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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06화 (1,007/1,567)

1006화. 새삼스럽게. (6)

새파란 기운을 실은 목검이 강맹하게 허공을 갈랐다.

“검을!”

빠아악!

“그따위로 휘두르니까!”

빠아악!

“처맞고 다니지!”

빠아아악!

“대가리, 이 새끼야! 대가리! 대가리가 비었잖아!”

철푸덕.

맥없이 엎어진 남궁세가 검수들의 머리에서 새하얀 김이 솟았다.

“쯧.”

움찔움찔 경련하는 이들을 바라본 청명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이 새끼들이 다 칼질하는데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고! 어디서 손목을 휘휘 돌리고 자빠졌어? 콱 뒈지려고!”

그 광경을 감탄하며 지켜보던 조걸이 백천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저건 뭔 뜻입니까, 사숙?”

백천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상세한 풀이를 해준다.

“스스로 지켜야 할 검로도 제대로 안정시키지 못한 이들이 어디 화려한 변초를 구사하려 드느냐. 기본부터 다시 배워라……라는 뜻이다.”

탁월한 통역사의 능력에 조걸은 연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는, 어? 이 새끼들아! 칼 휘두르기 전에, 어? 이 새끼들아! 어? 하여튼 요즘 것들은!”

조걸이 다시 물었다.

“저건요?”

백천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해 주었다.

“나 때는 화려한 변초보다는 실속 있는 기본에 충실했는데, 요즘 강호 검수들의 경향이 너무 외양에 치중된 것 같아 걱정이 크구나……라는 뜻이다.”

“…….”

청명이 들고 있던 목검을 바닥에 획 집어 던졌다.

“너희들은 내일부터 뒈졌다고 복창해라. 어떻게 된 새끼들인지, 파면 팔수록 뭐가 더 나와! 윗대가리들은 좀 나은 것 같더니, 아랫놈들은 아주 형편이 없네! 오냐, 내가 아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져 준다!”

“……저건요?”

“크흠. 이건 좀 긴데.”

백천이 나직이 헛기침하고는 입을 열었다.

“내 본디 남궁세가의 선대를 존중하고 검법을 숭앙했건만, 남궁의 젊은 검수들은 그 윗대의 가르침을 올바로 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소. 비록 피를 이은 관계는 아니지만, 검이라는 길을 함께 가는 사람으로서 그 기본을 다지는 데 도움을 드리겠소……라는 뜻이다.”

“……사숙.”

“응?”

조걸이 뭔가 떨떠름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쯤 되면 꿈보다 해몽 아닙니까?”

“진짜 그 뜻 맞다니까…….”

“…….”

영 불신 어린 눈으로 청명과 백천을 번갈아 보던 조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사숙 말만 들으면 뭔가 훌륭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제 눈에는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두들겨 패고 있는 걸로 보이죠?”

“왜긴.”

“예?”

“그게 맞으니까 그렇지.”

“…….”

백천과 조걸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남김없이 널브러진 남궁세가의 검수들 사이에 홀로 선 청명은 뭐가 자꾸 마음에 안 드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저 꼴 보고 있으니 위장이 다 아프다.”

“저는 어제 악몽 꿨습니다.”

“남이 당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치 떨려.”

확실히 이 광경은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저 무시무시한 목검에 얻어터질 때마다 괜스레 머리 한중간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저기, 사숙.”

“응?”

윤종이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제 볼을 긁적였다.

“저는 좀 걱정되는 게…… 남궁세가 분들이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건 무슨 말이냐?”

“아니……. 저희야 워낙에 가진 것도 없고,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야 강해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딱히 불만 없이 따라간 거지만, 저분들은 자존심이 있을 텐데.”

“자존심?”

백천의 얼굴이 미미하게 뒤틀렸다. 그러자 윤종이 아차 하는 얼굴로 입을 합죽 다물었다. 조걸이 때를 놓치지 않고 깐족거렸다.

“거, 사형 지금 사숙 욕하는 겁니까?”

“조, 조용히 해, 인마!”

“자존심이라…….”

백천이 먼 산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걸 따지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지.”

윤종이 가만히 백천의 어깨를 다독였다.

“울지 마십시오.”

“……안 울어.”

눈 밑을 살짝 훔친 백천은 표정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처음에야 반발심도 들겠지. 내가 뛰어나다고 믿었던 사람은 그 믿음이 무너졌을 때 오는 절망감도 그만큼 크니까.”

“경험담인가요?”

“경험담.”

“크으, 생생한 것 보소.”

“……닥치라고.”

백천의 이마에 핏대가 돋자 오검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휘파람을 불어 댔다.

죽일 듯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던 그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저들도 결국에는 받아들이게 될 거다.”

“……그게 옳다는 걸 알게 되는 거군요.”

“아니.”

“네? 그럼……?”

“안 받아들이면 더 맞으니까.”

“…….”

모두가 멍한 눈으로 백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하는 거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받아들이든가 뒈지든가 둘 중 하나면 받아들여야지. 뭐 별수 있겠어?”

윤종은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띤 채 생각했다.

‘이 양반이 제일 이상해.’

그리고 다른 오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 * *

숙소로 돌아온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철퍼덕철퍼덕 엎어졌다.

“끄으…….”

머리가 땅에 닿기만 하면 눈 깜짝할 새에 잠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몸이 바닥에 닿는 순간 전신에 어마어마한 격통이 밀려왔다.

“팔……. 아으……. 내 팔…….”

“끄……. 허, 허리……. 허리가 부러질 것 같…아.”

“우우우웨에…….”

“여, 여기서 토하지 마!”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바닥에 불가사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던 남궁단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끄으응.”

마치 몸이 조각조각 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친 짓이야…….”

“이걸…… 이걸 대체 어떻게 합니까?”

“강해지기도 전에 몸이 먼저 축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정이 격해지지 않아서 목소리가 커지지 않는 게 아니었다. 화를 낼 기력도 남지 않아서 조곤조곤 말을 해 대는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수련입니까? 그냥 괴롭히기지!”

“맞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합니까!”

하지만 사람이란 반 죽어 가는 와중에도 분노만은 버릴 수 없는 존재인지, 가면 갈수록 검수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남궁세가에는 남궁세가의 방식이 있잖습니까!”

“가주님께서 이걸 보셨다면 과연 용납하셨겠습니까?”

“저들은 우리를 거의 종놈 보듯 하고 있습니다. 타문의 제자를 이리 대하는 법도는 강호에 없습니다!”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진정하거라.”

모두의 시선이 입을 연 이에게로 쏠렸다. 입구 쪽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는 남궁도위였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었다.

“소가주님.”

“힘든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이겨 내야 할 일이다.”

모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이런 수련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수련이야 도움이 될 수 있지요. 하지만 저자의 태도는 너무도 오만불손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가주님조차도 저희를 저런 식으로 막 대하지는 않았었습니다.”

“다들…….”

“소가주님.”

남궁단이 불만 어린 눈으로 남궁도위를 응시했다.

“소가주님께서 대표로 말씀을 해 주시면 안 됩니까?”

“……내가?”

“예. 수련이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진짜 참을 수 없는 것은 모멸감입니다.”

남궁도위는 대답 대신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스승으로 받들어 사사받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그저 저희에게 모자란 것을 화산을 통해 배우는 것뿐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소가주님.”

남궁단은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남궁도위를 향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어떤 스승도 자신의 제자를 이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습니다.”

점차 남궁도위의 얼굴이 굳어 갔다. 하지만 흥분한 남궁단은 그런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건 저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궁세가가 화산에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남궁의 체면이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럴 때는 소가주님께서 나서 주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화산이 저희 남궁을 얕잡아 보지 않는다면 이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가주께서 계셨다면 저들이 과연 이리 방자하게 나올 수 있었…….”

“그만! 그만해라!”

그때, 남궁도위의 입에서 짧지만 커다란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소가주님!”

“……소, 소가주님?”

당황한 남궁 검수들이 멍하니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더 불만을 쏟아내려던 이들은 얼음장처럼 굳은 그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말없이 모두를 노려보던 남궁도위의 입이 열렸다.

“체면?”

“…….”

“모멸감?”

남궁도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구나. 나만 몰랐구나.”

신랄한 조소가 밴 목소리였다.

“아직 남궁에 모멸감을 느낄 자존심이 남아 있고, 체면을 고려할 만큼의 입지가 있단 걸, 나 혼자만 몰랐어. 모두가 아는데 말이야.”

“……소가주님.”

“나는…….”

남궁도위가 모두를 돌아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런 것은 모두 매화도에 두고 온 줄 알았다.”

“…….”

“그곳에서 죽어 간 이들과 함께 모조리 버리고 온 것이라 생각했다.”

남궁의 검수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말이 옳든 그르든,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남궁도위의 눈을 마주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니로군. 두고 온 것은 나뿐이었어. 그곳에서 죽어 간 이들이 후회하지 않도록 진흙을 씹어 먹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남궁을 부활시키겠다고 다짐한 것은 나 혼자였구나.”

“소가주님, 그건…….”

“부디 지켜 내길 바란다.”

남궁단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남궁도위가 냉정한 목소리로 칼같이 끊었다.

“너희의 자존심도, 체면도 말이다. 매화도에서 죽어 간 분들이 목숨으로 지켜 낸 게 정말로 그것이었다면 어떻게든 지켜 내야 하지 않겠느냐?”

남궁도위는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 어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남은 이들은 황망한 눈으로 그가 박차고 나가 버린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런 말은 왜 하셔서…….”

“그럼 나 때문이란 말이냐?”

고성이 오갔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모두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한편 밖으로 나온 남궁도위는 먼 하늘을 응시했다.

검게 물든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별이 비처럼 쏟아져 내릴 듯했다. 평소라면 그 풍광에 감탄했겠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그는 그 어떤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했다.

‘어렵구나.’

쉽지 않다. 갈 길은 멀고, 해야 할 것은 많은데 모두가 그의 마음 같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진심을 다하면 저들도 받아들여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헛된 바람일 뿐이었는가?

“아버님…….”

새삼스레 남궁황을 떠올린 그가 길게 한숨을 쉬려던 바로 그때였다.

“음?”

등 뒤에서 뭔가 날아오는 기척을 느낀 남궁도위가 격하게 몸을 틀었다. 그리고 재빨리 손을 뻗어 얼굴께로 날아드는 무언가를 잡아챘다.

“……술병?”

손에 잡힌 건, 흰 술병이었다. 남궁도위는 제 손에 들린 걸 멍하니 보다 고개를 들었다.

전각 처마 위에, 이제는 익숙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도, 도장?”

“어, 나다.”

“거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런 건 됐고. 어때?”

어리둥절해하는 남궁도위를 향해, 청명은 제 손에 들린 술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한잔?”

“…….”

남궁도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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