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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95화 (996/1,567)

995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5)

“음, 그럼 우선…….”

현종이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이제는 실질적인 문제를 처리할 시간이었다.

“백천아.”

“예, 장문인.”

“너는 앞으로 소림이 어떻게 움직일 거라 생각하느냐?”

“…….”

순간 말문이 막힌 백천이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동안은 현종이 직접적으로 이런 질문을 해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모두가 모인 이런 자리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백천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이전에 청명이 말한 대로 소림은 한동안 이 장강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수로채가 먼저 발을 빼야 하는데, 아직 수로채가 선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으음, 그렇지.”

현종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조걸이 재빨리 끼어들며 덧붙였다.

“그렇겠죠! 소림의 대왕대머리는 체면을 엄청나게 중요시하잖습니까!”

“……그도 맞는 말이지.”

이제는 조걸이 법정을 대왕대머리라고 불러도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럼 관건은 저 수로채가 언제 움직일까인데.”

현종이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흑룡왕이 부상을 당하지 않았느냐? 치료를 위해서라도 언제까지고 저기에서 버티지는 못할 것 같다만?”

“예.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이 대치가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못할 거라는 말이구나.”

모두의 생각이 모아진 찰나 청명이 입을 열었다.

“아닐걸요?”

“응?”

현종이 의아한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너는 생각이 다르더냐?”

“예, 장문인. 흑룡왕이 부상을 당했으니 수로채가 물러나야 한다는 건 일견 맞는 말 같아 보이지만, 제 생각은 좀 달라요.”

백천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왜 그렇지? 수로채 입장에선 하루빨리 흑룡왕이 회복해야 하잖아. 강자존이 심한 사파에서는 수장의 무위가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

“거꾸로지.”

“응?”

“흑룡왕이 아직 수로채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면 사숙의 말대로 됐겠지. 하지만 여기는 다른 놈이 있잖아.”

‘다른 놈’이 누구인지 즉각 알아챈 백천이 앓는 소리처럼 내뱉었다.

“장일소…….”

“흑룡왕은 수로채에 대한 통제를 잃었어. 수로채는 어쨌거나 사패련의 휘하에 든 문파고, 이곳에는 사패련의 련주가 있지. 흑룡왕이 부상 중이니 일시적으로 그 지휘권을 장일소가 장악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을 상황은 아니야.”

“……맞는 말이군.”

“그리고…….”

청명이 비웃음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 새끼가 이런 상황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지. 아마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흑룡왕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을 거야. 수로채를 착실하게 먹어 치우기 위해서.”

모두가 청명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탐욕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장일소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있겠는가.

“흑룡왕이 가만히 있을까?”

“흑룡왕?”

“그래. 흑룡왕의 성격상, 절대 가만히 참고 있지 않을 것 같은데? 자기 세력을 장일소가 고스란히 먹어 치우는 거잖아.”

“…….”

그 순간 청명이 세상 한심하다는 눈으로 백천을 흘겼다. 백천이 움찔하며 항변했다.

“뭐? 왜!”

“하아……. 내가 이런 걸 사숙이라고. 아이고, 동룡아.”

“하, 하지 마, 이 새끼야!”

청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뭐 그건 두고 보면 알 거고.”

청명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아마 대치는 한동안 이어질 거예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길게.”

“……어째서냐?”

“설명하자면 긴데.”

말을 고르다 청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속이 시커먼 놈들이 하는 생각이라는 건 보통 비슷하거든요.”

여전히 오검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단 기색이 가득했다. 청명은 그저 나직이 웃었다.

* * *

탁해진 눈빛과 그새 몰라보게 수척해진 얼굴까지.

세상을 호령할 듯 패기 넘치던 모습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검게 물든 낯빛은 그저 안타까움만 불러일으켰다.

흑룡왕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커다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장일소를 말이다.

“어디…….”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장일소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

이 사내는 언제나 위협적이었다. 맹독을 품은 독사처럼 말이다.

그러니 지금 흑룡왕이 이 사내를 특별히 더 위험하게 느끼는 것은 한쪽 팔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걱정해 주신 덕분에…….”

흑룡왕이 말을 잠시 멈추고는 고개를 숙였다.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노와 증오, 그리고 공포로 뒤범벅이 되어 버렸을 얼굴을.

“……빠르게 나아지고 있습니다.”

“다행이로군.”

의자에 한껏 몸을 기댄 장일소가 느슨한 얼굴로 흑룡왕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그는 장일소와 대등한 곳에 서 있었다. 사패련의 련주와 부련주라는 직위의 차이는 존재했지만, 적어도 흑룡왕이 장일소에게 일방적으로 숙이는 관계는 아니었다는 소리다.

왜냐면, 장일소가 차지한 련주 자리는 힘으로 찍어 눌러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점차 장일소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흑룡왕에게도 분명 반격의 여지는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말이다.

“나아지고 있다라…….”

장일소가 흑룡왕의 말을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지. 얼른 회복해야지. 그래야 복수도 하고, 옛 명성도 되찾을 것 아닌가?”

“…….”

“일단은 회복에 전념해야겠지. 왼손으로 도를 쓰는 데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장일소의 목소리에 웃음기라고는 한 점도 없건만, 흑룡왕은 자꾸 귓전에서 장일소가 웃어젖히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아니, 실제로도 웃고 있을 것이다.

목소리와 얼굴에는 드러나지 않을 뿐, 지금 장일소는 아마 내심 앙천광소를 터뜨리고 있을 것이다.

“걱정할 것 없어. 자잘한 것들은 내가 처리해 줄 테니까. 한동안은 뒤로 물러나 무위를 되찾는 것에만 전념하지.”

으드득.

흑룡왕이 이를 악물었다.

뒤로 물러나라?

그는 화산에서 풀려난 이후로 수로채를 대면조차 하지 못했다.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도 최소한의 논의와 지시는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흑룡왕은 수로채와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흑룡왕의 뇌리에선 내내 한 가지 생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정말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시기적절하게 장일소가 지원을 오고, 저 화산과 남궁이 매화도로 진격하는 것을 방치하고, 흑룡왕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기 전까지는 개입하지 않았던 그 모든 일이…….

정말 우연일까?

처음엔 과한 생각이라며 넘겼다. 아무리 장일소라 해도, 흑룡왕이 화산검협에게 패하는 것까지 예상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저 모든 것이 운 좋게 장일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그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 그렇게 믿었다.

장일소의 눈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먹이를 앞에 둔 독사처럼 이쪽을 바라보는 저 눈을 보는 순간, 흑룡왕은 모든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라도 있나?”

장일소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흑룡왕은 가까스로 울분을 집어삼켰다. 토해 낼 수 없는 울분은 울분이 아니다. 그저 약자의 설움일 뿐.

“……없습니다, 련주.”

“흐음.”

장일소가 작게 콧소리를 흘렸다.

“련주라…….”

잠시 중얼거린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몸에 착용된 장신구들이 짤랑거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연신 쏟아냈다.

장일소를 알고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소리다. 하지만 그 특별할 것 없는 소리가 지금의 흑룡왕에게는 유부에서 들려오는 귀신을 울부짖음보다 더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저벅. 저벅. 저벅.

장일소가 천천히 흑룡왕에게로 다가왔다.

흑룡왕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죽음을 두려워할 그가 아니다. 단순히 죽음으로 끝날 문제라면 그는 차라리 당당히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그런 것으로 만족할 이가 아니었다. 그의 죽음마저 철저하게 이용하여 모든 것을 앗아 갈 이다. 수로채, 그의 명예, 그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장일소라는 붉은 화염에 뒤덮여 재조차 남기지 못하게 될 터.

저벅. 저벅.

마침내 장일소는 흑룡왕의 한 발 앞까지 와 멈춰 섰다. 그는 흑룡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더없이 부드러운 미소였다.

“왜 떨고 있지?”

“…….”

“내가 너를…….”

붉은 입술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이기라도 할 것 같나?”

흑룡왕이 눈을 감아 버렸다.

그는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왜 다른 이들이 장일소를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본디 범은 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독이 껄끄럽고, 딱히 이득이 없기 때문에 피할 뿐이다. 그렇기에 뱀과 범은 서로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뱀이 범을 통째로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거대하다면? 뱀이 아니라 거대한 독망(毒蟒)이 눈앞에서 그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다면?

범이 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 나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장일소가 나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모두의 생각보다 부드러운 사람인데……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하더구나. 너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어느새 말투가 완전히 달라져 있다. 완벽하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흑룡왕은 그에 대해 한마디의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그 마음속에…….”

장일소의 눈이 새파랗게 빛난다.

“적의가 있기 때문이지.”

“…….”

“개는 제 주인을 두려워하지 않는단다. 든든하고 기껍다 여기지. 훈육을 위한 회초리는 두려워하지만, 제 주인에게 바치는 것은 그저 경외일 뿐이지. 개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적이란다. 알겠니?”

“……련주.”

“그럼 묻겠는데.”

장일소의 입가에 날카로운 미소가 어렸다.

“네 마음속에는…….”

까라락.

소매 속에 감춰진 반지들이 매서운 소리를 내었다.

결코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흑룡왕에게는 천둥보다 더 거대하게 들렸다.

“지금 무엇이 들어 있느냐?”

눈을 뜬 흑룡왕이 장일소를 마주 보았다.

화사한 외양과 달리 한없이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그 두 눈을 보는 순간, 흑룡왕의 속에서 무언가 부서졌다.

“저는…….”

“그래. 대답해 보렴.”

“저, 저는…….”

흑룡왕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굽었다.

쿠웅!

이내 무릎이 바닥과 맞닿았다.

두려움과 공포로 범벅이 된 얼굴로, 흑룡왕은 덜덜 떨며 힘겹게 고개를 숙였다.

“제게 있는 것은…… 그저 경애뿐입니다.”

무릎 꿇은 흑룡왕을 내려다보는 장일소의 시선이 싸늘했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던 장일소는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오색 반지로 치장한 그 흰 손이 가만히 흑룡왕의 머리에 닿았다. 순간 흑룡왕의 전신이 흠칫 움츠러들며 짧게 경련했다.

“흐음.”

짧게 콧소리를 낸 장일소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래.”

흰 손이 흑룡왕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착한 아이로구나.”

하늘에 뜬 달이 구름 뒤로 천천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지독하게 짙은 어둠이 장강 위로 고요히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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