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화.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4)
“역시 그랬군요!”
남궁도위가 백천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백천은 지극히 떨떠름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천 도장!”
“아, 아니 잠시만…….”
매우 찝찝해진 백천이 슬며시 남궁도위를 만류해 보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말을 들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짐작은 했습니다만, 역시! 기존의 방식으로는 화산의 말도 안 되는 성장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럼 백천 도장을 비롯한 화산 분들은 모두 청명 도장에게서 무학을 배우고 계신 게 맞는 거지요?”
“……그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그러니까, 말은 틀린 게 없는데…….”
“감사합니다!”
남궁도위는 백천의 손을 놓고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남궁세가를 다시 살릴 방도가 확실하게 정해진 것 같습니다.”
“그…… 소가주님? 일단은 좀 침착하시고…….”
“그럼 저는 청명 도장께 부탁하러 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 저기 잠시…….”
하지만 남궁도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백천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마귀.”
“악마.”
“사람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네.”
“아, 아니, 이 자식들아!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설명할 틈도 안 주고 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가는데!”
백천이 억울하다는 듯 씩씩댔지만, 오검의 시선은 이미 그에게서 떠난 뒤였다. 그들은 멀리 달려가는 남궁도위를 안타까운 눈으로 응시했다.
“……후회할 텐데.”
“그러게요.”
“불쌍.”
“저것도 지 운이죠, 사고.”
그중 가장 침착한 사람은 역시나 윤종이었다.
“……따라가 봅시다.”
“응?”
윤종이 더없이 의무감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걸 못 막았으면 적당할 때 건져서 물이라도 끼얹어 줘야죠.”
“…….”
뭔가 묘하게 어긋난 발언 같았지만, 백천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타는 건 막아 봐야지.”
오검은 재빠르게 남궁도위의 뒤를 쫓았다.
* * *
“아, 밀지 마십쇼!”
“잠깐만, 내가 좀 봐야…….”
“아니, 밀지 마시라니까요!”
청명이 있는 전각의 문을 살짝 연 오검이 와글와글 달라붙어 방 안을 바라보았다.
안에선 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대갓집 권력자처럼 자리에 앉아 있는 청명과 그 앞에 다소곳이 꿇어앉은 남궁도위.
‘그냥 보면 뭔 뇌물 먹이고 벼슬길 청탁하러 온 광경 같네.’
탐관오리 같……. 아니, 탐관오리보다 백배는 사악해 보이는 청명이 뚱한 얼굴로 남궁도위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예! 도장.”
“검을 가르쳐 달라고?”
“그렇습니다!”
청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만도 아니고 남궁세가에?”
“예!”
“내가?”
“정확합니다!”
“하하.”
“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청명과 남궁도위는 뜻이 통하기라도 한 듯 크게 마주 웃었다. 물론 뜻이 통했다고 생각한 건 남궁도위뿐이었지만 말이다.
“이 새끼가 돌았나!”
퍼억!
“아가아아아악!”
탁자를 뛰어넘어 날아든 청명의 발길질에 얼굴을 그대로 얻어맞은 남궁도위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문을 열어젖히고 잽싸게 안으로 뛰어든 백천이 남궁도위가 벽에 처박히기 직전에 받아 냈다.
“아니!”
청명이 바닥을 내밟으며 포효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가 장강에 약이라도 탔냐?! 뭔 제정신인 새끼가 하나도 없어! 녹림 사파 새끼가 천우맹에 가입하고 싶다지를 않나! 소림 새끼는 지 이득만 챙겨 대고! 하다못해 남궁세가 차기 가주라는 새끼가 뭐? 검술? 검수우우울?”
“도, 도장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내가 살다 살다 수많은 또라이를 봤지만, 이 새끼는 또 다른 수준의 또라이네! 야, 이 미친 새끼야!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시무룩한 남궁도위를 내려놓은 백천이 주먹으로 손을 가리고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 청명아.”
“왜!”
“네가 흥분한 이유는 알겠지만, 소가주님도 워낙 급하니 이러시는 게 아니겠느냐. 네가 좀 이해를…….”
“사숙.”
“응?”
청명이 정색하며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러다가 폭삭 망해.”
“사람 불안하게 망한다는 소리는 왜 또…….”
“여하튼 망했어. 폭삭 망했어. 남은 건 애들밖에 없다 이거지.”
“……아무튼 그런데?”
“그런데 그 와중에 살아남은 조걸 사형이 화산을 살려 보겠답시고 애들 데리고 무당에 가서 검 좀 가르쳐 달라고 굽실대면 사숙은 어떤 기분일 것 같은데?”
“이 새끼가 돌았나!”
“꺄아아악!”
백천이 멋모르고 서 있던 조걸의 옆구리를 걷어차 버렸다. 뜬금없이 옆구리를 차인 조걸이 반으로 접혀 날아가 처박혔다.
“아. 한발 늦었네…….”
윤종이 입맛을 다시며 들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백천이 조금 더 빨랐다.
“아니이이이!”
바닥을 구른 조걸이 두 눈을 희번덕대며 고개를 쳐들었다.
“왜 때립니까! 왜! 내가 진짜 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너는 진짜 할 것 같아서 그래.”
“…….”
할 말을 잃은 조걸이 고개를 돌려 윤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종은 그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배신당한 조걸은 무릎을 감싸며 쪼그려 앉았다. 근처에 있던 당소소가 안타깝다는 듯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게, 평소에 사람같이 굴었어야죠.”
“카악! 저리 안 가?”
백천이 헛기침하며 남궁도위를 일별했다.
‘아닌 게 아니라.’
별생각이 없었는데,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니, 저런 미친놈이 따로 없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어디 타 문파에 검을 배운다는 말인가?
화산을 위해서라면 자존심 같은 건 세우지 않기로 유명한 현종조차도 종남에 검을 가르쳐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때의 화산이 정말 힘든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니, 그런 말을 하는 제자가 있었으면 그 현종이라도 그 자리에서 면상에 매화 가지를 꽂아 버렸을 것이다.
청명이 게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야, 이 미친놈아. 어디에서 검을 배워? 무덤에 있는 남궁황이 입으로 장강 물 뿜어내면서 벌떡 일어나겠다!”
“……저희 아버님 아직 안 묻히셨는데.”
“그럼 가서 확인해 봐, 이 새끼야! 관짝 뚫고 나오려고 애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눈을 까뒤집는 청명의 기세에 남궁도위가 움찔 몸을 움츠렸다.
청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이 망하려고. 진짜 세상이 망하려고. 아니, 대체 백 년 사이에 뭔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 이런 또라이들만 남았지?”
이제는 이 새끼들이 천마보다 더 무섭다. 그 천마보다 무섭다고, 이 새끼들아!
하지만 남궁도위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하기 시작했다.
“화, 화산의 검술을 알려 달라는 게 아닙니다, 도장.”
“응?”
“제가 아무리 정신이 나가도 그렇지, 어떻게 화산파의 검술을 알려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급격히 차분해진 청명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남궁세가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너를 장강에 처박아 버리고 남궁명인가 하는 아저씨를 가주로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었거든.”
“…….”
“그럼 뭔데?”
“검술은 당연히 남궁세가의 검술을 익힐 겁니다. 남궁은 타문의 검을 탐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습니다!”
“좀 약하긴 한데.”
“…….”
“어……. 아냐, 뭐. 아무튼 계속해 봐.”
“……그래서 그…….”
뭔가 서러워진 남궁도위는 눈가를 슥 훔치고 말을 이었다.
“저희가 도장께 청하고 싶은 것은 검술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실전에 대한 경험입니다.”
“응?”
“이번에 매화도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검술을 오차 없이 익혀 내고, 완벽하게 운영하고, 서로 대련을 통해 자신의 약점을 확인하는…….”
남궁도위의 태도가 차츰 진지해졌다.
“그것만으로는 실전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
청명은 흥미롭다는 듯 남궁도위를 가만 보았다.
‘재밌는 놈이네.’
이번 일로 가문 전력의 삼분지 이를 날려 먹고 가주마저 잃었다. 덕분에 가문을 이어받는 시기가 적어도 이십 년은 빨라진 상황이다.
평범한 이라면 지금 처한 상황을 그저 버텨 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남궁도위는 미래를 보고 있었다.
“지금 같은 처지에 입에 올릴 말은 아니겠지만, 남궁세가의 검은 결코 무디지 않습니다.”
청명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남궁이 정말 약했다면, 그 오랜 기간 천하제일세가의 자리를 유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남궁이 크나큰 위기를 맞은 것은 결국 우리의 검이 실전을 모르는 우물 안 검이었기 때문입니다.”
남궁도위가 청명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화산은 달랐습니다. 화산파 분들 역시 실전을 그리 경험해 보지 못했을 텐데도, 마치 수많은 실전을 겪어 본 것처럼 싸웠습니다.”
남궁도위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도장.”
“…….”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반드시 더 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역할을 해 주실 분이 도장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흐음.”
청명이 묘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그러다 남궁도위를 향해 조금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뭐, 다 좋은데…… 하나만 물어보자.”
“예.”
“이유는 알겠지만, 내 생각에 그건 굳이 남궁이 화산에 배우는 상황을 자처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 같거든?”
“…….”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를 놈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이야.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정을 일일이 고려해 주지 않아. 그냥 남궁세가가 미쳐서 화산에서 검을 배운다는 말이나 해 대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알겠지. 너는 알 것 같아. 그래서 묻는 거야.”
청명이 싸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
남궁도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더는…….”
“음?”
“더는 누구도 잃지 않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청명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패련의 존재는 세상을 점점 더 위험하게 만들어 갈 겁니다. 봉문을 선택하지 않은 이상……. 아니, 봉문을 한다고 해도 남궁은 더는 저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듣고 있던 오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엔 과연 틀린 구석이 없어서였다.
“아버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남궁황? 가주께서?”
“예. 아버지께서는 마지막 순간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남궁의 가주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남궁도위가 단단한 눈으로 말했다.
“남궁의 가주는 남궁의 가솔을 지키는 이입니다.”
“…….”
“저는…… 이제 단 한 사람의 가솔도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남궁도위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청명을 바라본다.
“무릎을 꿇으라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라면 고개를 숙이겠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깊게 숙이며 외쳤다.
“도와주십시오, 도장. 그 빚은 남궁의 검이 갚을 것입니다!”
지켜보던 백천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새삼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만일 나라면 화산의 미래를 위해서 다른 이에게 저리 고개를 숙일 수 있겠는가?’
남궁도위는 백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신분으로 살아온 이다. 대 남궁세가의 적자라는 자리는 강호의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남궁도위의 행동에는 어떤 거리낌도 보이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저 자세만은 확실히 본받을 만했다.
“한 사람도 잃지 않겠다…….”
남궁도위의 말을 잠깐 되뇌어 본 청명이 피식 웃었다.
“그 지옥을 보고서도 그런 꿈같은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다 이거지?”
“……보았기에 더욱 입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둥아리는 살았네, 애송이 주제에.”
청명의 입꼬리에 웃음이 맺혔다.
하지만 백천은 그 웃음이 결코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들이 때때로 청명이 예상한 것 이상을 해내 보였을 때 저렇게 웃곤 했으니까.
“뭐, 좋아. 실전이라고 해 봐야 신나게 패 주면 되는 거니까 그리 어렵지 않지.”
“그, 그럼?”
“어차피 한 식구도 되었겠다, 도와줄게.”
“도, 도장!”
남궁도위가 감격한 얼굴로 눈을 빛내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
격하게 고개를 숙이려던 그는 순간 움찔하고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이려 한 곳에 청명의 손바닥이 마중 나와 있었다.
“도, 도장.”
남궁도위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흐뭇한……. 정말 말 그대로 흐뭇한 표정을 한껏 지은 청명을 말이다.
수많은 기다림과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월척을 낚아 올린 강태공의 얼굴이 이러할까…….
“그래서.”
“…….”
“얼마 낼 건데?”
“……예?”
남궁도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한 사람도 잃고 싶지 않다며.”
“…….”
“그건 거꾸로 말하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값이 그만큼 비싸다는 의미겠지?”
“……도장?”
“그럼 어디 한번 알아보자고.”
청명이 귀기 어린 웃음을 흘렸다.
“남궁세가의 소가주께서는 그 양반들을 살리는 대가로 대체 얼마까지 내실 수 있는지 말이야.”
“…….”
“부디 실망시키지 않으면 좋겠네. 남궁세가는 부자니까. 응?”
“…….”
“으헤헤헤헤헤헤헤헷! 으헤헤헤헷!”
청명이 배를 내밀고 웃어 대자, 갑자기 그 품 안에서 튀어나온 새하얀 담비가 청명의 머리 위로 올라가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끽끽 웃어 댔다.
이 괴이하기 짝이 없는 광경을 보고서야, 뭔가 크게 잘못되어 간단 걸 깨달아 버린 남궁도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