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98화 (999/1,567)

998화.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3)

‘그러니까…….’

홍대광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그의 앞에는 당연하게도 청명이 앉아 있었다.

왜 당연하냐고?

쯧쯧. 그 무슨 뻔한 소리를! 바늘 가는 데 실이 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청명이 가는 곳에는 당연히 홍대광이 있어야 하는 법 아니던가?

이번에는 화산이 워낙 급작스럽게 일을 벌여서 합류하는 것이 좀 늦어졌지만, 애초에 화산에 정보를 물어다 주는 것은 그의 일!

그러니 이제는 당연히 강호 전체의 정세를 살펴야 할 입장이 되어 버린 화산검협 역시 목이 빠지게 그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래.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확실한 거죠?”

“이를 말입니까!”

“흐음. 믿어도 될지…….”

“아이고. 제가 설마 천하의 화산파에게 거짓 정보를 나르기라도 하겠습니까? 거지라고 목숨이 두 개인 것도 아닌데.”

“흐으으음.”

“헤헤. 믿으셔도 좋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

홍대광은 떨떠름한 얼굴로 제 옆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자오개.

개방의 장로……. 아니, 개방의 전 장로인 그가 홍대광보다 반보 앞에 앉아서 저 화산검협 놈에게 정보를 날라 대고 있다.

홍대광조차도 모르는 정보를 말이다.

“격문이라. 고전적인 수를 쓰네.”

청명이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긴 하겠죠.”

“예. 지금 아마 천하 각지의 구파일방에게로 격문이 날아가고 있을 겁니다.”

“그냥 날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개방이 나르고 있는 거겠죠.”

“크, 크흠.”

자오개가 얼굴을 붉힌 채 헛기침했다.

“그…… 개방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누가 뭐래요?”

청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니 자오개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거, 계속 그렇게 박쥐 짓 하시다가는 날개 찢어질 날 올 텐데.”

“그럼 두 다리로 열심히 기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또 거지라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것 하나는 기똥차게 해냅니다.”

홍대광은 자오개를 멍하니 보았다.

‘아니, 이 양반은 자존심도 없나?’

자오개가 누구던가?

방주가 와병하여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진 현 개방에서 비공식적으로 방주의 대리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정리하자면, 병상에 누워 있는 방주를 제외한다면 현 개방의 일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란 의미다. 그런 자오개가 이제 겨우 스물이나 넘었을 화산검협에게 살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천하의 홍대광도 입이 절로 벌어졌다.

“영 신뢰가 가야 말이지.”

“잃은 신뢰는 앞으로 회복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쯧.”

청명이 떨떠름한 얼굴로 자오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혹시 다른 정보 있으면 바로바로 알려 주세요.”

“당연히 그러겠습니다. 그걸 위해 제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이나 못하면.”

청명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자오개가 고개를 재빠르게 까딱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네.”

“……그리고 맹주님께는 말씀을 좀 잘…….”

“알았어요, 알았어.”

“예, 그럼.”

무릎이 없는 것처럼 잘도 꾸벅꾸벅 몸을 숙이던 자오개가 몸을 획 돌렸다. 그러더니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홍대광을 툭툭 걷어찼다.

“뭐 해?”

“예?”

“나가.”

“…….”

얼결에 끌려 나온 홍대광은 어안이 벙벙하여 자오개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 장로님이 왜 여기에 계십니까?”

“왜 있겠냐?”

“……아, 아니. 그…….”

황망한 기색이 홍대광의 얼굴을 스쳤다.

“방이 화산으로 완전히 줄을 타기로 정한 겁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렇죠. 그럴 리가 없…….”

“줄은 원래 양손에 잡는 게 기본이지.”

홍대광이 입을 쩍 벌리자 자오개가 어깨를 으쓱했다.

“방주께서는 천우맹의 줄도 놓치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다.”

“허허허.”

홍대광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이건 개방이 항상 해 오던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방은 강북의 정보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고, 강남의 정보도 웬만큼은 확보하고 있다. 적어도 정파의 영역에서 한정한다면 개방은 대체 불가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다른 문파들과는 달리 힘 있는 곳에 적당히 양다리를 걸쳐도 후환이 적은 문파라는 의미다.

‘이건 의미가 있는 일이지.’

후환이 적다는 것이 후환이 없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개방주가 판단하기에 이젠 천우맹이 위기를 무릅써서라도 양다리를 걸쳐 볼 만한 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즉 화산에 모든 것을 걸었던 홍대광의 선택이 옳았다는 게 증명되었단 뜻이고, 홍대광의 입지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데……. 다 좋은데…….

“아니, 그런데 왜 장로님이 저 인간을 상대하고 계신 거냐 이 말입니다! 애초에 화산과 관련된 일은 제게 일임하기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순간 자오개가 고개를 획 돌려 무시무시한 눈으로 홍대광을 노려보았다.

“일임?”

순간 홍대광은 그의 기세에 눌려 흠칫했다.

“일임? 그래. 너 말 잘했다, 이 거지새끼야!”

“……예?”

“대체 지금까지 뭔 짓을 하고 다녔으면 화산검협이 개방을 저런 눈으로 보는 것이냐!”

“저런 눈이라니요?”

“대체 그동안 네가 어떤 모습을 보였길래, 화산검협이 개방을 하는 일도 없이 빌어먹고 다니는 머저리 집단쯤으로 보냐 이 말이다!”

홍대광이 눈을 끔뻑였다.

“맞는 말 아닙니까?”

“뭐?”

“……거지가 그런 거 아닙니까? 하는 일 없이 빌어먹는. 할 일 빠릿빠릿하게 하는 인간이 왜 거지가 됩니까?”

“…….”

“왜 그렇게 보십니까? 제 말이 틀리기라도 했습니까?”

자오개가 말없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던 건가.’

이런 놈을 하필 화산 옆에다 붙여 놓았다니. 지금까지 화산과의 관계가 멀쩡하게 유지된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여하튼 앞으로 이쪽은 한동안 내가 직접 관리할 테니, 그런 줄 알아라.”

“예?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장로님이라지만, 남이 몇 년 동안 영업해 온 구역을 멋대로 차고 들어오시다니요!”

“이 상종 못 할 종자 보게! 이게 구역 따질 일이냐?”

“아, 아무튼 저는 못 받아들입니다! 제가 그동안 화산에 들인 공이 얼만데! 내가 왜 그 모진 핍박을 버텨 왔는데! 아무리 장로님이라고 하셔도 제 구역 건드리시면 그때는 쪽박 깨는 겁니다!”

“진짜 뒈지고 싶으냐?”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십시오! 저도 어차피 잃을 것 없는 거지새끼라 이 말입니다! 뒈지면 뒈지는 거지!”

두 눈을 희번덕대는 홍대광을 보며 자오개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끄응. 이런 미친놈이…….”

원래 엉뚱한 구석이 있는 놈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리 정신 나간 놈까지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리 사리 분별을 못 하게 되어 버렸단 말인가?

‘화음에 수맥이라도 흐르나?’

수맥까지야 아니다 치더라도, 근묵자흑이라. 몇 년간 화산검협을 가까이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닮아 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본인이 들으면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건 방주님의 지시니 토 달지 말거라!”

“장로님은 이제 개방 소속도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뭐? 소속도 아닌 놈한테 한번 처맞아 볼 테냐?”

“끄으으응.”

홍대광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제 발로 개방을 박차고 나갔다지만, 자오개가 정말 개방 소속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가 되면 은근슬쩍 복귀할 사람에게 핏대를 세워 봐야 고생하는 건 홍대광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화산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삼류 문파이던 시절부터 들러붙어 모진 고생을 해 온 홍대광이 아닌가. 남이 피똥을 싸 가며 일궈 놓은 곳에 윗사람이 슬그머니 발을 뻗는다는데 거품을 물지 않을 이가 누가 있는가?

‘죽어도 못 줘!’

홍대광이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 심정을 아는지 자오개가 이번엔 홍대광을 살살 달랬다.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맡는 건 천우맹에 관련된 부분이니까. 너는 지금처럼 화산에 집중하면 된다.”

“……확실한 겁니까?”

“이놈이 그래도!”

“쩝. 그러시다면, 뭐.”

자오개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방주는 그가 직접 화산까지 맡아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그럼 내가 제명에 못 죽는다.’

자오개는 소림 방장 앞에서도 할 말을 따박따박 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저 청명이란 종자는 그런 그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마주하고 있으면 불이 붙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앞에다 둔 기분이 들었다.

‘묘하지.’

그는 묘한 시선으로 청명이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물론 저 급한 기질 때문에 부담스러울 순 있겠으나…… 분명 그게 전부는 아니었단 말이지.’

개방의 방주나 소림의 방장을 상대할 때 느끼던 위압감 그 이상이 얼핏얼핏 느껴졌다. 청명의 연륜으로 보나 강호에서 차지하는 위상으로 보나 결코 그럴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화산검협을 만난 이들이 하나같이 그를 상대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구나.’

이건 글로 전하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니 정보를 다루는 자는 정보를 그대로 맹신하거나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한 세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세력의 수장이 누구인지를 보는 것이다.

‘구파가 지리멸렬하고 천우맹이 승천하는 이유도 알 것 같군.’

현종과 청명.

천우맹의 중심인 화산을 이끄는 두 사람이 있는 이상, 천우맹의 기세는 나날이 높아질 게 분명하다.

“그런데, 괜찮은 겁니까?”

“음? 뭐가 말이냐?”

홍대광이 좀 우려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방주께서 천우맹에도 줄을 대기로 했다는 것 말입니다.”

그간 개방은 분명 천우맹과 화산에 정보를 제공해 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홍대광의 선에서 취급할 수 있는 정보에 한해서였다. 구파의 내부 동향 같은, 대외적으로 밝힐 수 없는 정보는 홍대광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오개가 움직이기로 했다는 것은, 개방에서 그런 정보까지 천우맹에게 제공하기로 결심했다는 의미다.

그 말인즉.

“……그거 방주께서 천우맹을 구파와 대립하는 곳으로 확정 지었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의미를 찾을 일도 아니지. 이미 그리되어 있는 것을.”

자오개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홍대광은 영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솔직히 좀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사파는 나날이 더 뭉쳐 강북을 위협하고 있는데, 정파가 둘로 분열이 된다는 게.”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 것도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우리가 할 게 아니다.”

“예?”

자오개가 슬쩍 청명이 있는 방을 향해 턱짓했다.

“우리가 아는 것을 저 양반이 모르겠느냐?”

“…….”

“아마 화산검협의 머릿속에는 꽤 오래전부터 이 상황에 대한 구상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대책을 논하는 건 화산검협의 일이겠지.”

“에이. 저놈은 장로님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계획적인 놈이 아닙니다.”

“글쎄. 어떨까?”

“제 말이 맞는다니까요.”

자오개는 홍대광의 말을 말끔히 무시했다.

이번 일로 천하는 확실하게 삼분되었다.

남(南)의 사패련과 동(東)의 구파일방, 그리고 서(西)의 천우맹.

그 경계가 아직 국경처럼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원의 서쪽을 천우맹이 집어삼켰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될 터.

자오개는 우연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이만한 일에는 반드시 사람의 의지가 개입되어야 한다.

“고단하겠구나.”

“예?”

“아니, 아니다.”

홍대광이 묻자 자오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청명이 있는 전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몇 해에 걸쳐 이룬 것인지, 얼마나 긴 고심 끝에 나온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이뤄 나가는 이의 머릿속이 얼마나 치열하고 복잡할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백조가 물 밖에서 볼 땐 우아해 보여도 물속에선 떠 있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을 휘젓는 것처럼, 저 화산검협도 경박해 보이는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모르게 노력하고 있겠지.”

“그거 거짓말이랍니다. 백조는 물속에서 발 안 저어도 그냥 둥둥 뜬대요.”

“……진짜?”

“…….”

“…….”

자오개가 크게 헛기침을 했다.

“여하튼 대단한 사람이…….”

벌컥!

그 순간 청명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아오. 요즘 술병이 작아졌나,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는데 금방 떨어지…….”

양손에 새하얀 술병을 바리바리 챙겨 든 채 터덜터덜 걸어 나오던 청명이 방 앞에 아직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움찔했다.

“…….”

“…….”

묘한 정적이 잠깐 흘렀다. 청명이 어색한 얼굴로 술병 하나를 들어 보였다.

“……드실래요? 조금 남았는데?”

“…….”

아니, 그냥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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