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96화 (997/1,567)

996화.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1)

“경하드리옵니다, 련주님!”

호가명이 장일소를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새삼스럽게 구는구나.”

장일소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흑룡왕이 화산검협의 손에 패한 순간부터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남궁세가가 저 매화도로 향한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일소가 한 것이라고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모든 흐름을 이끌어 간 것뿐이다. 그러니 흑룡왕의 충성을 받아 낸 것은 그저 당연한 결과다.

“이제 수로채는 확실히 련주님의 휘하에 들어오게 되겠군요.”

“길었지.”

장일소가 넌더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사패련 중 가장 약한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수로채를 손에 넣는데도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지겨운 일이야.”

호가명이 존경 가득한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삼 년.

길다고 여길 수도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저 수로채를 남김없이 집어삼키는 데 든 시간이 삼 년이라면? 누가 감히 그 시간을 길다고 폄하할 수 있겠는가?

이건 위대하다는 말로도 모자란 업적이다.

“수로채는?”

“불만 없이 잘 따르고 있습니다. 설령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밖으로 내어 놓지 못할 것입니다.”

“흐음.”

장일소가 강변을 바라보았다. 불을 밝힌 배들이 장강 위를 수놓고 있었다.

“적당히 두엇 정도…….”

“……예?”

“직위가 있는 놈들 두엇 정도를 잡아서 본보기를 보이렴. 모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말이다.”

잠시 주춤한 호가명이 말했다.

“지금은 딱히 죄를 지은 이가…….”

“쯧쯧. 가명아, 가명아. 너는 항상 왜 그리 정직하니.”

“…….”

“죄를 지은 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단다. 중요한 건 죄를 지은 이가 필요하다는 점이지.”

“예, 련주님.”

“문제가 생긴 뒤에 해결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야. 진정 똑똑한 이들은 문제가 생길 여지를 주지 않는 법. 사람이란 게 그래. 누군가가 다른 행동을 하면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기 마련이거든. 그렇게 한번 새겨진 반항심은 억눌릴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단다.”

“…….”

“가장 좋은 건.”

장일소가 손끝으로 입술 아래를 천천히 훑었다.

“애초에 반항심조차 품지 못하게 하는 거지. 그걸 위해서는 적당히 겁을 줄 필요가 있단다. 알겠니?”

“예, 련주님. 본보기가 될 만한 자 두엇을 죽여 돛에 매달아 두겠습니다.”

하지만 장일소는 이번에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명아…….”

“예?”

호가명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장일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언제 죽이라고 했니?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야.”

“하면…….”

“살려야지.”

장일소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채로 매달아라. 껍데기를 벗기면 좋고.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몇 날 며칠을 고통받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게 만들렴.”

호가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중간중간 살을 파내고, 소금을 뿌리고, 벌레가 들끓게 하렴. 죽어 가는 이의 신음을 자장가 삼아 잠들 때마다 나는 죽더라도 절대 저렇게는 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야 하지 않겠니. 저렇게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을 찌르고, 강바닥에 가라앉아 물고기 밥이 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도록 말이다.”

마치 일상에 대해 말하는 듯 평화롭고 담담한 목소리는, 기이하게도 음산하게 내리깐 목소리보다 몇 배는 더 잔혹하게 느껴졌다.

“충성을 얻어 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가명아. 하지만 지금은 공포 외에 다른 건 필요하지 않단다. 흑룡왕 같은 머저리에게도 군말 없이 복종하는 놈들이니 더 강한 힘과 더 잔인한 손속을 보여 주는 걸로 충분하다.”

“……그리하겠습니다.”

순순한 대답에 장일소는 가만히 웃었다.

“그래, 그러면 된단다.”

호가명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장일소의 손속이 특별히 잔인한 것은 아니다. 적을 잔혹하게 죽이는 것이야 사파에서는 흉이 될 만한 일도 아니니까.

문제는, 저들은 이제 장일소가 지배해야 할 수하들이라는 점이었다.

“련주님.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으음?”

“……흑룡왕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흑룡왕은 왜?”

“살려 두실 생각이십니까?”

“흐음.”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이 호가명을 바라보았다.

“네 생각은 어떤데?”

“죽이는 게 나을 듯합니다. 흑룡왕 같은 작자는 절대 진심으로 남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언제고 다시 련주님께 이를 드러낼 작자입니다.”

“길들여지지 않는 늑대다?”

“그 곰 같은 작자에게 늑대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을 겁니다.”

“가명아.”

“예.”

“길들일 수 없는 늑대를 길들이는 법이 뭔 줄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이빨을 모조리 뽑아 버리면 돼.”

장일소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빨을 뽑고, 발톱을 뽑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다리를 잘라 버리면 되겠지.”

“…….”

“그럼 개처럼 충성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나를 물거나 할퀴지는 못할 것 아니냐? 그리되면 개와 다를 게 없어지는 거란다.”

“하지만 그리되어 버린 흑룡왕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쯧쯧. 가명아.”

“예, 련주님.”

“중요한 건 내가 늑대를 굴복시켜 부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란다.”

“…….”

“그 늑대가 날카로운 이를 가졌는가, 그 발톱이 치명적인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지. 중요한 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늑대가 내 우리에 갇혀 목줄을 찬 채 굴복하고 있다는 점 아니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흑룡왕을 죽이고 수로채를 빼앗는 것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새로운 흑룡왕이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지. 수로채를 통째로 발아래 두는 것과는 다르단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야.”

장일소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장강이 아닌 반대편, 저 넓은 강남 땅 쪽으로 말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적어도 둘은 그 의미를 이해하겠지.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단다.”

장일소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수로채를 손에 넣었다는 건, 장일소가 사패련의 세력 중 적어도 오 할 이상은 손에 넣었다는 말과도 같다.

원래는 장일소가 사패련의 련주라고는 하지만, 나머지 셋 중 둘 이상이 연합하여 대항해 온다면 상대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장일소는 사패련 전체와도 싸울 수 있는 힘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얻어맞은 걸 갚아 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 정도면 꽤 이득을 본 셈이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장일소가 웃는 걸 가만 지켜보던 호가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련주님.”

“으응?”

“그럼 이제부터는…….”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이대로 말입니까?”

“그래.”

장일소가 손을 뻗어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 술을 들이켜며 강 건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상에는 시간이 필요한 일도 있지 않니. 느긋하게 저 수로채 놈들이 나를 받아들이기를 기다리자꾸나. 건너편에 있는 적의 존재가 그걸 가능하게 할 거란다.”

“……저 소림이 먼저 발을 빼 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지.”

장일소가 손을 휘휘 저었다.

“소림은 지금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이대로 물러나 버리면 더는 추락을 막을 수가 없어. 잘 듣거라, 가명아. 세상은 힘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소림이 강하다 한들, 한번 잃은 이름은 돌아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 있다고 딱히 수가 생기는 건 아니잖습니까?”

“대신 전운이 감돌게 되지.”

“……전운이요?”

장일소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호가명을 보았다.

“이전 장강참변 때 내가 삼 년의 조약을 맺은 이유가 무엇이더냐?”

“사패련의 내부를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것도 있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저들의 맥을 끊어 놓기 위함이었다.”

“맥이라고 하시면…….”

“아무리 서로 못마땅하게 여긴다 해도 전쟁이 벌어지면 뭉칠 수밖에 없지. 그 예로, 황궁에서 서로 죽일 듯이 이간계를 써 대는 놈들도 외적이 쳐들어오면 일단은 단결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온갖 분란의 씨앗을 다 심어 두고 우리가 당장 강북을 침범할 것처럼 굴었다면 그들이 어찌 했겠느냐?”

“그 모든 것을 묻어두고, 일단은 사패련을 상대하려 들었을 것입니다.”

장일소가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서야 의미가 없지 않니. 그래서 나는 저들에게 충분히 서로에게 이빨을 들이밀 시간을 주었단다.”

“…….”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물러나게 되면 소림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갈 터. 저 중늙은이는 그 사태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저곳에서 외치고 있는 거란다.”

장일소가 과장되게 팔을 펼쳤다.

“곧 전쟁이 벌어진다! 이 조약이 끝나는 순간 피가 흐르고 또 흐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릴 때가 아니다!”

“확실히…….”

“간사한 늙은이지.”

장일소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간사함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구나. 전운이 감돌아 나쁠 게 없지. 소림이 얻는 이득을 내가 똑같이 얻게 될 테니까. 그동안 나는 착실하게 수로채를 완전히 손에 넣고, 뒤에서 흘러나올 불만을 찍어누를 수 있겠지.”

호가명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강 건너를 응시했다.

신기한 일이다.

그가 알기로 매화도에서 화산이 철수한 뒤로 장일소와 소림은 서로의 뜻을 전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마치 서로 짠 것처럼 양측에 이득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장일소는 수로채를 전진 배치해 소림이 할 말에 힘을 실어 주고 있고, 소림은 강변을 떠나지 않으면서 장일소가 수로채를 접수할 시간을 벌어 주고 있다.

‘어쩌면 이게 진정한 결탁일지도 모르지.’

대화도 문서도 필요 없다. 그저 서로가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암묵적으로 나아간다.

결탁이라는 말의 뜻을 고려했을 때 이보다 더 어울리는 상황이 또 있겠는가?

“결국 시간만 끌면 모든 것이 련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흘러간다는 의미로군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의외로 장일소는 살짝 애매한 표정으로 턱끝을 어루만졌다.

“위험했지. 무척 아슬아슬했어. 잘못하면 내 목까지 내어 놓을 뻔했으니.”

딱히 어딘가를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장일소가 어딜 두고 말하고 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변수가 있다면 화산이겠지. 그놈들은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단 말이야. 특히나 그…….”

장일소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청명이라는 변수 하나는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만 생각하면 된다. 청명은 그 길을 착실히 밟아 올 테니까.

하지만…….

‘현종.’

그 늙은이만큼은 대체 어디로 튈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도무지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야.’

이득을 좇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협의를 좇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제 문파를 법정보다도 더 아끼면서 동시에 남을 위해서 그 문파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이라니.

세상에 이런 정신 나간 인간이 또 어디에 있는가?

“모르겠구나. 혹여라도 내 목이 떨어지는 날이 온다면……. 저 빌어먹을 놈들 때문이겠지.”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강 건너를 응시하는 장일소의 눈에 순간 섬뜩한 살기가 스쳤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하지만 언제고 그때가 올 것이다.

그의 손에 화산 전체가 피로 물드는 날이 말이다.

장일소의 혀가 붉은 입술을 느리게 스쳤다. 피 맛이 맴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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