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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10화 (1,011/1,567)

1010화. 어른이 된다는 건 말이다. (4)

남궁단은 사뿐사뿐 다가오는 당소소를 멍하니 넋을 놓은 채 바라보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그러니까…… 저 당소소가 그를 상대한단 말인가?

저 손에 쥔 검으로?

남궁단이 황망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남궁세가 검수들의 반응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래, 내가 이상한 게 아니지?’

황당함이 도를 넘다 보니 본인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남궁단은 청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도장."

"응?"

태연하게 답해 오는 목소리를 들으니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지만, 남궁단은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꾹 내리눌렀다.

"지금 저더러 당소소 누님과 비무를 하라는 겁니까?"

"뭐 거창하게 비무라고 할 것까지 있나? 그냥 대련이지 뭐."

청명이 피식 웃었다. 남궁단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말았다.

지금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상대가 다름 아닌 당소소이기 때문이다.

‘나를 무시하는 건가?’

당소소는 사천당가 태생이다. 남궁세가와 사천당가는 같은 오대세가의 수장을 다투며 오래도록 교류해 왔다. 다시 말하자면 어릴 적부터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남궁단은 당소소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꽤 잘 알고 있었다.

사천당가는 여자에게는 비기(秘技)를 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당소소는 화산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무학을 전달받지 못했다.

물론 기본적인 내공 수련과 간단한 무학 정도는 익혔겠으나, 어릴 적부터 남궁세가의 강도 높은 수련을 버텨 온 남궁단의 입장에서는 무인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런 사람과…….’

당소소가 화산에 입문하고 본격적으로 검을 익혔다고 해도, 몇 년이나 익혔겠는가?

남궁세가에서는 그 정도 검을 익힌 이에게는 진검(眞劍)조차 지급하지 않는다. 검을 수련한 기간만 따지자면 이제 겨우 초심자에서 벗어난 수준일 텐데, 어떻게 그런 이를 남궁단의 상대로 내세운단 말인가?

이건 상식적으로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도장.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이건……."

"아, 거 말 많네."

청명이 귀를 후벼 대며 말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을 다시 하고 말고 해. 할 말 있으면 이겨 놓고 하면 그만이지. 안 그래?"

남궁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청명을 쏘아보다 이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어. 그래, 그래."

청명이 건성으로 대답하자 남궁단은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후우."

그 태연한 표정을 보며 한숨을 쉰 남궁단이 발을 떼어 앞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형님!"

뒤에서 그를 만류하는 목소리들이 발목을 잡았다.

"형님. 이건……."

"차라리 제가 나가겠습니다. 형님이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형님께서……."

"됐다."

남궁단은 단호하게 그들의 말을 끊어 냈다.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나을 때가 있는 법이다.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희는 그저 지켜보거라."

"……하지만……."

"됐다질 않느냐."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얼굴에 어린 불만마저 완전히 지워 내지는 못했다.

그들도 당소소가 누구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러니 애초에 남궁단과 당소소가 싸워 승부를 겨루도록 한 것 자체가 남궁세가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남궁단은 가슴이 답답했다.

그라고 왜 화가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마저 불만을 토해 내 버리면 남궁도위의 입장이 더욱 곤란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의 검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걸어 나가 당소소와 마주 선 남궁단은 몸을 쭉 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 채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누님."

"응. 단이 오랜만이네."

얼굴이야 이미 이곳에 온 이후로 몇 번 마주했지만 이렇게 인사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새삼스런 인사를 건넨 남궁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님도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고생? 한번 털어놓기 시작하면 열흘 정도는 안 쉬고 말할 수 있지."

"……그렇겠네요."

실용적인 무복과 수수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머리, 그리고 화장기 없는 얼굴까지. 그가 기억하는 당소소와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그녀의 허리춤에 매인 검을 슬쩍 보았다. 외양이 바뀐 것에 더해 검까지 차고 있으니 당소소의 모습이 아무래도 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누님."

"왜?"

"누님께서 한번 말씀을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응?"

남궁단은 고개를 내저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누님. 절대 누님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궁단은 바보가 아니다.

이미 그들은 체력적인 측면에서 당소소에게 박살이 났다. 그것만 보더라도 화산에 입문한 이후로 그녀가 얼마나 힘든 고련을 해 왔는지 모를 수가 없다.

무시하기는커녕 감탄하고 되레 존경하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남궁단의 시선이 슬쩍 당소소의 손으로 향했다.

저 손에 끝도 없이 새겨진 자잘한 흉터들은 당가의 암기로 만들어진 상처가 아니라 분명 검상이다. 남궁단은 과연 손이 저 지경이 되도록 수련을 한 적이 있었던가?

"누님께서 열심히 해 왔다는 건 바보가 아니면 다 알 겁니다. 하지만…… 검이라는 건 시간을 들여 쌓아 올리는 게 아닙니까?"

"……."

"훗날에는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누님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이 말도 안 되는 대련은……."

"체면?"

"예."

남궁단은 당소소에 대한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나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소소를 쓰러뜨리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이건 결과가 정해져 있는 승부나 마찬가지니까. 당당한 남궁세가의 검수로서 그런 대련에서 이기고 좋아할 수 있겠는가?

"보고 있는 이들이 많잖습니까."

"흐음."

당소소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남궁단이 말을 하다 말고 뒤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저 사람을 설득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누님이 말씀하시면……."

"너 말이야."

그때 말허리를 뚝 끊고 들어오는 당소소의 목소리에, 남궁단이 퍼뜩 앞을 다시 보았다.

당소소는 어느새 커다란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었다.

"예전에는 애가 그래도 좀 똘똘했던 것 같은데."

"예?"

"영 상태가 안 좋아졌네."

"……무슨……."

그녀가 뚱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 네 입에서 체면이니 어쩌니 하는 말이 나와?"

"……누, 누님."

남궁단은 황망한 얼굴로 입을 다물질 못했다. 그가 말한 체면은 남궁의 체면이 아니라 당소소의 체면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런 식으로…….

"누나 된 입장에서 하나는 이야기해 줄게."

"예?"

"검수의 체면은 입이 아니라……."

툭.

당소소가 제 허리에 찬 검을 가볍게 두드렸다.

"검으로 세우는 거란다."

남궁단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소소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

스르르릉.

남궁단이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한 수 배우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예?"

당소소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진검 말고 목검으로 하자."

"……."

"웬만하면 진검으로 하려고 했는데, 보아하니 너는 목검으로 해야겠다."

남궁단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진검으로 대련하는 것도 겁낼 거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허세 넘치는 말들을 늘어놓았단 말인가?

"어때?"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래. 사형! 여기 목검 두 개만 던져 줘요!"

하지만 더 황당한 일은 그때부터였다.

당소소의 시선을 받은 윤종이 세상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저…… 소소야."

그는 식은땀까지 흘리며 당소소를 만류했다.

"굳이 목검까지……."

"왜요?"

"아, 아니……. 내 말은 굳이 목검까지 쓸 일인가 싶어서 말이다. 그냥 대충 진검으로 하면 될 것 같은데……."

"알았으니까 빨리 주세요."

"……."

윤종은 안절부절못하며 당소소와 남궁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 힘들다는 듯 백천을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백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줘라."

"사, 사숙."

"괜찮으니까 줘."

"……."

백천까지 단호하게 나오니 윤종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고 옆에 놓인 목검 두 자루를 집어 당소소에게 던졌다.

"……살살 해라, 소소야."

"네네."

당소소가 윤종이 던진 목검들을 양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하나는 남궁단에게 집어 던졌다.

탁.

얼결에 목검을 받은 남궁단은 떨떠름한 얼굴로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뭐 하자는 짓인가?

"……이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남궁단이 제 손에 들린 목검을 꽉 움켜잡고는 중단세를 취했다.

"한 수 배우겠습니다."

원래는 그의 신분과 소속을 밝히는 절차가 있어야겠지만, 굳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이 가당찮은 대련을 제대로 된 비무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빨리 끝내자.’

어차피 당소소가 할 수 있는 건 뻔하다.

보나 마나 당가 특유의 날렵한 신법을 바탕으로 원거리에서 툭툭 공략해 올 것이다. 애초에 당가의 무학은 화산의 검술과도 비슷한 면이 있으니까.

화려한 검초에 현혹되지만 않으면 남궁단이 위험할 일은 전혀 없다.

물론 당소소가 화려한 검초를 바탕으로 승부를 지구전으로 끌고 가 우월한 체력으로 그를 압박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 검을 버틸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

당소소에게 원한은 없지만, 그는 지금 남궁세가의 자존심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남궁세가가 무시받는 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압도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우득.

검을 강하게 움켜잡은 남궁단이 발끝에 힘을 꽉 주었다.

‘단숨에 몰아붙여 끝내 드리죠!’

그는 힘을 실어 당소소를 노려보았다. 내력을 바짝 끌어 올린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간다!’

그의 발이 바닥을 박찼다.

"타아……. 억!"

그런데 배 속에서 커다랗게 터져 나오던 남궁단의 기합이 순간 목구멍에서 덜컥 틀어막혔다. 그가 바닥을 박찬 순간 당소소가 그의 바로 앞에 말 그대로 불쑥 ‘나타난’ 것이다.

‘뭐, 뭣!’

당소소의 검이 맹렬하게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남궁단이 기겁하며 급히 검을 들어 올렸다.

쿠웅!

머리 바로 위에서 두 자루의 목검이 강하게 충돌했다.

‘위, 위험했다…….’

남궁단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의 신법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당할 뻔한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다.’

기습이 통하지 않은 이상 남은 것은 실력뿐이다. 게다가 당소소는 실수를 범했다. 이렇게 거리를 좁혀 버린다면 화려한 검초를 펼칠 여지가 없어진다.

‘단번에 끝낸다!’

남궁단은 내리누르는 검을 밀어 내며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우득!

‘어?’

그 순간 남궁단의 시선이 절로 위로 올라갔다.

분명 떨어져 나갔어야 할 당소소의 검이 여전히 그의 검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뭐…….’

그는 내력을 끌어 올려 다시 한번 당소소의 검을 튕겨 냈다.

우득!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손목이 뒤틀렸다. 당소소의 검이 그를 검과 함께 통째로 짓누르고 있었다.

"어억……."

그의 팔이 달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남궁단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삐질삐질 배어났다.

검 위에 만금거암이 얹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악을 써도 짓눌리기만 할 뿐,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당황한 남궁단이 부릅뜬 눈으로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이던 당소소가 그를 보며 씩 크게 웃었다.

"일단."

"……."

"한 대 맞자."

"어……?"

그 순간 어마어마한 힘이 남궁단의 검을 짓눌렀다.

마치 시간이 느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남궁단의 눈엔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자신의 손목이 꺾이는 모습과, 들고 있던 제 목검이 이마를 향해 맹렬히 떨어지는 모습이.

어? 이러면 안 되는…….

어?

쿠우우우우우우우웅!

사람의 머리와 단단한 목검이 만들어 낸 거대한 굉음이 장원 전체에 아프도록 선명하게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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