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화. 어른이 된다는 건 말이다. (1)
꼴꼴꼴꼴꼴.
“크으으으!”
얼굴을 구겨 가며 호쾌하게 술을 넘긴 청명이 입가를 소매로 대충 훔쳤다.
“입에 쫙쫙 달라붙네. 크, 역시 강 보며 마시는 술은 운치가 있다니까.”
그러고는 제 옆에 앉은 남궁도위를 슬쩍 보며 말했다.
“왜 안 마셔? 술 안 좋아해?”
“아, 아뇨. 딱히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조금 어색해서…….”
남궁도위가 제 손에 들린 술병을 바라보았다. 명문 남궁세가의 엄격한 법도 아래 자라 온 그는 이리 술을 병째 마시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그들이 앉은 곳은 풀밭이니 그 어색함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격식을 따지지 않으니 마시기가 어려우시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청명이 피식 웃고는 다시 술을 꼴꼴 마셔 댔다.
“크으으으.”
입가를 다시 쓱 문질러 닦은 그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너 같은 애들이 나중에는 술고래 되더라.”
“……예?”
“우리 중에도 하나 있어. 소림 땡중 놈. 그 새끼 처음에는 어떻게 중이 술을 먹느냐고 입을 털어 대더니, 이제는 미쳐 가지고, 내 술을 훔쳐 먹는다니까?”
“……소림 땡중? 호, 혹시 혜연 스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새끼!”
“혜연 스님이 술을……. 그, 그것도 도장의 술을 훔쳐 마신다고요?”
“그래! 그렇다니까?”
청명이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지.”
“…….”
멍하니 청명을 바라보던 남궁도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냐?”
청명이 노려보니 남궁도위는 얼른 웃음을 갈무리하며 손을 내저었다.
“도장이 우스운 게 아니라 이 상황이 우스워서 그럽니다.”
“네가 뭘 알겠냐.”
청명은 한숨만 푹 쉬었다. 남궁도위는 쥐고 있던 술병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들어 입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청명처럼 꿀꺽꿀꺽 넘겼다.
“케헥! 케헤헤헥!”
“어쭈?”
“뭐, 뭔 술이! 쿨럭! 쿨럭!”
얼굴이 시뻘게진 그는 연신 기침을 토했다. 말 그대로 목을 태워 버릴 듯한 독주였다.
청명이 히죽 웃었다.
“이래야 술이지.”
“이, 이게 무슨 술입니까? 독이지!”
“쯧쯧. 이래서 귀한 집 자식들은.”
청명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래서, 못 먹어?”
“저는…….”
남궁도위는 잠깐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청명과 술병을 번갈아 보았다.
잠시 후 살짝 입술을 깨문 그가 술을 벌컥벌컥 넘기기 시작했다. 청명이 박수를 쳤다.
“오. 잘 먹는다.”
꼴꼴꼴.
“키야아. 술 먹을 줄 아네.”
꼴꼴꼴꼴.
“……어?”
꼴꼴꼴꼴꼴.
“그, 그만 마셔! 이 미친놈아!”
기겁한 청명이 남궁도위의 입에 물린 술병을 강제로 뽑았다.
“크하아아아악!”
마치 극독이라도 삼킨 사람처럼, 남궁도위는 양손으로 붉어진 목을 움켜잡았다.
“……남궁 새끼들은 하나같이 정도가 없냐?”
청명이 ‘그래도 옛날에는 이리 무식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고 중얼대는 와중에도 남궁도위는 정신을 못 차리고 기침했다.
잠시 후, 가까스로 기침이 멎은 그가 말했다.
“크……. 좋군요.”
“전혀 안 좋아 보이는데?”
청명의 물음에 남궁도위가 고개를 내저으며 손에 쥔 술병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건 술이 아니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사람들이 이런 걸 마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후후. 기분이…… 좋습니다, 도장.”
“너 혀 꼬인다.”
“…….”
남궁도위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몇 차례 저었다.
술을 마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몸에 열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내력을 운용해서라도 주기를 억누르고 빼냈겠지만, 지금은 굳이 그러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도장.”
“왜?”
“한 병 더 없습니까?”
“…….”
청명은 대답 대신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나한테는 이런 것들만 모이지?”
세상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면 그가 잘못된 것인가?
- 몰라서 묻냐?
“카아아아악!”
“갑자기 왜,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하늘을 한번 노려본 청명이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어, 취한다.”
남궁도위는 그 모습을 빤히 보다 넌지시 청명을 불렀다.
“도장.”
“왜.”
“……왜 저를 불러내신 겁니까.”
“응?”
남궁도위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냥 불렀는데.”
“예?”
“술 먹자고.”
“…….”
“마셔, 마셔. 인생 뭐 있나. 술이나 먹는 거지.”
청명에게 뭔가를 기대한 사람은 반드시 기대 이상으로 실망하게 된다. 화산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남궁도위는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하…….”
웃음과 탄식이 섞여 나왔다. 고개를 돌려 어둠이 내린 장강의 모습을 바라보던 남궁도위가 중얼거렸다.
“사실은…… 사실은 말입니다, 도장.”
“응?”
“저는 아직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
청명은 딱히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남궁도위는 이제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아니, 사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안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조금…… 무서웠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 안휘로 돌아가 버리면…….”
정말 가주가 되어 남궁세가를 이끌어야 한다.
남궁도위에게는 아직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적어도 최소한 이십 년은 뒤에 올 것이라 여겼던 일이 하루아침에 그의 앞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것도 정상적인 남궁세가가 아닌, 전력의 반 이상, 어쩌면 팔 할 이상을 상실해 버린 남궁세가의 가주가 된다는 막대한 중임이.
남궁도위가 자조하듯 말했다.
“조금 전에 저는 화를 냈습니다.”
“…….”
“제 마음 같지 않다고 화를 냈습니다. 왜 나를 믿고 따라 주지 않냐고 실망한 척을 했습니다.”
남궁도위는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저들에게 난 화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아니었습니다. 제가 정말 화가 난 건…… 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어쩌면 저들보다 더 겁에 질려 있는 제 모습이었습니다.”
“흠.”
그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듯 말했다.
“어렵습니다, 도장. 너무 어렵습니다. 아직 제게는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
“적어도 제게 이십 년만……. 아니, 십 년만이라도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랬다면 조금 더 단단할 수 있었을 텐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흐으음!”
말이 없던 청명이 돌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남궁도위를 향해 맹렬히 시선을 돌렸다.
“……도장!”
눈이 마주치자, 남궁도위의 마음엔 묘한 기대감이 피어났다.
어쩌면 모자라다 질책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만하면 훌륭하다 다독일지도 모른다.
그 어떤 쪽이든 좋았다. 지금 남궁도위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평가하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가 선택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이 화산검협이라면, 그를 이끌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
“예.”
청명이 턱짓으로 남궁도위 너머에 있는 술병을 가리켰다.
“그 옆에 술병 좀 줘 봐. 그거 남았을 거야.”
“…….”
“뭐 해?”
“술……요?”
“그래, 그거.”
“…….”
“얼른.”
“네…….”
맥이 탁 풀린 남궁도위는 실없이 웃어 버리고는 술병을 청명에게 건넸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누구도 조언해 줄 수 없다. 이 상황에서 남들이 늘어놓을 수 있는 건 그저 뻔한 말일 뿐. 결국 모든 것은 그저 그가 버텨 내고 해결해야 한다.
그걸 알고 있는데…….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술병을 입에 꽂은 청명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힘차게 왕복했다.
꿀꺽! 꿀꺽! 꿀꺽!
“크으으으으으!”
술병을 입에서 뽑아낸 청명이 기분 좋은 탄성을 뱉으며 술병을 내려놓았다.
“거, 듣자 하니 재밌는 소리를 하는데.”
그는 남궁도위를 보며 혀를 찼다.
“십 년 뒤에 겪었으면 뭐가 달라졌을 것 같냐?”
“……예?”
“이십 년 뒤에 겪었으면 뭐가 좀 더 쉬웠을 것 같고?”
“그건…….”
“아서라, 꼬맹아.”
손을 휘휘 저으며 청명이 한숨처럼 말했다.
“나이가 들면 세상이 쉬워진다는 건 착각이야. 내가 나이를 먹어보니 그렇지가 않더라고. 되레 어릴 때보다 머릿속만 복잡해져.”
“도, 도장?”
나이를 먹어 보니?
“하. 어릴 때라니. 까마득하네.”
“…….”
이 인간이 지금 나를 놀리나?
남궁도위는 기가 막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멍하니 보았다. 그때 청명이 담담하게 물었다.
“남궁황에게는 모든 게 다 쉬웠을까?”
그 말에 남궁도위의 몸이 덜컥 굳었다.
“……아버지께서는…….”
반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이어진 청명의 말이 남궁도위의 입을 닫게 했다.
“네가 아는 네 아버지는 정말 그렇게 쉽게 쉽게 살던 사람이었나?”
“…….”
“아니지. 아니겠지. 그 양반이 쉽게 살았다고 하는 건 그 양반에 대한 모독이지.”
그래. 그럴 리가 없다.
남궁황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고 최선을 다했으니까. 때로는 실수하고, 또 때로는 실패할지언정, 언제나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던 사람이었다.
“그럼 지금 여기에 남궁황이 있었으면 뭐가 크게 달랐을까?”
“…….”
“아닐 거야.”
청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상황은 조금 나아졌을지도 모르지만, 네 아버지가 겪어야 할 고민도 네 고민에 비해 결코 작지는 않았을 거다. 너보다 더 많은 기대와 더 많은 책임을 짊어져야 했을 테니까.”
“…….”
“사람은 그저 사람일 뿐이야. 칼에 찔려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고, 심장이 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없지. 더없이 강해 보이는 이도 똑같이 아프고, 똑같이 상처받아.”
남궁도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데, 꼬맹아. 어른이 된다는 건 말이다.”
“예.”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할 줄 알게 되는 거야.”
남궁도위가 눈을 감았다.
그의 앞에서 길을 뚫던 남궁황의 모습이 생각났다.
그래. 아팠겠지. 고통스러웠겠지. 몸도, 마음도.
하지만 그는 아파할 수 없었고, 고통스러워할 수 없었다. 그의 등 뒤에 남궁도위가 있으니까. 매화도에 그가 지켜야 할 이들이 있으니까. 그만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무언가를 짊어진다는 건…… 그런 거지.”
“…….”
“아픈 게 당연하고, 힘든 게 당연해. 아니, 아파야 하고 힘들어야 하는 거야. 더 많은 것을 짊어지고 한 걸음이라도 더 이끌려고 하는 이에게 편안한 시간 같은 건 영원히 오지 않아.”
청명이 술을 들이켰다.
장강 위에 머무른 그의 시선이 어느새 먼 과거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의 시선은 이내 뒤편에 있는 장원으로 향했다.
화산의 모두가 거하는 그곳으로.
“나는 잘 모르지만…….”
청명이 남궁도위를 똑바로 보았다.
“분명 네게 있을 거야. 남궁황이 준 무언가가. 그가 필사적으로 후대에 전한 게.”
남궁도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있다. 그래, 분명히 있다.
남궁황은 그에게 분명히 전했다. 남궁의 검이 무엇인지를.
제왕의 검이란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앞에서 지켜 내는 것이라는 걸.
적을 막아 내고 역풍을 뚫어야 하는 이가 어떻게 힘겹지 않을 수 있고, 고민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냥 그거면 돼.”
“…….”
“네게 필요한 건 이미 전해졌어. 그게 이어 간다는 거지.”
“도장.”
“그래도 모르겠으면 생각해 봐.”
“무엇을 말입니까……?”
청명이 씨익 웃었다.
“네가 후대에 전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말이야.”
“…….”
“그게 네가 가야 할 길일 거야.”
남궁도위는 한참을 말없이 청명을 보았다. 그러다 장강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강에 남궁의 넋이 흐르고 있다.
그들은 남궁도위가 어떤 삶을 살기를 바랐을까?
“도장.”
“응?”
한참을 침묵하던 남궁도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글쎄. 내가 뭐 그런 것까지는 알 수 없지만, 너는 좋은 가주가 될 것 같긴 해.”
“……예?”
청명이 뒤쪽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불만을 말한다는 건 그 사람을 믿는다는 뜻이거든. 모두에게 신뢰받는 이가 좋은 가주가 되지 못할 리 없지.”
남궁도위가 청명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소가주님!”
“소가주님, 어디 계십니까!”
두고 나온 남궁의 검수들이 다들 밖으로 나와 그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저…….”
뭔가 말하려던 남궁도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고개가 아래로 천천히 떨구어졌다. 이윽고 그의 어깨는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청명은 그 양을 보며 미소 지었다. 달빛처럼 희미하고도 따뜻한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마시자, 꼬맹아.”
“……예, 도장.”
장강의 밤이 깊어 갔다.
옅은 주향과, 짙은 풀 냄새, 그리고 불어오는 강바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