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화. 새삼스럽게. (1)
“자, 장로님!”
다급한 목소리에, 무당의 장로 송화(松和)진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상황은 어찌 되고 있느냐?”
“밀립니다! 아니, 발목조차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이런…….”
그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하필 이곳이란 말인가?’
느껴진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이곳까지.
전신을 수천 개의 바늘로 찔러 대는 듯한 살기가, 숨통을 조여 오는 진득한 마기가 말이다.
“자, 장로님! 대책을……!”
송화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대책? 물론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곳의 책임자는 다름 아닌 송화이니까.
하지만 대체 무슨 대책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곳에 있는 전력은 모조리 밀어 넣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사태를 대비해 본문에서 끌고 온 무당의 일대제자도 이미 서른이나 투입했다.
그 하나하나가 태극혜검에 입문한 이들이고, 무당의 자랑인 양의검진(兩儀劍陳)을 펼쳐 낼 수 있는 정예 중의 정예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적의 발을 잠시도 멈추게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피를 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이상의 대책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이곳이 밀리면 후방이 완전히 노출됩니다! 장로님!”
“알고 있다!”
송화가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곳은 공격에 나선 이들의 최후방. 만약 이곳이 붕괴되면 대산(大山)으로 진입한 이들의 퇴로가 끊기게 된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
목숨을 걸어서라도, 아니. 목숨 그 이상을 걸어서라도 어떻게든 막아 내야 한다.
하지만…….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송화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
저 건너편에서 다가오고 있는 이는 그런 각오 정도로 막아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더러 무슨 수로 주교를 막으란 말이냐!”
발악하듯 소리친 송화가 검 손잡이를 콱 움켜잡았다.
애초에 이곳으로 주교가 올 수 있다는 말 같은 건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고작 오십에도 못 미치는 수로 후방을 방비하라는 명은 내리지 않았을 테지.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산 너머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구쳤다.
그 시커멓게 넘실대는 기운을 목도하는 순간 송화는 저도 모르게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었다.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으으.”
저건 재해(災害)다. 입에 담기도 두려운 천마를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존재들.
“어떻게 저런 것들이 열씩이나 존재한단 말인가…….”
천마라는 존재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라면, 저 주교들은 그들의 목에 손톱을 박아 넣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검은 마기의 소용돌이가 칼날처럼 몰아쳤다. 송화의 입에서 참지 못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지, 지원을 요청해라!”
“장로님!”
“빨리, 당장 지원을 요청해라! 이곳에 주교가 있다고! 우리만으로는 일각도 더 버티지 못한다고! 당장!”
“지, 지원은 이미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송화는 그 뒤에 따라올 말이 무엇인지 듣지 않고도 알았다.
저 주교를 상대로 지원을 올 만한 전력은 이미 본진에 남아 있지 않다. 주교를 상대할 만한 힘을 남겨 두고 공세에 나서는 천하의 머저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송화의 눈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무당 제자의 모습이 똑똑히 들어왔다.
말 그대로 분쇄.
검은 마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무당의 제자가 육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조각조각 나 저 어두운 산 곳곳으로 흩뿌려졌다.
“아…….”
송화의 턱이 절로 떨리기 시작했다.
참으려 해도 참아 낼 수가 없다. 인간도 아닌 악마를 상대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후퇴…….”
“예?”
송화의 입에서 결코 나오지 말았어야 할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는 순간 제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곳이 뚫리게 되면 그 피해가 얼마나 커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이 피를 흘리기를 주저한다면, 그 아낀 피 한 방울을 수천 방울의 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단 말이다!
하지만…….
“우웁.”
일순 밀려오는 구토감에 그는 몸을 들썩였다.
이곳에 있으면 죽는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죽을 것이다.
이건 개죽음이다.
그들의 목숨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면 얼마든지 목숨을 바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숨으로 대체 무엇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죽어 가는 이로도! 죽어 갈 이로도! 아직 죽지 않은 이의 목숨으로도! 저 마귀의 발을 한순간도 멈출 수가 없는데!
이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희생을 왜 지속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아아아아아악!”
그 순간 또 하나의 목숨이 헛되이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아아아!
휘몰아치는 마기의 소용돌이는 그 와중에도 확실히 이곳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느릿하지만 확실한 죽음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송화의 두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그가 아무리 무당의 장로라고는 하지만, 주교 앞에서 그의 이름 따위는 너무도 하잘것없다. 아마 저 마귀는 지금 상대하고 있는 일대제자와 그의 차이를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으…….”
검을 잡은 손이 제멋대로 떨렸다. 검을 뽑으려고 하지만 그의 송문고검은 오늘따라 아교라도 칠한 듯이 검집에 달라붙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퇴.”
“예?”
송화가 핏발이 선 눈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한차례 억눌렀던 말이 다시 튀어나왔다.
“후, 후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장로님! 장로님!”
뒤쪽에서 환희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 뭐냐!”
“오셨습니다!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 그분이?!”
이름도 나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별호조차 듣지 못했다.
하지만 송화는 제자가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 곧바로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달리 없지 않은가.
저 주교를 앞에 둔 이들에게서 희망을 끌어낼 사람은 작금 강호에 단 한 명뿐이었다.
“휘유. 볼 때마다 무시무시하구먼.”
송화가 격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옆에 한 사내가 쪼그려 앉아 산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당히 대충 틀어 올린 머리와 검은 무복, 그리고 그 위로 걸친 흰 자수 놓인 진녹색 장포……. 아니, 그런 모든 것을 떠나 숨이 절로 막혀 오는 이 어마어마한 존재감만으로도 이자가 누구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아, 암존(暗尊)…….”
암존 당보. 때로는 같은 편에게조차 마교 이상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당가의 사신.
그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주교가 있는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여기 책임자냐?”
암존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묻자 송화가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송화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암존이시여!”
“애들 물려.”
“예?”
송화가 멍하니 되묻자 당보가 눈을 찌푸렸다.
“아니, 됐다. 멍청한 놈이 살려 주려고 해도 못 받아먹네.”
“……그게 무슨.”
그 순간이었다.
저벅.
등 뒤에서 들린 발소리에 송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암존 당보는 물론 감히 그가 범접할 수도 없는 고수다. 당가가 배출한 백 년 이래 최고 고수라 불리는 암기의 화신이 바로 당보 아닌가?
하지만 상대가 저 주교라면 그런 암존의 이름도 빛이 바래는 법. 암존이 왔다는 것만으로 그의 제자가 그렇게 화색을 띠었을 리 없다.
그 말인즉…….
송화가 떨리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검은 무복. 그 가슴에 새겨진 핏빛의 매화 문양.
머리는 뒤로 질끈 묶었지만, 제멋대로 흘러내려 잔뜩 헝클어져 있다. 하지만 송화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 복색이 아니었다.
눈.
흘러내린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그 서늘한 눈을 보고 만 것이다.
송화는 저도 모르게 앓듯이 중얼거렸다.
“매……화검존.”
그래. 오직 이 사람뿐이다. 저 악마 같은 주교를 상대로 그들이 외칠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이 하나뿐이었다.
저벅. 저벅.
매화검존 청명이 그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상황은?”
날아든 싸늘한 목소리에, 송화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대답했다.
“주, 주교를 상대로 지연전을 펼치고는 있지만, 저희만으로는 역부족인 상황입니다. 매화검존!”
그 말을 들은 당보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연전은 무슨, 지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예?”
그 순간 매화검존이 송화의 멱살을 움켜잡더니 확 끌어당겼다.
송화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너.”
“…….”
“무당의 장로인가?”
송화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예?”
청명의 두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네 제자들이 저기서 죽어 가고 있는데 너는 왜 이 후방에서 저걸 지켜보고만 있냐, 이 개 같은 새끼야.”
“…….”
송화는 숨소리도 내지 못한 채 굳어 버렸다.
잔뜩 화가 난 맹수가 그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고 으르렁대는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의 혈관을 가르고 숨통을 끊어 낼 것 같았다. 공포감이 숨통을 옥죄었다.
“대책이 없으면 나서서 같이 싸우기라도 해야지. 네 목숨 따위가 아까워서 제자들을 화살받이 시키고 뒤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
“저, 저는…….”
“병신 같은 놈이!”
퍼억!
청명이 송화의 턱을 후려갈겼다.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진 송화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몸을 희미하게 떨었다. 청명은 그런 그를 벌레 보듯 일별하고는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당보가 혀를 끌끌 찼다.
“너는 저 애들 덕분에 산 줄 알아. 쟤들이 위험하지 않았으면 이 정도로는 안 끝났어.”
“…….”
송화를 향해 조소한 당보는 이내 앞서 나간 청명을 향해 달려갔다.
“아, 형님! 같이 좀 갑시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매화검존과 암존.
그 두 사람은 주저 없이 휘몰아치는 마기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의 존재를 감지했는지, 마기가 한층 더 발작적으로 날뛰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면서도 두 사람은 멈칫하기는커녕 되레 삐딱하게 웃었다.
“혼자인가?”
“대충 뭐 스물 정도는 데리고 온 모양인데.”
“그럼 혼자군.”
“……그렇다 칩시다.”
스르르릉.
청명이 천천히 매화검을 뽑아 들었다. 전신에 긴장감이 퍼지며 오싹했다. 주교의 힘은 그의 육체조차도 경고를 보낼 만큼 강렬했다.
“……천살(天殺)인가?”
“광혼(狂魂) 같은뎁쇼?”
“상관없지. 어차피 죽을 놈인데.”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청명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저번 놈을 죽일 때, 네가 이 주 동안 의식을 잃었던가?”
“개소리하지 마십쇼. 딱 한 주였습니다!”
“그게 그거지. 이번에는 까딱하면 뒈지겠군.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고 뒤에 처박혀 있어.”
“거, 본인 팔 떨어질 뻔한 거 내가 고쳐 줬던 건 싹 까먹으신 모양이지? 이번에는 자칫 목이라도 떨어지실까 봐 걱정돼서 안 되겠는데?”
청명이 피식 웃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매화검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별수 없군.”
청명은 이를 드러냈다.
“우선 저 새끼 목부터 자르고 마저 이야기하자.”
소매 안에서 비도를 뽑아 낸 당보가 낄낄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찬성.”
두 사람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검고 푸른 두 줄기의 유성이 솟구치는 마기의 폭풍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날.
또 하나의 주교가 대산의 어귀에서 생을 달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