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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002화 (1,003/1,567)

1002화. 새삼스럽게. (2)

눈을 뜬 청명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돌리니 창밖에선 이른 오전의 햇살이 밀려들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창을 보던 청명은 순간 밀려드는 고통에 왼쪽 어깨를 콱 움켜잡았다.

욱신! 욱신!

팔이 끊어져 나간 것 같은 고통에 짧게 몸을 떨었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옷을 풀어 헤쳐 어깨를 확인해 보았다.

알고 있다. 상처는 없다. 새겨진 흉터들은 자잘한 상처였던 것뿐, 이만한 고통을 줄 만한 상처는 분명 없었다.

“…….”

청명은 낯선 물건을 보는 것처럼 새삼 제 팔을 말없이 한참 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창을 좌우로 열어젖히니 아직 쌀쌀한 이른 아침의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들려오는 새소리.

어디선가 풀벌레가 찌륵대며 작게 우는 소리.

인적이 보이지 않는 너른 마당에 내려앉은 고요함.

저 멀리서는 이미 누군가가 수련을 시작했는지, 짧은 기합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롭네.’

그래. 한없이 평화롭다.

청명은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다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푸른 하늘엔 하얀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광경을 한참 바라보던 청명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새삼스럽게.”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 * *

남궁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회복이 덜 된 이들을 제외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모조리 이곳에 도열해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지?’

이 모든 것은 남궁도위의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 오늘부터 우리는 화산과 함께 수련한다.

‘이해를 할 수가 없네.’

돌려 말하긴 했지만, 그 말에 숨은 속뜻은 화산이 남궁세가를 가르친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화산과 수련을 함께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 말을 들은 이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진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남궁세가가 어떤 곳이던가? 그 검 하나로 천하제일세가의 자리에 오른 곳이다.

검에 관해서 가르칠 것은 있어도 배울 것은 없는 곳이 바로 남궁세가였다.

물론 지금 남궁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약해진 세력 때문에 고개를 숙이는 것과 다른 문파에 가르침을 청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대체 소가주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거지?’

남궁단이 슬쩍 앞쪽에 선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들이 이곳에 나와 도열하는 성의를 보인 이유는 이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남궁도위였기 때문이다.

그가 소가주여서? 가주가 될 이여서?

아니다. 남궁도위가 이곳에 있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제 발로 그 지옥 같던 매화도로 돌아온 이이기 때문이다.

‘모르겠군.’

공적으로는 소가주이고, 사적으로는 그의 사촌 형이 되는 남궁도위의 마음이 지금 너무 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분명 비웃음을 살 텐데.’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놈이 가주의 자리에 오르더니, 남궁의 자존심을 죄 가져다 버리고 화산에 고개를 숙였다는 말이 분명 공공연히 나올 것이다.

“하아…….”

입에서 참을 수 없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쩔 수 없지. 적당히 어울려 주다가 흐지부지 없던 일로 만드는 수밖에.’

이건 절대 그들이 남궁도위에게 반발하기 위함이 아니다. 거꾸로 그들이 남궁도위의 입장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이다.

지금 남궁도위의 어깨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이 얹혀 있다. 그런 사람이 상황을 잘못 판단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가솔 된 입장에서 가주가 잘못 판단하는 것이 있다면, 그 판단을 옳게 바꿔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남궁단은 주변의 동료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다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딱히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소가주님.’

그리고 마음속으로 사과를 전하며 남궁도위가 그들의 뜻을 오해하지 않길 바랐다.

그때 연무장이라 칭하기는 조금 어색할 만큼 광활한 마당의 한쪽에서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선두에 선 이를 본 순간, 남궁단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화산검협!’

허리에 절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날카로운 눈빛을 흘리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화산검협의 모습에서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화산검협 청명.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작금 강호에 누가 있겠는가?

그는 화산의 상징을 넘어 천우맹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이름은 아무래도 남궁세가에게는 조금 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

저 화산검협이 흑룡왕의 팔을 잘라 내는 모습을, 그리고 저 사패련의 수괴 장일소과 소림의 방장인 법정을 상대로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말이다.

‘저 화산검협이 직접?’

청명과 그 좌우에서 걸어오는 화산오검을 새삼스레 바라보던 남궁단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저 화산검협이라면 분명 배울 게 있을 것이다. 고수의 가르침이란 그런 것이니까.

‘아, 안 돼.’

하지만 그는 재빨리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백척간두에 몰린 남궁세가를 위한 일이다. 아무리 이득이 탐난다고 해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 법 아닌가.

남궁단은 이를 악물면서 화산검협을 바라보았다.

매화도에서 그가 보여 주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전신의 근육을 팽팽하게 당기던 바로 그때였다.

차가운 눈빛을 흘리며 앞쪽에서 걸어오던 화산검협이 선두에 선 남궁도위를 발견하더니 돌연 만면에 커다란 웃음을 띠었다.

“아이고오오오오!”

그러더니 심지어 양팔을 벌리며 도도도 뛰어나왔다.

그 모습은 마치 호구……. 아니, 거래를 트러 온 부잣집 아들내미를 맞이하는 악덕 상인 같았다.

남궁도위의 앞까지 달려온 청명이 남궁도위의 양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간밤에는 잘 주무셨습니까?”

“하…하……. 도장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잤습니다.”

“장원이 워낙 초라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저것들더러 대궐 같은 숙소를 지어 바치라고 하겠습니다!”

“아, 아니,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무 당연한 거죠!”

“지, 진짜로 괜찮습니다.”

남궁도위는 식은땀을 뻘뻘 흘려 댔다.

“크으. 마음씨도 고우시지.”

청명이 감격한 듯 그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남궁세가의 검수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화산검협 맞지……?’

‘저게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라고?’

그럴 수밖에.

이들 중 소림에서 열렸던 천하후기지수비무대회를 두 눈으로 본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아니, 설사 두 눈으로 보았다 해도 그 인상을 완전히 잊어버릴 만큼 뒤이어 본 청명의 인상이 강렬했다.

삼 년 전, 흑룡채에서 장일소와 맞붙었던 화산검협, 그리고 매화도에서 흑룡왕의 팔을 베어 내던 화산검협까지.

그 차갑고 날카로운 검수를 기억하던 이들에게 연신 허리를 숙이며 헤헤 웃어 대는 청명의 모습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원래 저 사람 성격이 저랬나?’

‘그럴 리가 없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흑룡왕의 팔을 베어 날리고, 잔인하게 그를 징죄하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도저히 그때의 청명과 지금의 청명이 겹쳐지질 않았다.

“으히히히히힛!”

청명이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는 얼굴로 연신 남궁도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도장.”

남궁도위가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궁도위가 자못 진지해지자 청명이 히죽 웃었다.

“그럼요, 그럼요!”

“그럼.”

남궁도위는 뒤쪽으로 돌아가 제 자리에 섰다. 지금부터는 남궁의 소가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검수라는 듯이 말이다. 그 광경을 본 청명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보았다.

‘…….’

‘아니, 뭐냐고?’

그 청명의 시선에, 남궁세가 검수들은 다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나 활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청명의 얼굴에선 역력한 귀찮음이 뚝뚝 떨어졌다.

“쯧.”

아니…… 사람이 저렇게 순간순간 휙휙 바뀌어도 괜찮나?

그때 가볍게 혀를 찬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어 댔다.

“원래 내가 다른 문파에 관심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말이야.”

“…….”

“그래도 사람이 상도의는 있어야지. 먹은 만큼은 해 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시키는 대로만. 그럼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이해했어?”

그 순간 남궁세가 검수들의 시선이 남궁단에게로 슬쩍 돌아갔다.

시선을 받은 남궁단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이곳에선, 남궁도위를 제외하고 나면 남궁명의 아들인 그가 직계 중 가장 배분이 높다. 그러니 말을 해도 그가 해야 한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좋아.’

남궁단이 의지를 다지며 입을 열었다.

“도장.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청명이 남궁단을 슬쩍 돌아보았다.

“저희가 사정이 이러하여 화산에 배움을 청하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존중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으응?”

청명이 고개를 갸웃했다. 남궁단은 더욱 용기를 내 말을 이었다.

“저희는 화산의 문하가 아닙니다. 남궁의 이름을 쓰는 이들입니다. 타문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보여 주십시오.”

“…….”

“그에 더하여, 저희가 화산에 청하는 가르침은 오직 검을 쓰는 자세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궁에는 그 이상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 점 고려 부탁드립니다.”

실로 당당한 어투였다.

남궁단이 살짝 주먹을 쥔다.

저 화산검협을 상대로 떨지 않고 제 할 말을 모두 해냈다. 남궁의 의기가 무엇인지 보여 주기에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는 화산검협을 존중한다. 게다가 젊은 무인치고 그를 동경하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관계의 정립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들의 어깨에는 남궁세가의 자존심이 걸려 있으니까.

다른 이들도 남궁단의 말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사숙.”

“응?”

“쟤 뭐라는 거야?”

“존중해 달라는데?”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고.”

“흐음.”

청명은 아무래도 이해를 못 하는 듯 옆에 선 백천에게 재차 물었다.

백천이 짧게 고심했다. 이 언어가 짧은 사질에게 설명하기 좋은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아서.

“대접 좀 해 달라는 거지. 남궁세가니까.”

“대접?”

“응, 대접.”

“아, 난 또 뭐라고. 그 말이었구나. 대접.”

청명이 남궁단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크으. 그건 내가 또 확실하게 해 줄 수 있지. 그러니까 대접을 원하신다고?”

청명의 웃음이 점점 기이하게 변해 갔다.

“대충 먹은 만큼만 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열정적으로 대접까지 원하시니 내가 또 열심히 하지 않을 도리가 없네.”

“…….”

“자, 그럼 어디 너희가 대접받을 만한 실력은 있는지 확인해 볼까?”

청명의 입가에 더없이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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