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화. 새삼스럽게. (4)
장강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 붉은 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장원의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확실히…… 남궁세가와 널브러진다는 말은 괴상할 만큼 안 어울렸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남궁도위가 멍한 얼굴로 주위를 돌아본다. 가솔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럴 만하지.’
패배가 충격적인 건 아니다. 딱히 자존심이 상할 것도 없다.
화산은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문파가 되었으니까. 아무리 그들이 남궁이라고 해도 화산에 패한 것으로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 때문이다.
단 한 사람도 이겨 내지 못했다.
차라리 모두가 명예를 알지 못하는 무뢰배들이었다면 그깟 신법 대결에서 패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목청을 높일 만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수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남궁의 검수들이었다.
‘충격이겠지.’
아무리 배분 높은 이들은 부상이 심해 수련에서 빠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충격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무참하게 패배시키고도 숨 하나 헐떡이지 않는 화산파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어리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풉!”
“…….”
“푸웁…….”
남궁도위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분명 이 상황은 그가 바랐던 것임에도, 양손으로 입을 가린 청명의 동그란 눈이 휘어 있는 꼴을 보자니 저 깊은 곳에서부터 뭐라 말할 수 없는 빡침이 치밀었다.
“으헤헤헤헤헷!”
결국 보다 못한 백천이 점잖게 청명을 타일렀다.
“청명아.”
“응?”
“패한 자를 비웃는 것은 무인의 도리가 아니다. 그만하거라.”
“오. 동룡이 이겼다고 자비 베푸는 것 보소.”
“……그게 아니라…….”
“아니긴. 입술 실룩거리는 거 다 보이는데? 왜, 솔직하게 ‘남궁세가 놈을 별것도 아니네. 차라리 종남 놈들이 더 나을 듯?’ 하고 웃어 보시지?”
“…….”
남궁도위가 멍하게 백천을 바라보았다.
저기, 도장? 왜 반박은 안 하시고 고개를 돌리십니까? 지금 표정을 저희한테 보이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도장?
청명이 피식 웃고는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뭐 싱겁긴 했지만.”
“…….”
“우리가 이겼으니 이제 불만은 없겠지?”
당연히 불만이 없어야 했다. 어쨌거나 이건 정정당당한 승부였고, 그 승부에 응한 것은 남궁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꼭 온당하게 흘러가는 건 아니다.
“호오?”
청명은 자신을 불만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 할 말이라도?”
“…….”
남궁단은 떨떠름한 얼굴로 청명을 응시하다 말했다.
“불만이라기보다는…….”
“응?”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이해 못 하겠습니다.”
“엥?”
청명이 눈을 끔뻑였다. 남궁단은 착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희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수련해 왔습니다. 침식을 잊고, 쉬고 싶은 마음을 이겨 가며 스스로 몰아붙여 왔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남궁세가의 검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데…… 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남궁단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오히려 매화도를 겪기 전이었다면 인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화도를 겪은 뒤라 더더욱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희는 이미 힘이 없는 이가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온몸으로 겪어 알게 되었습니다. 승부에 대한 의지는 그 어떤 문파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
때문에 이번 승부에서도 그들은 전력을 다했다. 단순히 오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남궁세가를 다시 예전처럼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그들이 누구보다 노력해야 함을.
그런데도 이런 처참한 패배를 맞이했으니 속이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희의 무엇이 잘못된 겁니까?”
남궁단은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물었다. 자연히 힘이 실린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사라면 누구나 가슴이 동할 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청명의 반응은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뭐래.”
그는 귀를 휘휘 후비더니 입으로 훅 불었다.
“…….”
노골적으로 심드렁한 반응에 기죽은 남궁단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오검은 그런 그를 안쓰럽기 짝이 없단 얼굴로 바라보았다. 승리자의 입장에서 즐길 수도 겠으나, 그들 역시 수없이 겪어 본 일이다 보니 감정이입이 먼저 되는 것이었다.
그때 청명이 손가락을 까닥였다.
“야.”
“예?”
“너 나와 봐.”
남궁단은 터덜터덜 걸어 청명의 앞으로 향했다.
“가까이 와 봐.”
“…….”
더 다가가 청명의 바로 앞에 선 남궁단이 의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청명이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지금부터 내가 네 머리를 때릴 거야.”
“예?”
“막아 봐.”
“…….”
“말도 해 줬고, 의지도 있으니 당연히 막을 수 있지? 안 그래?”
순간 남궁단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사람을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아무리 청명이 흑룡왕을 이길 정도의 강자라고는 하지만, 때릴 위치를 말해 주고 어떻게 공격할 건지도 뻔히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걸 못 막는 게 더 이상하다. 내력으로 찍어 누를 것도 아닌데!
“좋…….”
쿠우우웅!
털썩.
“단아!”
“아이고! 남궁단!”
뒤쪽에 있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기겁하며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그리고 거품을 물고 쓰러진 남궁단을 재빨리 일으켜 세웠다.
“괘, 괜찮으냐?”
“죽은 것 같은데?”
“머리에서 종소리가 났어!”
청명이 그 꼴을 지켜보다 혀를 찼다.
“쯧쯧쯧.”
모두를 보는 눈에 한심하단 빛이 가득했다. 그의 입에서 일침이 쏟아졌다.
“의지?”
“…….”
“미친놈들이 돼먹지도 못한 말을 막 지껄이고 있네. 야, 이 정신 나간 놈들아! 목숨 걸고 싸우는데 대충 싸울 놈이 어디 있어!”
“…….”
“의지는 사파도 있어요! 세상의 의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 왜? 너희들이 각오를 굳히고 열심히 하면 적이 알아서 쫄아 가지고 져 줄 것 같냐?”
말문이 막힌 검수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의지는 수련할 때나 의미가 있는 거지. 눈알에 힘준다고 검이 세지는 것도 아니고. 그건 평소에나 해야 하는 거야.”
“…….”
“그리고 너희들은 그 평소를 낭비해 온 거고.”
그 순간 남궁도위가 손을 들었다.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왜……. 아니, 왜요?”
“……그냥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헤헤. 제가 어떻게…….”
“……그게 저도 더 편할 것 같습니다.”
“크흐흠.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청명이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왜?”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도장. 이런 결과가 나온 판에 저희 입으로 말하는 것도 우스울지 모르나, 남궁의 수련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저희는 정말 노력했습니다.”
“뭐, 그렇겠지.”
청명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도장께서는 저희가 평소를 낭비해 왔다고 말씀하시는지…….”
“사실이니까.”
“……예?”
청명이 피식 웃었다.
“검을 쓰는 사람이 주먹질을 하루 종일 연습한다고 해서 그걸 열심히 했다고 할 수 있어?”
“……아니죠.”
“너희들이 한 게 그런 거야.”
사실 이건 남궁세가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화산이 강한 이유?
그건 너무도 간단하다. 청명이 제자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옆에 붙어서 지옥같이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그럼 이게 청명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지.’
굳이 청명 정도의 경지에 올랐던 이가 아니라고 해도, 한 문파의 최고에 오른 이라면 저런 어설푼이들을 제대로 된 검수로 만드는 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다.
“너희 윗대가 너희에게 제대로 된 길을 알려 주지 못해서 그런 거야.”
남궁도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말씀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저희 가주께서는 누구보다 저희를 위하셨던 분입니다.”
“알아.”
“그런데 왜…….”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인데. 위하는 것과 할애하는 건 전혀 달라.”
남궁도위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남궁황이……. 아니, 전대 가주가 너희를 위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이 강해지는 것이었을 테니까.”
“아…….”
그제야 남궁도위의 얼굴에 뭔가 알겠다는 표정이 스쳤다.
남궁황은 왜 이들을 제대로 키워 내지 못했는가?
간단하다.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키우기 위해 시간을 쏟아붓기보단 자신이 더 강해지는 쪽이 남궁세가에 훨씬 더 큰 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비단 남궁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천하의 모든 문파가 남궁세가와 그리 다르지 않은 길을 걷는다.
그만큼이나 절대고수 한 사람이 문파에 실어 주는 힘이 거대하다는 의미다.
화산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백천이 강해지고, 유이설이 강해진다 해도, 화산의 제자들이 지금보다 더 강하다고 해도, 청명이 없다면 지금과 같은 위세는 절대 누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명문이 이어져 올 수 있단 말인가?
그걸 이해하는 듯 청명이 명쾌하게 답했다.
“이해를 못 하는 모양인데, 너희는 딱히 공을 들여 가르칠 필요가 없어.”
“……예?”
“그냥 우르르 모아서 대충 가르쳐 놓으면 알아서 걸러지니까.”
“…….”
“남궁이 세가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방계지. 그 방계 중에 입문했다 제 가문으로 돌아간 이들이 몇이나 되지?”
“……그야…….”
청명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입문했다가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들을 너희는 방계, 세가가 아닌 곳에서는 속가라고 부르지. 탈락한 이들은 속가가 되어 외부로 세력을 확장해 주고, 경쟁에서 이긴 이들은 위로 올라가지. 그게 명문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
그럼 아랫대의 제자들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딱히 성장시킬 필요가 없지.’
명문쯤 되면 입문하는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그러다 보면 그중에 일 할 정도는 재능이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런 재능 넘치는 이들은 내버려 둬도 알아서 위로, 또 위로 올라온다.
그건 과거의 화산 역시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청명 역시 그런 방식으로 나온 이가 아니던가?
“그럼…… 화산은 다르단 말입니까?”
그 말이 나온 순간 청명이 흠칫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제 눈을 살짝 문질렀다.
“……다르냐고?”
“…….”
남궁도위는 크게 당황했다.
어……. 설마 저거 눈물인가?
“다르냐고 물었냐? 다르냐고? 지금 화산이 다르냐고? 화산이?”
“야야. 쟤 또 고장 났다.”
“사숙. 좀 말려 봐요.”
“…….”
청명이 눈가를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그래……. 가만있으면 제자가 쏟아져 들어오는 지주 놈이니 모르겠지. 조걸 같은 인간도 주워다 써야 하는 상거지 문파의 심정을 알 리가 있나.”
“아니, 나는 또 왜 걸고넘어지는데!”
“조걸아, 조용히 해라.”
“나는 솔직히 저 말에 동의한다.”
“후욱!”
청명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휘몰아치는 감정을 가까스로 정리한 그는 남궁도위와 남궁단,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남궁세가의 검수들을 보며 말했다.
“이해할 필요 없어.”
“…….”
“겪어 보면 알게 될 테니까. 너희도 어차피 이제 한 사람도 낙오하면 안 되는 입장이잖아?”
청명이 히죽 웃었다.
“그러니 그냥 맡기면 돼. 내가 알아서 자알해 줄 테니까. 아주 자알.”
“…….”
남궁세가에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