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7화.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2)
소림과 공동이 급히 잡은 장강 유역의 임시 거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설명을 해 보십시오.”
팽가의 가주, 섬전쾌도(閃電快刀) 팽엽(彭曄)의 질책에, 법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방장.”
“듣고 있습니다. 팽가주님.”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대답해 주시는 게 그리 어려운 일입니까?”
“가주.”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크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 하나더군요.”
팽엽이 법정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소림이 협의와 도의를 저버리고 남궁을 매화도에 방치했다.”
법정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소림과 공동이 움직이지 않는 동안, 저 천우맹이 나서서 피해도 없이 남궁세가를 구출해 갔다.”
“…….”
“방장.”
팽엽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을 이었다.
“대답해 주십시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제가 들은 것들이 정녕 다 사실입니까?”
“아미타불.”
법정이 가만히 불호를 외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겠다는 듯이. 하지만 팽엽에게는 그 불호가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 소리로만 들렸다.
“말씀을 좀 해 보십시오!”
“그만하십시오!”
그때 언성을 높인 건 법정이 아닌, 공동파의 장문인인 복마산인(伏魔山人) 종리형(宗利形)이었다.
종리형은 성난 눈으로 팽엽을 노려보았다.
“팽가주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있으십니까?”
“제가 왜 말을 할 자격이 없단 말입니까?”
“소림과 저희 공동이 이 장강에서 어떻게든 해 보려고 노력을 하는 와중에 팽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
“아무리 팽가에서 이곳까지의 거리가 멀다고는 하지만, 지금에야 도착한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나타나 훈수를 두는 건 누가 못 합니까!”
“가문의 허락을 구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팽엽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종리형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역시 할 말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난 뒤였으니까.
“하북팽가만 제때 도착했다면 우리도 다른 수를 낼 수 있었을 겁니다! 애초에 합류하기로 한 원군이 오지 않는데, 저희끼리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남궁이 죽어 나가건 말건 구경이나 하고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구경이라니요! 말이 심하십니다!”
“그럼 제 말이 틀렸습니까?”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법정은 두 사람이 싸우는 꼴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종리형과 드잡이할 것 같던 팽엽이 어느 순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
팽엽이 뜬금없이 사과를 해 버리자 종리형도 말문이 막히는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팽엽을 잠깐 들여다보다 이내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했다.
“아닙니다. 저도 말이 심했습니다, 팽가주님.”
“……저도 제가 이리 늦게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태상장로들까지 나서서 일제히 반대하는 바람에.”
“으음.”
세가는 문파와는 다르다. 때가 되면 알아서 제자를 받는 문파와는 다르게, 세가는 혈연으로 대가 이어진다. 그리고 다음 가주를 이어받을 이의 나이가 적당히 찬 이후에야 승계가 이루어진다.
문제는 그 승계가 빨리 이루어졌을 경우다.
일선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아직 힘이 남은 태상장로들과 선대 가주는 가주가 벌이는 일을 상왕처럼 일일이 간섭해 대기 마련이다.
남궁세가는 워낙 남궁황이 늦둥이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이건 사실 흔한 일이다. 사천당가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지 않았던가. 따지고 보면 세가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세가 같은 경우는 참견해 오는 태상장로들이 하나같이 가문의 어른들이다 보니 말을 매정하게 끊어 내기가 참으로 어려울 터.
“이해합니다.”
종리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심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팽가가 제때 도착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
팽가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글쎄.
설사 팽가가 일찍 합류했다 해도, 법정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아마 더 큰 비난이 쏟아졌겠지. 강호를 지배하는 문파가 셋이나 모여 있으면서도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팽가가 늦게 도착해서 손을 쓸 수 없었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나았다.
“그래서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요. 다음을 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팽엽의 말에 종리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역시 답답하던 참이었다. 법정은 이곳에서도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내내 자리를 지켰다.
“방장.”
팽엽이 부르자, 법정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먼저…….”
“예.”
“죄송하단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노승의 어리석음 때문에 두 문파가 겪지 않았어도 될 치욕을 겪고 있는 터라 면목이 없습니다.”
법정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방장.”
“어찌 이러십니까?”
종리형은 법정을 만류하면서도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청명과 법정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며 넌덜머리를 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림과 척을 질 수는 없었다. 공동에게 소림이 아닌 다른 비빌 언덕이 있었다면, 애초에 장강까지 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어쨌거나 그들은 소림과 한배를 탄 문파다. 죽으나 사나 소림을 믿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 팽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대세가의 주축을 이루던 남궁세가와 사천당가가 오대세가에서 이탈한 상황이다. 그건 곧 남은 세 가문이 서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힘겨루기에 들어갈 거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오대세가가 아니라 삼대세가로 불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셋 중 최고라는 그 작디작은 명성조차도 강호에서는 너무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각축에서 팽가는 반드시 소림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리 소림이 과거의 절대적인 지위에서는 멀어졌다고는 하나, 소림은 소림이 아닌가?
남궁이나 사천당가도 아닌 두 문파 정도야 지금 소림이 가진 권위와 힘으로도 얼마든지 찍어누를 수 있다.
애초에 태상장로들과 전대 가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출정이다. 뭔가를 얻어 오기는커녕 빈손으로 오명만 뒤집어쓰고 돌아왔다는 질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팽엽은 반드시 소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돌아가야 했다.
오히려 팽엽이 종리형 이상으로 법정에게 목매야 하는 상황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모든 일은 결국 끝까지 가 봐야 그 결과를 알 수 있지요.”
“……그 말씀은 아직 이 장강의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법정이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다들 너무 작은 것에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애초에 구파를 소집했던 이유는 남궁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잖습니까?”
“아…….”
종리형이 새삼스럽다는 듯 법정을 바라보았다. 이건 그조차 잊고 있었던 사실이다.
“애초에 저희가 모인 목적은 저 간악한 사패련이 강북을 침략할 낌새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 남궁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지요.”
“맞습니다, 장문인.”
뭔가 빛이 보인다는 느낌에 종리형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종리형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그 눈 가리고 아웅을 믿어 주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세상이 비난한다 해서 제 할 일을 착각한다면, 더 큰 재난이 닥칠 것입니다.”
“……방장께서는 사패련이 이대로 강북을 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저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지 않다면 수로채의 선단이 여전히 장강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에 저희는 장강늑약 때문에 강남을 공격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듣고 보니…….”
종리형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저들이 굳이 저리 진을 치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아무리 저들이 배에서의 생활에 익숙한 수적이라고는 하지만, 보급도 원활하지 않은 배에서 무한정 대기하는 게 과연 쉽겠는가?
“바, 방장. 만약 저들이 공격해 온다면 저희 세 문파로는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솔직히 종리형는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저 사패련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실감해 본 적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대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면 그 피해를 이곳에 있는 세 문파가 고스란히 떠맡게 된다는 점이다.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법정은 종리형의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 주었다.
“다른 문파들에게 격문을 띄우도록 합시다.”
“격문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법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한 지원 요청은 소림의 이름으로만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이번 격문은 오대세가의 수장인 하북팽가와 구파일방의 중추인 공동파의 이름이 함께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 그 무게가 달라지겠지요.”
“으음.”
“저들이 호응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곳의 상황은 제대로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팽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저들이 장강으로 오지 않는다 해도, 이 세 문파가 사패련의 침공을 저지하고 있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으니 나쁠 것이 없는 수다.
“하지만…… 이곳에는 천우맹도 있지 않습니까?”
종리형의 물음에 법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격문을 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천우맹을 믿지 않습니다.”
“……방장.”
“저들의 영웅적인 업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저 매화도에 진입했다가 피해 하나 입지 않고 돌아온 상황은 너무도 부자연스럽습니다.”
“…….”
“죽은 이가 스물만 되었어도 이런 말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열이 죽었습니까? 다섯이 죽었습니까? 죽은 이들은 오직 남궁세가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정말 천우맹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확실히 부자연스럽군요.”
팽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간의 상황을 모두 본 종리형은 여전히 찝찝한 표정이었지만, 팽엽의 귀에는 법정의 말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 말인즉, 이곳의 상황을 눈으로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법정의 저 주장이 좀 더 진실에 가깝게 들린다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전혀 의미 없을지 모른다.
세인들은 불편한 진실보다는 듣기 좋은 거짓을 좀 더 선호하여 믿고 싶어 하니까, 팽엽 역시 저 말을 믿어야만 했다.
양심이 들끓었지만, 애써 꾹 눌렀다. 가문을 떠나올 때 그를 바라보던 가문 어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러니 두 분께서 도움을 주십시오. 그리만 된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나니 방 안에 묘한 공기가 흘렀다. 이를 못 견딘 두 사람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법정은 그런 둘을 굳이 잡지 않았다.
홀로 방에 남은 법정은 천천히 염주를 손에 쥐고 느리게 굴렸다.
그래. 억지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패련이 정말 강북을 습격한다면, 그때도 이 말이 억지로 들릴까?’
그렇게만 되면 모든 상황이 뒤바뀔 것이다.
그들을 비난하던 이들은 일제히 방향을 돌려 천우맹을 비난하고 나설 것이다. 장일소를 죽여 없앨 수 있었으면서도 희생을 피하기 위해서, 제 목숨이 아까워서 발을 뺐다고.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초래했다고 말이다.
때로는 물의 흐름이 바뀌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그 흐름을 바꿔야 할 때도 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
그는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고요함이 내려앉은 방 안에는 염주 알 구르는 소리만 희미하게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