검이 그의 오른쪽 발목에 정확하게 틀어박히는 모습을 말이다.
따아아아아아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남궁단의 입이 찢어질 듯 쩍 벌어졌다.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발목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끄, 끄으……."
순간 악에 찬 남궁단이 발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따아아아아아악!
하지만 그가 채 검을 다 휘두르기도 전에 당소소의 검이 이번에는 무릎을 후려쳐 왔다.
"으으……. 으아아아아아!"
남궁단이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당소소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피하지 않고, 되레 날아드는 검을 정면으로 후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남궁단의 허리가 부러질 듯 뒤틀렸다. 그의 검은 등 뒤로 완전히 젖혀져 있었다. 검을 잡은 손아귀가 찢어진 모양으로 시뻘건 피가 뚝뚝 흘렀다.
‘이, 이럴 수는…….’
그 순간 그의 귓가에 노기 실린 당소소의 목소리가 꽂혔다.
"검수라는 새끼가 열받는다고 검을 막 휘둘러?"
당소소가 눈에 훤히 보이게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기겁한 남궁단이 양손으로 목검을 들어 제 머리 위를 가렸다.
당소소의 검이 맹렬하게 하강했다.
"검에!"
쿠우우우우우웅!
"힘을!"
쿠우우우우우웅!
"싣고 싶으면!"
쿠우우우우우우우웅!
"자세부터 낮추라고 이 새끼야! 자세!"
쿠우우우우우우우우웅!
남궁단은 당소소의 바람대로 자세를 낮췄다. 뭐 거의 뒤틀리다시피 허리가 뒤로 꺾인 것도 ‘자세를 낮춘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
"체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체면이 어쩌고 저째?"
"끄, 끄으윽."
반쯤 정신이 나가 버린 남궁단은 본능적으로 제 몸을 바로 세웠다. 아니, 바로 세우려 했다.
"자세 낮추라고, 이 새끼야!"
콰아아아아앙!
남궁단의 목검이 제 얼굴에 틀어박혔다. 코에서 뿜어져 나온 두 줄기의 핏물이 희극적으로 허공을 수놓았다.
"얘도 참, 말을 영 못 알아듣네? 그래. 귀로 못 알아들으면 몸으로 알아들으면 되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오검은 뒤에 벌어질 참상을 예상하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차마 볼 수가 없어서였다.
"무릎 낮추고!"
당소소의 검이 남궁단의 무릎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허리 똑바로 펴고!"
옆으로 맥없이 기울어지는 남궁단의 허리를 후려갈겨 강제로 펴지게 만들었다.
"어깨! 어깨에 힘 빼고!"
양쪽 어깨를 빠르게 강타당한 남궁단의 몸이 더없이 올바른 자세를 취했다.
백천은 말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폭력은 대물림되는가.
어째서…….
"대가리를 처굴리면서 검을 쓰라고! 이 새끼야!"
당소소의 검이 남궁단의 정수리 한가운데를 향해 빛살처럼 날아들었다.
제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검을 보며 남궁단은 저도 모르게 희게 웃고 말았다.
‘이건…… 꿈이야.’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차마 사람의 머리에서 났다고 생각하기 싫은 소리가 연이어 다섯 번 울려 퍼졌다.
털썩.
남궁단이 마침내 썩은 짚단처럼 바닥에 허물어졌다.
돌 맞은 개구리처럼 사지를 덜덜 떨어 대는 그의 모습을 장원의 모두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뭐야? 겨우 이걸로 쓰러져? 야. 안 일어나?"
그때 윤종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백천에게 물었다.
"사숙."
"응?"
"소소가 왜 저렇게 됐을까요?"
"윤종아."
"예?"
"……사람은 보고 배운 대로 자랄 수밖에 없다. 윗물이 그 새낀데 아랫물이 뭘 어쩌겠느냐."
"……."
"그저 네가 청명이 놈의 사형인 것에 감사하며 살거라."
참으로 뜻깊은 말이었지만, 윤종은 그래도 뭔가 걸리는 모양이었다.
"사숙."
"또 왜?"
"……그럼 앞으로 화산에 들어올 명자 배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
차마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한 백천이 서글픈 시선을 돌렸다. 그 끝에 놓인 청명은 즐겁게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원시천존이시여."
화산을 굽어살피소서.
"다음! 다음 새끼 나와! 안 나와? 야, 도위 너 나와 봐!"
정적이 내려앉은 장원에 당소소가 날뛰는 소리와 낄낄대는 청명의 웃음소리만 널리 널리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