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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05화 (1,006/1,567)

1005화. 새삼스럽게. (5)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꼭 얻어야 하는 게 있다면, 무언가를 잃을 각오도 해야 하기 마련.

그리고 이 선택의 순간은 문파의 발전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찾아온다.

문파의 미래를 위해서는 제자들을 키워 내야 한다. 그리고 그 제자를 가장 잘 키워 낼 수 있는 건 누가 뭐라 해도 그 문파에서 가장 강한 이들이다.

물론 경지가 높다 해서 반드시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위 말하는 ‘아니, 그걸 왜 못해?’가 벌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일반적으로는 경지가 높은 이가 더 좋은 스승이 될 수밖에 없다.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이가 아래에서 오르는 이들에게 더 편한 길을 가르쳐 주기 용이한 것과 같은 이치다.

문제는 시간이다. 시간은 유한하니까.

높은 곳에 오르는 건 그만한 대가를 요구한다. 더군다나 무학이라는 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더 가팔라진다. 그러니 자신의 경지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시간과 심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공기가 희박할 만큼 대단한 험지에 오르는 건 대체로 산에 이골이 난 이들인데, 그런 그들도 정상에 오르기 직전엔 쓰러지는 동료에게 함부로 손을 내밀지 못한다. 까딱하다간 자신 역시 쓰러질 걸 알기 때문이다.

“끄으으으으…….”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동공이 제멋대로 풀리고, 입이 절로 벌어져 침이 줄줄 새어 나온다.

하지만 쓰러질 수가 없다.

“넘어져 봐.”

“…….”

“기대하고 있으니까 제발 좀 넘어져 봐.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남궁단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있는 대로 힘을 밀어 넣었다. 하지만 이 망할 몸뚱이는 도무지 말을 들어 주질 않았다. 힘을 주려 해도 마치 태풍을 맞은 갈대처럼 이리 휘청, 저리 휘청댈 뿐이었다.

“쯧쯧. 거 다리 돌아가는 거 봐라. 검수라는 새끼가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못 다루니, 원.”

물론 저 지적은 정확했다. 검이란 결국 손에 쥐고 몸을 움직여 쓰는 것이다. 정확하게 검을 쓰기 위해서는 몸부터 우선 정확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남궁단에게도 변명거리는 있다.

‘이 미친 새끼야! 이 상황에서 어떻게…….’

“오? 넘어간다? 넘어간다?”

“끄으으으으으으으.”

남궁단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등에 얹힌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기우뚱 기울었다.

“쯧쯧.”

청명이 그 꼴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하여튼 요새 것들은 강단이 없어요, 강단이. 나 때는 이만한 바위는 산길 오르면서 놀이 삼아 굴리고 올라갔는데!”

‘그게 말이 되냐, 이 미친 새끼야!’

줄줄 흐른 땀이 눈으로 스며 따끔거렸다.

바위만 메고 있는 거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남궁단의 몸에는 커다란 철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바위를 업고 내력도 쓰지 않고 버티라고 하니 죽을 맛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뭐? 의지?”

“…….”

“하여튼 어린 새끼들이 입만 살아 가지고. 정신력이 뭐 싸울 때 칼날에 바르는 독쯤 되는 줄 아나? 갑자기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 주게? 의지력은 이럴 때 쓰는 거예요, 이럴 때. 평소에 수련하다가 진짜 숨이 넘어가겠다, 이러다 기절하겠다 싶을 때! 그때 딱 일각 더 버티는 게 정신력이라고.”

“끄으…….”

“그러니 말만 하지 마시고 그 정신력을 보여 주시면…….”

쿠웅!

청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궁단의 옆에서 버텨 내던 한 사람이 앞으로 엎어졌다.

게거품을 문 그의 근처로 바윗덩어리가 돌돌 굴러간다.

“……아주 염병을 하네. 조교!”

“예!”

“위치로!”

“예!”

그새 달려온 조걸과 윤종이 바닥에 쓰러진 이를 잡아 질질 끌고 갔다.

의약당에 가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수련을 버텨 내지 못한 이들은 의지 강화 특별 훈련에 투입된다. 저들은 오늘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열심히 한다고 입으로 떠드는 거야 누가 못 해? 열심히 하는 건 주둥아리가 아니라 몸뚱어리여야지. 안 그래?”

남궁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그가 청명의 말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심각하게 반발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런 수련이 대체 검술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그와 동일한 생각을 한 이가 등에 짊어진 바위를 내팽개치고 청명에게 대들었다가 단숨에 걷어차여 장강까지 날아가는 것을 본 이후, 남궁단은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정신력 타령 하는 새끼치고 오래 살아남는 놈 못 봤다, 이 새끼야. 사흘 밤낮을 싸우다 보면 나중에는 검을 잡은 손이 아니라 모가지가 후들거려요. 무인이라 체력이 좋은 건 서로 마찬가지야. 마지막에 버틸 수 있는 해 주는 건 평소에 쌓아 놓은 수련 한 번이라고.”

“…….”

“정교한 검술? 정순한 내력? 그런 건 너희들 수준에 논할 게 아니고. 어디 뛰지도 못하는 것들이 날아다니려고 해. 그냥 닥치고 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를 수 있게 되는 게 우선이지.”

남궁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매화도 사태를 겪지 않았다면 청명의 말을 개소리라고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매화도에서 느꼈다. 지금 청명이 하는 말에 틀린 게 없다는 것을.

전투가 지속된 지 사흘이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검술이고 나발이고가 없었다. 일단 눈에 뭔가가 보이면 반사적으로 찌르고 보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 수련도 그런 것까지 고려한…….

“아, 애들 피똥 싸는 것 보니까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네. 낄낄낄낄.”

“…….”

그럴 리가 없지. 저 마귀 같은 놈이 그럴 리가 없어.

“어허. 또 다리 넘어간다. 힘줘라.”

“끄으으으으으.”

울고 싶었지만, 수분이 바짝 말라 버린 눈에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

남궁명은 집채만 한 바위를 짊어진 채 끙끙대고 있는 남궁세가의 젊은 검수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

심지어 가장 선두에 있는 남궁도위는 남들의 두 배쯤 되는 바위를 짊어지고 이리저리 휘청이고 있었다.

“이게 뭔…….”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듯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남궁명의 귓가에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스러우신 것 같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저건…….”

남궁명의 곁에 선 운검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히 괴롭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저건 화산의 제자들도 다 거쳐 온 과정입니다.”

“……저걸요?”

“예.”

운검이 쓰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 일단 지켜보십시오. 저 아이가 직접 나선 만큼 효과는 확실할 테니까요.”

“아니…….”

남궁명은 그래도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단 얼굴로 훈련 과정을 바라보았다. 운검은 더 말하는 대신 나직이 웃었다.

‘곧 알게 되겠지.’

그리고 아쉬워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 말이다.

지금 매화도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 나이가 많이 찬 이들은 저곳에 끼지 못한다. 애초에 적당히 나이가 찬 이들은 청명이 모조리 빼 버렸으니까.

단순히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에, 나이가 든 이들을 가르치기 불편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사고와 근골이 굳어 버린 이들은 발전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들을 끌고 가는 것은 서로에게 고행이 될 뿐 효과가 크지 않다.

그러니 아직 육체와 정신이 말랑말랑한 이들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남궁의 미래를 위해 더 낫다 판단했을 것이다.

‘하긴 아쉬운 건 이 사람뿐만이 아니지.’

운검 역시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적어도 백자 배라도 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아쉬운…….’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콰앙!

그때 청명이 남궁단을 가차 없이 걷어찼다.

“허리를 펴라니까! 허리를!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너 지금 나하고 한번 해보자는 거냐? 이놈의 팔자, 이제는 남궁 새끼들까지 속을 썩이네! 일어나, 이 새끼야! 넌 오늘 두 배다!”

“…….”

아니. 역시 사람은 나이를 적당히 먹는 게 좋은 것 같다.

적어도 저놈과 어울리려면 말이다.

무학 역시 마찬가지.

스스로 정진하며 끝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순식간에 녹슬고,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입마로 화를 당할 수도 있는 곳이 절대강자의 세계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문파에서 강자들을 배려한다.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무학에만 전념해서 문파의 이름을 빛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다 보니 한 문파의 제일고수라 불리는 이들은 겨우 두엇의 제자에게만 자신의 무학을 전승할 뿐, 까마득한 아래에 있는 제자들을 웬만해선 대면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이 문파를 위한 길이고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명문이란 그렇게 소수의 절대강자와 그 뒤를 받치는 우수한 제자들이라는 구성으로 강호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이들이다.

하지만…….

“팔자 좋은 새끼들.”

여기, 그런 신선놀음에서 완전히 배제된 인간이 있다.

청명은 이를 빠득빠득 갈아붙였다.

전인미답……. 아니, 천마가 있으니 전인미답이라는 말은 좀 민망하다. 여하튼 높다 못해 거의 하늘에 닿아 버릴 수준의 경지에 오르고도 어이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다시 확보해 버린 인간, 그게 바로 청명이다.

자신의 무학을 쌓는 것뿐만 아니라, 칠칠치 못한 어린 제자들의 콧물을 손수 닦아 가며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칠 시간을 얻어 버린 불행한 인간…….

과거의 매화검존은 아랫대에 딱히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형제한테도 모자라다고 구박해 대는 그의 눈에, 무위가 한참은 떨어지는 명자 배 따위가 눈에 찰 리 없었다. 그 아래 배분? 말할 필요도 없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 청명의 눈으로 보았던 화산이란, 지극히 위대한 장문인 청문과 머리만은 돌아가는 어설픈 놈 청진, 그리고 그 외 그나마 어떻게든 써먹을 구석이 조금은 있는 청자 배 몇몇을 제외하면 굴러다니는 돌덩어리나 다름없는 것들로 채워진 문파였다는 의미다.

훗날 그 인식을 얼마나 후회했는지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어쨌든 청명이 백 년 뒤로 날아와 처음 화산을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겠는가?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예전이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꼬꼬마들을 어떻게든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검수로 키워 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까지 화산의 제자들이 해 온 수련은 전쟁 이전에 화산제일의 검수이자 천하제일검수였고, 마교와의 전쟁을 치르느라 수많은 실전으로 제 무학을 바닥부터 갈아엎은 청명이 오직 제자를 쓸 만하게 키우겠단 일념 하나로 만들어 낸 체계라는 의미다.

그 효율을 입으로 말해 무엇하겠는가?

경지가 비슷한 다른 대종사들이 문파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무학을 창안할 때, 청명은 어떻게 하면 이 머저리들의 쥐톨만 한 재능을 조금이라도 더 이끌어 내고 뽑아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다른 고수들이 강대한 힘을 천하에 과시할 때, 청명은 검을 어떻게 쓰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에게 자신이 감각으로 알고 있던 것을 어떻게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날을 지새웠다.

그렇기에 그가 만들어 낸 수련 체계는 버텨 낼 수만 있다면 말도 안 되는 효율을 자랑한다. 냉정하게 삼류에도 미치지 못했던 문파였던 화산의 제자들을 불과 몇 년 만에 강호 정상급 검수로 키워 낼 만큼 말이다.

그래, 버텨 낼 수만 있으면.

버텨 낼 수만 있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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