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화.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5)
“가산 목록은 갑자기 왜…….”
“…….”
“아, 물론 소가주께서는 이제 가주가 되실 몸이니 세가의 가산을 확인할 권리와 의무가 있지요. 하지만 왜 이리 급작스럽게……?”
남궁명이 의심의 눈초리로 남궁도위를 살폈다. 남궁도위는 그저 영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냥…….”
“예?”
“묻지 마시고…… 알려 주십시오. 그냥…….”
“…….”
아침에 숙소에서 나갈 때만 해도 두 눈에 총기가 가득했던 양반이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전 재산을 도박으로 날린 인간 같은 눈으로 돌아왔단 말인가?
미심쩍은 눈으로 남궁도위를 힐끔대던 남궁명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럼 정리된 장부를 넘겨드리지요.”
“숙부.”
“……왜 자꾸 그러십니까?”
“저희 남궁세가는 부자겠죠?”
“허허.”
남궁명이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를 말입니까. 이 천하에 거상들이 구름처럼 많고, 만석꾼들이 발에 채이도록 굴러다닌다고 하지만, 제아무리 대단한 부를 가진 이들도 우리 남궁세가가 가진 재산과는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부심이 한껏 묻어나는 발언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남궁명이 알기로는 천하에서 남궁세가와 부로 견줄 수 있는 문파는 오직 소림뿐이니까. 저 무당이나 팽가라고 한들 남궁세가에는 한 수 처지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남궁도위는 기뻐하기는커녕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부자네……. 부자야……. 부자구나.”
“소, 소가주?”
“부자였었지……. 부자…….”
이놈이 미치기라도 했나?
까드득.
손톱을 있는 대로 물어뜯던 남궁도위가 마침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장부는 어디에서 받으면 됩니까?”
“사본이라면 이조장이 지니고 있을 겁니다.”
“……예, 그럼.”
터덜터덜 걸어 밖으로 나가는 남궁도위를 보며 남궁명은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남궁도위가 ‘잘하는 걸 거야. 잘하는 거야. 잘하는 거여야 해. 제발 잘하는 짓이어야 하는데.’ 하고 중얼대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대체…….”
아직 남궁세가에 몰려오고 있는 재앙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남궁명이었다.
* * *
청명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입은 절로 쩌억 벌어졌고, 장부를 쥔 손은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덜덜 떨렸다.
“……이, 이게…….”
“…….”
“이게 다?”
남궁도위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의 재산 목록입니다.”
“……세, 세상에.”
청명의 고개가 제멋대로 삐걱대며 돌아갔다. 당장 눈앞에 천마가 나타난다 해도 이리 심하게 놀랄 것 같지 않을 정도였다.
남궁도위와 장부를 계속 번갈아 바라보던 청명은 반쯤 풀린 눈으로 제 감상을 가감 없이 늘어놓았다.
“세상 사람들이 왜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해도 굶는가 했더니, 돈은 이 새끼들이 다 가지고 있었네. 도둑놈의 새끼들.”
“…….”
“허……. 이게 뭔……. 허허허.”
청명이 질린다는 얼굴로 장부를 다시 보았다.
확실히 말해, 이제 화산은 절대 돈이 없는 문파가 아니었다. 몇 년 전까지는 몰라도 지금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부자 문파라고 할 수 있다.
축적한 재산이야 아직 중원의 거부들을 따라갈 수 없겠지만, 벌어들이는 수입만을 생각해 보면 이제 웬만한 문파는 돈으로 싸대기를 후려쳐 쫓아낼 수 있을 정도다.
수입만으로 따지자면 과거 잘나가던 화산을 뛰어넘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거…… 미친. 진짜 있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청명의 반응이 이렇게나 격한 게 신기했는지, 백천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대체 뭐 얼마나 있길래 그래?”
“봐.”
청명이 두말없이 장부를 백천에게 넘겼다.
백천이 장부를 몇 장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 돈이 많을 수도 있지. 남궁세간데. 그렇다고 소가주께 그리 말하는 건 좀…….”
그 순간 윤종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을 맞닥뜨렸다.
백천의 두 눈이 서서히 커지더니 앞으로 툭 튀어나온 것이다.
“이, 이게…….”
촤락! 촤라라라락!
장부를 넘기는 백천의 손길이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단정한 얼굴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표정으로 장부를 거칠게 넘겨 대던 백천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멍하니 남궁도위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빠진 표정이 금세 원독에 찬 눈길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남궁도위는 당황했다.
“왜, 왜 그러십니까.”
“부자 새끼…….”
“예?”
남궁도위는 황망하다 못해 귀를 의심했다. 저 말이 정말로 백천의 입에서 나온 게 맞단 말인가.
그때 청명이 버럭 고함을 쳤다.
“돈이 이렇게나 있는데 칼질은 왜 하고 다녀, 이 미친놈아!”
“그, 그게 무슨 말씀…….”
“있는 놈들이 더해! 진짜로 더해!”
청명의 입에서 원독에 가득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세상이 불공평한 것도 정도가 있지! 누군 태어나 보니 고아고 기껏 목숨 부지한 데가 거지굴보다 더한 화산판데! 누구는 태어나 보니 남궁세가 아들내미네!”
“그러니까!”
“사숙은 종남 출신이잖아!”
“남궁에 비하면 종남도 거지굴이야!”
“아. 그건 맞지.”
“썩을 부자 놈들.”
“망할 지주 새끼들.”
조걸은 그 광경을 보다 두 눈을 비볐다. 어쩐지 청명과 백천의 뒤로 붉은 기운이 넘실대는 것 같았다. 낫이랑 망치가 언뜻 보인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나는 내가 돈이 많은 줄 알았지.”
청명이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망할 장문사형의 세뇌가 그의 세상을 좁게 만들고 있었음을 말이다. 아무리 청명이 돈을 많이 번다고 떵떵대 봐야 결국 그도 먹을 음식과 마실 술만 있으면 만족해 버리는 도사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탐욕(?)은 청정 도량에서 살아온 청명의 상상을 초월했다.
“잠깐만. 그럼 소림이나 무당 새끼들도 돈이 이거 엇비슷하게는 있단 거잖아?”
청명은 빠득빠득 이를 갈아붙였다.
“근데 이 새끼들이 군자금을 각출하자고 해? 이, 이 새끼들 내가 쫓아가서 무덤이라도 파헤쳐야지.”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아까부터?”
“끄으으으.”
청명이 달군 숯을 삼킨 것처럼 제 목을 긁어 대었다.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고 넘어갈 것 같은 그 반응에 호기심이 동한 유이설이 조용히 청명에게 다가가 장부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쿵.
“꺄악! 사고! 왜 쓰러져요!”
당소소가 기겁하며 뒤로 넘어가 버린 유이설에게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청명이 혀를 찼다.
“그렇지, 그렇지. 길바닥 출신은 이런 액수를 보면 기절해야 정상이지.”
“사고는 고아 아니라고요!”
“매한가지지 뭐.”
“아니, 대체 얼마나 돈이 많다고 이 난리들이에요?”
당소소가 장부를 집어 들고 살펴보았다.
“흐음.”
그러더니 조금 심드렁한 얼굴로 조걸에게 장부를 넘겼다. 조걸 역시 잠깐 읽더니 말했다.
“……그냥 흔한 장부 같은데?”
“남궁세가면 이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두 사람의 반응에 백천과 청명의 눈에선 새로이 핏발이 돋아났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유이설도 고개를 번쩍 들더니 허리춤에 찬 검을 콱 잡았다.
“더러운 지주 놈들.”
“있는 집 자식들이란!”
“척결!”
고아, 가출, 길바닥 태생의 삼인방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세 사람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자, 잠시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숙은 좀 아니잖아요!”
“맞아! 사숙도 집안은 좋잖아! 자기가 박차고 나와서 그렇지!”
조걸은 이 공격이 반드시 먹힐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백천의 대답이 나온 순간 조걸은 깔끔하게 반격을 포기했다.
“태어나 보니 형이 진금룡.”
“와…….”
“이건 인정이네.”
“거기 계십쇼, 사숙. 실례했습니다.”
금방이라도 혁명의 불길이 솟구쳐 오를 듯한 분위기 속에서 윤종이 재빨리 중재에 나섰다.
“지,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잖느냐, 청명아.”
“끄으으응.”
청명이 억지로 목을 뒤틀어 대었다.
“후욱. 후욱.”
배알이 뒤틀리고 속이 뒤집히지만, 어쨌거나 이 장부가 그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
청명이 장부와 남궁도위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할만.”
“예?”
“……사, 사…… 할……. 아, 아니. 이 할…….”
그 순간 청명은 깨달았다.
그의 내면 저 깊은 곳에 그도 모르는 ‘양심’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청명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더 부를 수가 없어…….’
물론 그의 노동력이라는 것은 가히 황금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 문제는 남궁세가의 재산은 황금을 발 닦는 걸레로 쓸 수 있을 만큼 위대하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청명이라지만, 검수 몇몇을 만져 주는 대가로 너무 많은 금액은 부를 수가 없었다.
‘사형! 장문사형! 제가 오늘 드디어 양심이 뭔지 깨닫습니다, 사형!’
- 그게 양심이냐? 이 미친놈아!
아, 일단 조용히 하고 계시고!
청명은 심호흡을 다시 하고 입을 열었다.
“그…… 이…… 이 할만 주시면 제가 어떻게…….”
“예? 이 할이요?”
남궁도위가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청명이 어깨를 움츠리고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럼 일 할……요.”
훗날 조걸은 이 광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건 마치 중천에 뜬 태양이 쪼그라들고, 동정호의 물이 말라 버리는 광경과도 같았다고, 천하의 청명이 다른 것도 아닌 돈에 눌려 버린 것이다.
그 순간 남궁도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도장. 돈이 너무 적습니다.”
“……예?”
“남궁은 목숨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천우맹과 한 식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죠……?”
“재산의 오 할을 내놓겠습니다. 천우맹의 군자금으로 써 주십시오.”
툭.
청명의 손에서 장부가 떨어졌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청명이 턱을 덜덜 떨었다.
“오, 오……. 오 할? 오…… 할이요?”
“예!”
남궁도위가 굳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께서 적당히 나누시면 될 것 같습니다. 도장의 몫과 화산의 몫, 그리고 천우맹의 몫을.”
“지, 진짜 오 할……이나 내신다고요? 이걸?”
“당연합니다.”
남궁도위가 제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재물이 아무리 중하다고는 하나, 목숨을 구원받은 은혜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밖에 보은하지 못하는 저희를 이해해 주십시오.”
청명이 와락 그에게 달려들어 손을 움켜잡았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 도장! 왜 이러십니까? 별것 아닙니다.”
청명의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너한테나 별거 아닌 거야.’
다행이다.
얘가 바보라서 진짜로 다행이야.
응? 이건 바보인 게 아니라 착한 거라고? 그게 바보인 거지.
“제가…….”
“예?”
“제가 신명(身命)을 다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궁세가 놈들이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들어 두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
“반드시!”
“가, 감사합니다.”
그때 가만 보고 있던 조걸이 윤종에게 속삭였다.
“사형. 상황이 좀 이상해서 그러는데, 따지고 보면 저거 돈 주고 얻어맞는 거 아닙니까?”
“쉿. 조용히 해라.”
“…….”
그날 그렇게 남궁세가는 화산의 친구가 되었다.
우정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진정한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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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비가입니다.
어느새 화산귀환이 1000화에 도달했습니다. 휴재 없이 1000화를 써 본 것은 저도 처음이네요.
독자 여러분들께서 많은 성원을 보내 주셔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부족한 점도 많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후회 없는 글이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슬슬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해 앞으로는 지금과 같은 페이스의 매일 연재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 양해 부탁드리며, 최대한 연재 일정에 맞출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