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화. 어른이 된다는 건 말이다. (2)
다음 날.
“끄응…….”
남궁도위는 눈을 채 뜨기도 전에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 머리가…….”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어렴풋이 돌아왔다.
원래 있던 술은 금세 다 비웠었는데, 청명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가더니 양손에 술병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었다.
- 먹고 죽어야지. 야, 마셔. 마셔!
- 이, 이걸 다요?
- 왜? 못 먹어? 하여튼 이래서 샌님들이란! 쯧쯧.
- 머, 먹습니다! 왜 못 먹습니까!
“……그랬지.”
술기운도 올랐겠다. 너 한 모금, 나 한 모금, 너 한 병, 나 한 병…….
‘미쳤지.’
그걸 다 처먹었네, 그걸.
세상에, 물이었다 해도 다 못 마실 양이었는데, 그걸 다 먹었어.
“끄으으. 머리야…….”
숙취 자체야 가끔 경험해 보았지만, 지금 그에게 닥쳐 오는 두통은 지금까지 알던 숙취의 개념을 모조리 부숴 놓고도 남았다.
머리를 잡고 신음하던 남궁도위는 순간 매우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의문을 떠올렸다.
‘대체 그 술은 뭐로 만든 거지?’
무슨 재료로 만든 술이길래, 머리를 망치로 때려 대는 듯이 지독한 숙취를 느끼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 청명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골라 와도 하필 그런 술을 골라 왔단 말인가?
“어으…….”
머리를 움켜잡고 신음하던 그는 찌푸린 눈을 힘겹게 떴다.
‘아, 눈 부셔.’
반사적으로 눈 앞을 가린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햇살이 너무 따가워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
‘자, 잠깐. 눈이 부시다고?’
그는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창으로 환한 햇살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남궁도위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섰다.
“마, 망했다!”
해가 이리 뜨겁다는 건, 아침이 된 지 이미 한참 지났다는 의미. 당장 어제 가솔들에게 그렇게 정색했었는데, 다음 날 아침부터 그가 수련에 늦는다면 모두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기겁한 남궁도위는 재빨리 내력을 돌려 주독을 몰아냈다.
“옷! 내 옷!”
황급히 여기저기를 찾아보았지만, 도무지 겉옷을 어디다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방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마당에 옷의 행방이 떠오를 리가.
“미치겠네!”
여기저기 마구잡이로 뒤진 끝에 겨우 이불 밑에서 옷을 찾아냈다. 그는 얼른 옷을 걸치고 벼락 같은 속도로 의관을 정제한 후 밖으로 튀어 나갔다.
아니, 튀어 나가려 했다.
움찔.
문을 열기 전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
왜 깨우지 않았을까?
이른 아침부터 수련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수련에 나섰다면 당연히 남궁도위를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그럼 설마…….
남궁도위는 문고리를 붙잡은 채 망설였다.
남궁의 검수들이 아무도 수련을 하러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어제 그런 대화가 오갔는데, 남궁도위도 참여하지 않은 수련을 그들이 정말 자체적으로 진행하려 했을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고 있다. 어떤 광경을 본다 해도 실망해선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그가 바라는 것처럼 행동해 주기를 바라는 건 그저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그리 쉬운 것이었다면 실패한 지도자들이 존재할 리 없잖은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청명의 말대로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힘들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그러니 천천히 해 나가면 된다. 잘해 내고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언젠가는 가솔들도 그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다.
결심을 굳힌 남궁도위가 단숨에 문을 열어젖혔다.
이윽고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그는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다, 다들…….”
그가 거하는 방 앞에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말이다.
“아, 아니. 왜……?”
차마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 그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열한 이들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남궁단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기침하셨습니까?”
“……단.”
대표로 나선 그가 남궁도위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과하지 않지만 정중한 예의였다.
“여, 여기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당연히 소가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남궁도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남궁단이 그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사실은 먼저 가서 수련을 시작할까 생각도 해 봤습니다만…….”
“…….”
“의미가 없더군요.”
“……뭐가 의미가 없다는 거냐?”
“저 수련으로 강해지든, 그러지 못하든 소가주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남궁도위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소가주님. 저희는 남궁세가입니다.”
“…….”
“그리고 남궁세가는 오직 가주의 말을 따를 뿐입니다. 가주께서 명하신다면 그곳이 지옥의 불구덩이라 하더라도 미련 없이 뛰어들 것입니다.”
“남궁단…….”
“어제는 저희가 과했습니다. 그저……. 아니요.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죄송합니다!”
모두가 남궁도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소가주님께서 매화도 이야기를 하시는 순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소가주님께서는 남궁을 이끌 최선의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
“저희가 먼저 그 부분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아니, 아니다.”
남궁도위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 잘못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이 너희가 생각하는 최선이 아닐 수도 있지. 그러니 충분히 이야기하고 설명하고 같이 고민했어야 하는 건데……. 나는 그저 내가 앞서가면 모두가 그저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오만했지.”
“아닙니다, 소가주님.”
“그러니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부탁하마.”
남궁도위가 모두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지만, 나는 그래도 여전히 이게 남궁세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모두들 나를 믿고 따라다오.”
고개를 든 그는 모두를 바라본다.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선명했다.
“나 역시 너희가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가주가 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다.”
모두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소가주님!”
“그리 믿고 있습니다!”
남궁도위는 벅차 오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고맙다.”
새삼스레 알게 된다. 서로 생각이나 방식은 다를지 몰라도 추구하는 바는 같다는 것을.
그게 ‘가족’ 아니던가?
“가시죠.”
“그래.”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이들을 설득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이끄는 방법에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는 굳이 남궁황이 될 필요가 없다. 남궁황이 그에게 가르쳐 준 정신을 지켜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가자꾸나.”
“예!”
앞으로 나선 남궁도위가 남궁의 검수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더없이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끄으으으으…….”
“뒈, 뒈지겠다…….”
“죽여라……. 죽여! 죽…….”
“진짜 죽여 드려?”
“아, 아닙니다…….”
엎드린 채 등에 바위를 진 이들을 보며 청명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근데 이 새끼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지금 나랑 장난하냐? 단체로 수련을 빼먹어?”
“…….”
“심지어 소가주라는 새끼까지 같이? 이 새끼는 내가 받아먹은 게 있어서 적당히 대접 좀 해 주려고 했더니, 어?”
“…….”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남궁도위의 얼굴이 억울함으로 물들었다.
‘아니, 너 때문이잖아!’
누가 그에게 그 많은 술을 퍼먹였던가? 그걸 먹고 제정신으로 새벽에 벌떡 일어나면 그게 사람인가?
“뭐?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
“…….”
“야, 이 새끼들아! 그 말 한 새끼들은 싹 다 죽었어! 건너편에서 강기가 날아와도 같이 죽고 살자고 뭉칠 새끼들일세, 이거!”
“아, 아니…….”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이야. 남궁세가의 소가주쯤 되는 놈이 술기운 하나 못 이겨서 퍼질러 자지를 않나. 그걸 깨워야 할 놈들은 그걸 멍하니 기다리고만 있지를 않나.”
“…….”
“남궁황이 이거 봤으면 너희 대가리에 제왕검형 떨어졌을 거다, 이 새끼들아!”
“…….”
뭐랄까. 조금 전까지는 엄청 감동적인 기분이었는데…….
청명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았다. 일단 선대 가주가 이 꼴을 봤으면 모조리 다 박살이 났을 거란 말은 확실히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뭐?”
“아닙니다.”
남궁도위를 보는 가솔들의 시선이 조금 전이랑 미묘하게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남궁도위의 착각일까?
“너희들이 말귀를 못 알아 처먹는 모양인데.”
“…….”
“하루 빼먹으면 결국 열흘을 날리게 되는 게 수련이야. 수련을 쉬어야 할 핑계는 하루에도 수십 개가 넘어. 그걸 당연하다는 듯 입에 올리게 되는 순간부터 무인은 끝나는 거야!”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사파 새끼들이 쳐들어오나! 할 수련은 한다! 그게 기본이라고! 술 처먹고 뻗어서 수련 안 하는 새끼는 검 잡을 자격도 없어!”
그 순간 남궁단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뭐?”
“지, 질문…….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해 봐.”
“그……. 끄윽……. 꿱!”
쿵!
남궁단이 입을 여는 순간 그의 나머지 한쪽 팔이 후들거리며 풀렸다. 이내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청명은 별꼴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터덜터덜 다가가 남궁단을 깔아뭉개 버린 바위를 발로 차 굴렸다.
“흐억! 주, 죽는 줄…….”
“질문이 뭔데?”
“아, 예!”
남궁단이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화산검협! 이건 절대 반항이 아닙니다! 불만도 아닙니다.”
“사설 치우고.”
“예!”
남궁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이 수련을 하면 정말 우리는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뭐?”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그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이건 불만이 아니라니까요!”
“……계속해 봐.”
“예!”
남궁단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고는 말을 잇는다.
“물론 저희는 화산검협이 흑룡왕을 제압할 정도의 강자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남궁세가입니다.”
“그래서?”
“비록 비명에 돌아가시긴 했지만, 저희는 선대 가주님께서도 결코 화산검협에 뒤지지 않는, 아니 그 이상 가는 고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청명의 입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검수들은 청명이 기분이 상했다고만 생각했지, 비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단 사실은 몰랐다.
“그…래서?”
“지금 저희가 하고 있는 수련은 남궁세가에서 배운 것과 너무도 다릅니다. 한 가문의 무학을 숙련하는 법은 그 가문에서 가장 잘 아는 법 아닙니까? 그렇기에 저희는 가주께서 저희에게 시키지 않은 수련을 이리 과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청명이 손가락을 가볍게 튀겼다.
“이 훈련을 통해 세진다는 걸 못 믿겠다?”
“……정확하게는, 좀 더 확실하게 납득될 만한 근거가 있으면 저희가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거, 말 더럽게 꼬네.”
“……죄송합니다.”
남궁단이 속으로 욕을 했다.
그렇게 말할 거면 아까부터 한 대 팰지 말지 고민하는 듯 움찔대는 주먹이나 가만히 두든가!
“도장,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 남궁도위가 지고 있던 바위를 내려놓고 청명에게 포권 했다.
“이들은 제가 본 것을 모두 지켜본 이들이 아닙니다. 다짜고짜 따라오라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청명이 빤히 남궁도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진짜 확인하고 싶어?”
“……예?”
“그렇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뭐 나한테는 나쁜 게 아니지.”
“…….”
“따라와. 증명해 줄게.”
청명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병아리는 원래 자기가 병아리라는 걸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가자, 병아리들아. 그래도 이제 좀 닭 같아 보이는 놈들을 보여 줄 테니까.”
남궁의 검수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런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