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화. 새삼스럽게. (3)
“허억, 허억……. 허억……. 허억!”
하늘이 노랗다.
남궁단은 하늘이 노랗다는 게 수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하늘은 정말 누렜다.
아니, 하늘뿐만이 아니다.
“허억……. 허억…….”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누렇게 변해 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의 색이 점점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끄으…….”
그 순간 남궁단의 발이 돌부리에 걸렸다.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의 몸이 앞으로 그대로 엎어진다.
아니 엎어질 뻔했다.
“읏차!”
하지만 그의 몸이 채 반도 기울기 전에 옆으로 달려온 이가 그의 어깨를 잡아끌어 몸을 반듯하게 세워 주었다.
“…….”
남궁단은 멍한 눈으로 자신의 옆에 선 이를 바라보았다. 윤종이라고 했었나……?
그는 빙그레 웃으며 큰일 날 뻔했다는 듯 말했다.
“아직 힘이 남으신 것 같은데 벌써 넘어지시면 안 되죠. 자, 힘내서 계속 달립시다.”
“…….”
“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끼.”
“네?”
남궁단의 발이 힘없이 앞으로 내밀어진다.
턱. 턱. 턱. 턱.
그리고 줄을 잘못 꿴 꼭두각시 인형처럼 거걱거걱대며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됐더라?’
그래, 시작은 아주 간단했다…….
* * *
“내기요?”
“네.”
청명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대접을 받고 싶다고 하시는데, 그냥 무작정 대접해 달라는 말은 설득력이 좀 떨어지는 것 같으니까. 대접받으실 자격이 있는지 한번 확인해 보자고요.”
“…….”
“그쪽이 이기면 내가 먹은 돈 다 뱉어 내고, 앞으로는 손가락 하나 안 건드릴게요.”
“저, 정말입니까?”
“대신 우리가 이기면 그쪽은 군소리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간단하죠?”
남궁단이 신중한 얼굴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장……. ”
“아아.”
청명은 남궁단이 할 말이 뭔지 안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꼴이 딱 귀찮게 달라붙는 파리를 쫓아내는 모양새 같았다.
“뭔 말인지 알아요. 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인데, 설마 나랑 싸우자고 하겠어요?”
“그, 그럼요?”
“얘들이 할 거예요.”
청명이 제 뒤쪽에 있는 오검을 가리켰다.
“그리고 비무 같은 걸로 하면 결과가 너무 뻔하니까 공평한 걸로 합시다. 공평한 걸로.”
“……공평?”
“네.”
청명이 짝 소리 나게 박수를 치더니 말했다.
“달리기.”
“…….”
순간 당황한 남궁단의 얼굴이 멍청해졌지만 청명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규칙은 간단하죠. 그쪽에서 먼저 달리기 시작하고, 우리 애들이 뒤쫓을 거예요. 따라잡히는 쪽은 탈락. 해가 질 때까지 한 사람이라도 안 따라잡히는 사람이 있으면 그쪽이 이기는 거예요.”
“아니, 그건…….”
“대신!”
남궁단이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청명이 말허리를 잘랐다.
“그것도 좀 불안하니까, 우리 쪽은 팔다리에 각각 스무 근짜리 각반을 차고 하죠.”
그 말에 남궁세가 검수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겁니까?”
“음? 좀 과했나? 그럼 몸에도 한 서른 근 정도는 더 둘러 주고.”
“도장!”
남궁단이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시나.”
청명은 새끼손가락으로 제 귀를 후비더니 훅 불어 냈다.
“겁나면 하지 마시든가.”
“하겠습니다!”
“다, 단아!”
“형님!”
남궁단이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대신 그 약속은 꼭 지키십시오!”
청명이 씨익 웃었다.
“내가 할 말을 대신 하시네. 그쪽이나 똑바로 지켜요.”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남궁단을 보며 우려 섞인 말을 해 댔다.
“괜찮겠습니까?”
“이거…….”
“그만!”
남궁단이 다른 이들의 말을 끊었다.
“아무리 남궁의 장기가 신법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각반까지 찬 이들에게 따라잡히고도 변명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전원이 다 잡혀야 지는 승부인데?”
“…….”
“이렇게까지 무시를 받고도 참으실 겁니까?”
남궁세가 검수들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그들이 결심을 굳히는 것을 지켜본 남궁단이 이를 뿌득 갈며 청명을 노려보았다.
‘오만한 것도 정도가 있지.’
차라리 검술로 겨루자고 했으면 이리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검술이 아닌 내력과 지구력으로 승부를 걸어왔다.
명문인 남궁세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가 아닌가?
“도장께서 대단한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번에는 오만하셨습니다.”
“크으. 역시 세상은 넓다니까. 내가 오만한 걸 지적해 주실 분도 다 계시고.”
“…….”
“그런데 그런 말은 이기고 나서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능글대는 청명의 얼굴을 본 남궁단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랬었는데…….’
뭔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처음 든 것은 출발선에 섰을 때였다.
양팔과 양다리에 쇠각반을 차고 걸어온 화산정검이 화산검협을 향해 묻는 소리를 듣고 만 것이다.
- 어떻게 할까?
- 조져.
- 알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화산검협은 몰라도 화산정검은 그들을 무시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가 태연하게 그런 대화를 나누는 걸 들었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그의 가슴을 스쳤다.
하지만 남궁단은 애써 그 생각을 밀어 냈다. 아무리 그래도 전신에 팔십 근이 넘는 각반을 찬 채로 그들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말이 팔십 근이지, 그 무게면 웬만한 사람 한 명분이다. 등에 사람을 하나 업은 채로 앞서 달리는 이를 따라잡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렇기에 남궁단은 고민하지 않았다. 저 화산검협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줄 기회라고만 여겼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보면서도 입을 열지 않고 있는 남궁도위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제대로 알려 줄 수 있는 기회라고.
그들이 막 출발했을 때만 해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금 뒤에 화산의 문도들이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오검은 남궁이 처음 벌려 놓은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그들의 뒤를 그저 쫓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잠시 후 남궁단은 깨달았다. 왜 저 화산검협이 굳이 해가 질 때까지라는 조건을 넣었는지 말이다.
딱 반 시진이 지나자 쫓아오던 이들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전신에 팔십 근짜리 각반을 찬 이들에게 따라잡힌다? 이건 자존심이 허락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위기감을 느낀 세가의 검수들은 정말 턱이 빠지도록 달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지옥이 시작되었다.
- 거, 너무 느리신데.
- 아이고, 빨리빨리 좀 갑시다.
- 언제 굼벵이를 삶아 드셨나?
저 미친 화산의 종자들이 등 뒤에 바짝 붙더니 그들의 등을 쿡쿡 찔러 대기 시작한 것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사람 하나를 둘러맨 것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전력으로 달리는 그들의 등 뒤에 달라붙어서 태연히 한마디씩 해 대는데, 어떻게 제정신일 수가 있었겠는가?
- 아니, 벌써 포기하시면 안 되죠!
- 아직 더 하실 수 있어요!
- 힘내십쇼!
차라리 비웃고 욕을 하지, 망할 것들.
그렇게 화산 제자들의 배려(?) 속에서 남궁은 말 그대로 다리가 빠지도록 달렸다. 이건 이미 승부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였다.
하지만 한 시진이 지난 시점부터는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꾸르르륵.”
“에헤이. 여기 한 분 가셨네.”
“우, 우읍!”
“악! 토하지 마세요!”
가장 그들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 것은 뒤를 쫓는 화산의 제자들은 힘든 기색 없이 멀쩡하다는 점이었다.
남궁단이 쇳덩어리처럼 무거운 고개를 덜덜 떨며 억지로 들어 올렸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이들이 모습이 보였다.
전멸. 깔끔한 전멸이다.
저 수로채와의 전쟁에서도 마지막까지 생존해 냈던, 자랑스러운 남궁의 후예들이 지금 이 장원에서 병든 닭처럼 엎어져 있는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럴…….’
남궁단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흐느적대며 발을 뻗었다.
그들은 남궁세가다.
그 내력의 정순함에서는 천하의 어떤 문파에도 뒤지지 않을 거라 자신한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격한 수련을 버텨 온 그들의 끈기 역시 다른 문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여야 할 텐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말인가?
“우, 우욱…….”
왈칵 구토가 쏠렸다. 남궁단은 본능적으로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그대로 이런 추태를 보일 수는 없다.
‘주, 죽을 것 같다…….’
이제는 하늘이 노랗고 어쩌고를 따질 상황도 아니다. 발을 뗄 때마다 사지가 따로 놀고,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몸이 반으로 접혔다 펴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혀를 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도 이제 끝인 것 같은데?”
“아니. 조금은 더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럼 내기합시다, 사형. 일각 더 버티나, 못 버티나. 나는 못 버티는 데 걸게요.”
“……나도 못 버티는 데 걸란다.”
“에이. 그게 뭡니까!”
“내기라면 냉철히 판단해야지.”
그 말이 남궁단의 희미한 마지막 의지마저 끊어 놓을 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달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힘 좀 내 봐!”
한 걸음을 뗄 때마다 획획 바뀌는 그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소……. 소소…….’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혀를 차는 모습이 남궁단의 머릿속을 뒤죽박죽 헤집어 놓았다.
‘어떻게…… 소소가…….’
그가 알던 당소소는 무학과 별 연관이 없었다. 당가와 교류를 할 때마다 본 그녀의 모습은 화려한 궁장을 한 명문가의 여식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그런 당소소가 지금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따라붙으며 그의 옆에서 응원을 던지고 있었다.
‘미친…….’
철푸덕.
결국, 버티지 못한 남궁단의 몸이 땅과 조우했다.
엎어지며 흙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그는 격하게 헐떡거렸다. 거칠게 공기가 빨려 들어오며 흙먼지가 마구 밀려들었지만, 그는 차마 고개를 돌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전신을 커다란 방망이로 잘근잘근 다져 놓은 것만 같았다. 이건 힘들다거나 괴롭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수련만으로 이런 지경에 떨어진 적이 있었던가?
“아니, 두 시진을 못 버티냐?”
“……별로 빨리 달리지도 않았는데.”
“소소야. 어떻게 된 거야?”
“왜, 왜 저한테 그래요! 당가는 이 정도는 아니에요!”
옆에서 툭탁거리는 목소리도 남궁단의 머리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머릿속이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했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정말 영원히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 와중에도 남궁단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쪽을 향해 터덜터덜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말이다.
턱. 턱. 턱. 턱.
그는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읏차.”
누군가가 발로 그를 슬쩍 밀어 돌리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진 후, 두 눈 가득 푸른 하늘이 들어왔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 푸르디푸른 하늘의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가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을…….
“거.”
“…….”
“한 백 근 더 달고 시작할 걸 그랬나?”
“…….”
“우냐?”
“…….”
“사숙, 얘 우는데?”
“하지 마, 이 새끼야!”
“넌 사람도 아니야!”
“야. 가려 드려! 가려 드려! 빨리!”
여기는…… 여기는 마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