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9화. 어른이 된다는 건 말이다. (3)
카앙!
검이 맞부딪힌 순간 조걸이 뒤로 훅 밀려났다.
“큭!”
재빠르게 발을 놀려 자세를 다잡은 그는 몸을 더 낮추며 백천을 노려보았다.
“…….”
입술을 질끈 깨물지 않으면 신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검을 잡은 손목이 연신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반면에 백천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그저 무감한 얼굴로 조걸을 응시할 뿐.
태산 같은 중압감을 느낀 조걸은 저도 모르게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사숙.’
화산의 제자들은 배분을 떠나 마치 형제처럼 지낸다. 다른 문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저 백천이다.
제아무리 청명이 배분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저 백천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웠다면, 청명을 제외한 누구도 감히 반발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천은 그러지 않았다. 대사형으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그들과 같이 낮은 곳에서 임했다. 놀려 먹기 좋은 동네 형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그런 백천이지만…….
‘이럴 때는 정말 다른 사람 같다니까.’
검을 들고 백천을 마주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저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말이다.
“가벼워.”
“……예?”
백천이 가라앉은 눈으로 조걸을 바라본다.
“네 검은 빠르다. 화산에서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
“하지만 그만큼이나 가볍다. 속도에 치중하는 것은 나쁜 게 아니나 속도에 치중하느라 무게감을 잃는 것은 분명 문제다.”
조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점을 지적당하는 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게 자신도 뻔히 알고 있는 단점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조걸은 개의치 않았다. 백천의 말이 온전히 그를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그리고 앞으로 내민 검을 살짝 흔들었다.
“그건 제 검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으실 때 하실 말씀 아닙니까?”
“아, 그래?”
파앗!
그 순간 쇄도한 백천이 검을 내리쳤다. 조걸이 기겁하며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아 냈다. 검이 맞닥뜨린 순간 쿵, 하는 소음과 함께 조걸의 몸이 뒤로 꺾였다.
“끄윽…….”
“입으로야 누구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걸 현실로 구현하는 거지.”
조걸의 얼굴에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그는 백천의 검을 밀어 내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데, 백천은 태연하게 말까지 이어 가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둘의 차이는 극명했다.
하지만!
그그극!
조걸은 포기하지 않았다. 검을 뒤틀어 백천의 검을 순간적으로 흘려내고는 순식간에 십여 개의 검영을 발출했다.
카캉!
그 검이 채 뻗어지기도 전에 백천의 매화검이 조걸의 검 아랫부분을 강하게 쳤다.
그 바람에 뒤로 튕겨 나간 조걸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큭!”
재빨리 짚고 몸을 일으킨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가볍게 검을 한 번 휘돌린 백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천히 중단세를 다시 잡았다.
“신나게 공격할 때라면 네 쾌검은 무기가 된다. 하지만 너보다 강한 이를 만났을 때는 어쩔 거지?”
“…….”
“쾌검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버텨 내는 법 정도는 익혀야지.”
“빌어먹을,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요!”
“그럼 입으로만 지껄이지 말고 보여 줘 봐!”
쾅!
백천의 말이 신호탄인 것처럼 조걸이 바닥을 걷어차며 쇄도했다. 시뻘건 기운이 넘실대는 조걸의 검이 백천의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단숨에 꿰뚫어 버리겠다는 듯 말이다.
백천의 검이 그의 공격을 맞받아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그 순간, 조걸의 검은 빙글 방향을 틀어 백천의 허벅지를 노렸다. 강맹한 공격이었다.
파앗!
백천이 뒤로 물러나며 피해 냈다. 그러자 조걸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폭풍과도 같은 연격으로 백천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궁단은 슬쩍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어느새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나 있다.
‘저게…… 정말 사형제간의 대련인가?’
백천을 몰아붙이는 조걸에게선 오싹할 정도의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살기에 걸맞게 그가 휘두르는 검 하나하나가 살초가 아닌 것이 없었다.
명백하게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검.
지금 백천의 얼굴 바로 옆을 스친 검만 해도 지켜보기에는 경악할 정도로 위험했다.
‘남궁에서 대련 중에 저런 수를 썼다면?’
아마 가문 전체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그가 알기로 화산정검은 화산의 대제자다. 그 말인즉, 언젠가는 화산의 장문인이 될 사람이라는 의미다.
만약 남궁단이 남궁도위에게 대련 중에 살초를 사용했다면, 묻고 따질 것도 없이 전신을 구속당한 채 옥에 갇혔을 것이다. 사형제간의 비무에서 살수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위중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심지어 대련을 하는 두 사람은 그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태연하게 대련을 이어 가고 있다.
파아아앗!
조걸의 몸에서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아……!”
그 순간 남궁단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마침내 저 과격한 대련이 있어서는 안 될 사태를 빚고 만 것이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가슴께를 베인 조걸은 피를 줄줄이 흘려 대면서도 물러나기는커녕 되레 백천을 향해 짓쳐 달려들었다. 마치 대련 중에 상처를 입는 것 정도는 항상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듯이!
기세 좋게 달려든 조걸은 백천에게 가슴을 걷어차이며 바닥에 처박혔다. 얼마나 강하게 걷어차였는지 지켜보는 남궁단이 다 움찔할 정도였다.
“큭!”
조걸은 이번에도 두 눈에 독기를 품고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더 과격하게 백천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미쳤어.’
어느 쪽을 탓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지적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제 사숙에게 살수를 써 대는 저 조걸이라는 작자도 이상하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백천도 이상하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바로 옆에서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험천만한 대련이 펼쳐지고 있는데 실오라기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는 다른 이들이었다.
콰앙!
조걸이 다시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갔다.
“저, 저러다 죽는 것 아닙니까?”
다른 남궁세가 검수들도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그들은 저 매화도를 겪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그 머리로, 또 몸으로 충분히 이해한 이들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조차 이 수련은 섬뜩할 만큼 위험해 보였다.
“최소한…….”
그때 묵묵히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던 남궁도위가 입을 열었다.
“저들이……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는 알겠구나.”
“…….”
그 말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전 같은 수련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실전과 같은 수련을 하는 문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까딱하면 제자들이 병신이 될 수도 있는데 어느 미친놈이 살수 쓰는 훈련을 허락하겠는가?
하지만 이들은 그걸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니구나.”
“예?”
“봐라.”
남궁도위가 대련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대련을 지켜보며 중단세를 취하고 있었다. 딱히 이상할 것 없는 광경이었다. 중단세는 모든 검술의 기본이 되는 자세다. 정확한 자세로 잡념을 없애고 집중하는 수련은 남궁에서도 종종 이뤄진다.
그러니 저 광경도 이상할 게 없다.
저 두 사람의 몸에 사람 머리통만 한 쇳덩어리가 줄줄이 매달려 있지만 않다면 말이다.
‘저게 대체 몇 개야……?’
특히나 검 끝에 매달린 쇳덩어리의 수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쇳덩어리들을 얼마나 매달아 놨는지, 검이 커다란 망치로 보일 지경이다.
‘저걸 맨몸으로 버틴다고? 내력을 쓰고 있는 건가?’
아니, 아니다.
내력을 썼다면 저리 땀을 비처럼 쏟지는 않을 터. 저건 분명 근력으로 버텨 내고 있는 것이다.
‘근력으로 저걸…….’
저 쇳덩어리 무게를 다 합하면 그들이 들었던 바위보다 무거우면 무거웠지,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남궁 제자들은 그 바위의 무게를 버텨 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지경이었는데, 저들은 저만한 무게를 버텨 내면서 검으로 자세까지 잡고 있다.
어느 쪽이 더 어려운 수련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분히 검을 들고 있던 윤종이 제 옆에 선 당소소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소소야.”
“네?”
“시작한 지 얼마쯤 됐지?”
“반 시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흐음. 그럼 슬슬 그만해도 될까?”
“무슨 말씀이세요. 반 시진은 더 해야죠.”
“……좀 과한 것 같은데.”
“안 돼요. 아시겠지만 저는 특히 검수로서의 기초가 부실하거든요. 남들의 두 배 이상은 해야 겨우 따라갈 수 있다고요.”
“그건 아는데, 내가 왜 그걸 같이 해 줘야 하냐.”
“불만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윤종이 떨떠름한 눈으로 당소소를 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고는 어디 가셨는데? 사고한테 같이 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
“무슨 뻔한 소리를 하고 그러세요, 사형? 사고야 당연히 새벽부터 나가셨죠.”
“새벽부터?”
“네. 주변에 다른 사람 있으면 집중 안 된다고요. 아마 자정이나 돼야 돌아오실 거예요.”
“……내가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사고는 잠을 안 주무시나?”
“잠이야 당연히 자죠.”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사고니까요.”
“…….”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소소야.”
“네?”
“검 끝 반 치 내려갔다.”
“아악!”
당소소가 분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 광경을 혼이 빠진 듯 지켜보던 남궁단의 귓가에 신음과 같은 남궁도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궁도 기초를 강조한다고 생각했는데…….”
“…….”
돌아보니 남궁도위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다.
남궁도위에게 더 큰 충격을 안겨 준 건, 저 수련을 하고 있는 이가 다름 아닌 당소소라는 점이었다.
‘정말 화산은 이런 수련을 일상적으로 하는구나.’
굳이 청명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단련하고 있다. 그 증거로, 이들뿐 아니라 연무장 곳곳에서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자, 그럼…….”
구경할 시간을 준 청명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남궁세가의 검수들을 바라보았다.
“이 수련의 성과를 몸으로 확인해 봐야지.”
남궁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몸으로 확인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한 것이다.
‘대련인가?’
그가 반사적으로 제 허리춤에 찬 검을 움켜잡은 바로 그때였다.
“아아아악!”
조걸이 또다시 뒤로 나가떨어지더니 바닥을 굴렀다. 몇 번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애쓰던 그는 결국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끄응……. 망할 사숙 같으니…….”
남궁단이 마른침을 삼켰다.
‘화산정검!’
상대가 저 화산정검이라면 부족함은 없다.
소가주님께서 직접 나서기에는 부담스러운 면이 많으니, 저 화산정검을 상대하는 사람은 바로 남궁단이 될 것이다.
‘절대 쉽게 당하지는 않겠다.’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화산정검 백천을 상대로 우위를 잡기는 쉽지 않겠지만, 남궁세가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겠다는 다짐을 굳건히 세웠다.
그때 청명이 외쳤다.
“소소야!”
“네?”
한창 수련에 매진하던 당소소가 획 청명을 돌아보았다.
“왜요? 자세 잘못됐어요?”
“아니. 그거 다 두고 이리로 와 봐. 아, 검은 들고.”
“네.”
당소소는 몸에 두른 쇳덩어리를 대충 걷어내더니 청명을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왜요, 사형?”
“저 양반 보이지?”
“네.”
“상대 좀 해 줘라.”
“……네?”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 양반들이 화산의 수련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몸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으시단다.”
그 말을 들은 당소소가 이내 씨익 웃었다.
“아, 난 또 뭐라고.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청명이 엄지로 제 목을 주욱 그었다.
“조져.”
“예압!”
당소소가 생글생글 웃으며 남궁단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