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4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4)
“청명아.”
“네?”
현종이 가만히 청명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네 입에서 지금과 비슷한 말이 나온 걸 내 몇 번 보기는 했다.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것 같구나.”
화산의 장문인 현종, 그가 깊은 무게를 담아 청명에게 물었다.
“내가 보기에, 너는 지금부터 해 나가야 할 대화가 이제까지와는 달라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은데. 내 짐작이 맞느냐?”
“예, 장문인. 맞습니다.”
“하면.”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잠시 후에야 다시 이었다.
“지금까지와 달라져야 한다고 여기는 연유가 있느냐?”
굳이 현종이 이 질문을 던진 까닭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지금부터 이어질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건 실로 합당한 결정이라 할 수 있었다.
……마주치는 손뼉이 정상적이었다면 말이다.
“연유요?”
“그렇단다.”
“……이유 말씀이시죠?”
“…….”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여긴 현종이 슬쩍 청명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다 이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청명의 고개가 옆으로 삐딱하게 꺾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쟤는 왜 또 갑자기 발작하지?’
현종이 대체 뭘 했다고!
“장문인.”
“……그, 그래.”
“제가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으, 으응?”
현종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굳이 애쓸 필요 없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정말로.
하지만 그도 눈치가 있다 보니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동안 장문인은 저를 정신 나간 놈쯤이라 생각하셨을지 모르겠는데.”
“……그게 보이더냐?”
“…….”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현종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너를 그리 생각할 리가 있느냐? 아니지. 아니고말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크흠.”
청명이 이번에는 넘어가겠다는 듯이 작게 헛기침했다. 하지만 현종은 청명의 눈 아래가 달달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장문인.”
“그, 그래.”
“제가 화산에 들어왔을 때 화산에 뭐가 있었습니까?”
“……으응?”
“막말로 저 거지새끼들만 바글거리는 개방만도 못한 문파가 화산 아니었습니까!”
“그, 그 정도까지는…….”
“뭐 맞는 말이죠.”
현종의 소심한 반박은 현영에 의해 단번에 제압되었다.
“개방이 화산보다 돈 많았지. 거지새끼들이 더 잘 먹었고.”
“…….”
아니,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거 듣기에 따라서는 화산이 거지보다 못했다는 말 같아서…….”
“그게 뭐 틀렸습니까? 거지는 빚은 없지.”
“…….”
말문이 틀어막힌 현종은 괜히 헛기침만 했다.
“여하튼!”
청명이 눈을 부라렸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화산이 어디 사람 사는 문파였어요?”
“…….”
“입문해 보니 무공은 어디 팔아먹고 다 날아갔지!”
무각주 현상과 백매관주 운검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문파에 돈은 없고 빚만 잔뜩 있지!”
현종과 현영이 먼 천장을 바라보았다.
“애새끼들은 수련은 안 하고 저들끼리 건달 놀이나 하고 있지!”
“그, 그 이야기를 지금 왜 꺼내?”
“조걸아, 주둥이 다물어라.”
“……예, 사형.”
청명이 콧김을 뿜어내며 소리쳤다.
“그런 상황에서 뭐? 방향? 논의?”
“…….”
그의 눈알이 희번덕거릴수록 모두가 더 최선을 다해 시선을 피했다.
“논의고 나발이고 당장 종남 새끼들한테 두들겨 맞을 판인데! 그거부터 어떻게 해야지!”
“그, 그렇지. 그렇지.”
“종남 새끼들 처리해 놨더니, 무당 새끼들이 시비 걸고, 그거 좀 정리했더니 이제는 소림에 사패련에!”
“지, 진정 좀 하거라, 청명아.”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지경인 청명의 얼굴에, 현종이 기겁하여 만류했다.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지금이야 추억이 되었지만, 어디 청명이 입문했을 때 화산이 정상적인 문파였던가? 그때 청명이 화산의 장부를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모조리 본산에서 쫓겨나 현판을 내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생각하니 또 빡치네? 뭔 놈의 문파가……!”
모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생각해 보면 그들의 잘못도 아니건만 괜히 뭔가 민망했다.
“후욱!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해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힌 청명이 모두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당장 눈앞에 닥친 것부터 쳐 내기 바빴죠. 안 그러면 문파가 망할 판이었으니까.”
“그래, 그래.”
현영이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말고! 사람이 일단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뭐라도 하지. 당장 내일 밥을 굶을 판인데 뭘 할 수 있느냐?”
“크으. 역시 장로님은 다 아시네요.”
“아암. 알고말고. 네가 참 큰일을 했지.”
“헤헤. 제가 뭘 했다고요.”
청명이 히죽히죽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편애가 들끓는 현영을 향해 그 누구도 불만 어린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일단 덕분에 저놈이 진정된 건 사실이니까.
청명이 고개를 들어 모두를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대처하는 수순이었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에요. 아시다시피 화산은 이제 나름 괜찮은 문파가 되었거든요.”
다른 문파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청명이 제법 겸손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만큼이나 현재 강호에서 가지는 화산의 입지는 거대했다.
물론 아직도 문파의 허리를 책임져야 할 중진과 고수가 부족하다는 약점은 있었지만, 그걸 극복하고도 남을 만큼의 평판과 명성을 쌓았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겁니다, 장문인.”
청명이 현종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장문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구파일방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으시죠?”
“으음.”
현종이 무겁게 침음성을 흘렸다.
멀리 돌아오기는 했지만, 청명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그동안 화산은 무언가를 선택할 여력이 없었다. 그간 화산이 벌인 일의 대부분은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었고, 당장 닥쳐 오는 위기를 해결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말이지.’
청명의 말에 담긴 진짜 속뜻은 하나였다. 이제는 화산에도 여유라는 게 생겼다. 정말 실낱같은 여유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잠시간 숨을 돌릴 수는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논의하고 협의할 수 있다.
화산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말이다.
현종이 가만히 모두를 둘러보았다. 모두 그를 바라봐 오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건 그저 내 뜻에 불과하다만…….”
그렇기에 현종은 굳이 이 말을 붙였다. 청명은 그에게 자신이 화산의 검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검을 휘두를 사람은 오직 현종이라고.
하지만 그건 청명의 의지일 뿐이다.
현종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는 청명이라는 검을 휘두를 사람이기보다는 청명이라는 사람과 함께 나아가는 이가 되고 싶었다. 아니, 청명뿐 아니라 화산에 있는 모든 이들과 함께 걷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화산은 그렇게 여기까지 온 문파니까.’
결심을 굳힌 현종이 입을 열었다.
“청명아.”
“우리는 앞으로 더 이상은 구파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러자 청명이 표정 없는 얼굴로 되물었다.
“어째서요?”
현종은 잠시간 고민 끝에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 구파일방과 거리를 둔 것은 내 본의가 아니었다.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은 과거 화산의 위세를 회복하여 선대의 장문인들께 떳떳한 후인이 되는 것이었지.”
“예.”
“하여 나는 내심 구파일방으로의 복귀를 바라 왔단다. 비록 어느 정도 관계가 틀어지기는 했지만, 저들이 먼저 손을 내민다면 다시 좋은 관계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청명이야 워낙에 과격한 편이라 치를 떨지만, 청문이 지금 장문인이었더라도 현종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깨달았다. 저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우리와 너무도 다르구나.”
현종의 얼굴에 살짝 침통한 기색이 스쳤다. 그 역시 이번 일을 통해 느낀 실망이 컸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의 어조는 한없이 부드럽고 또 조심스러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그저 나의 생각일 뿐이다. 물론 나는 화산의 장문인이다. 그러나 화산은 장문인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문파가 아니다. 아니,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문파다.”
현종이 물처럼 고요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는 어찌 생각하느냐?”
현영이 코웃음을 쳤다.
“이제 와 우리가 친하게 지내겠다고 한대서, 법정 저 노망난 영감탱이가 받아 주기는 한답니까?”
“……노망난 영감탱이는 좀…….”
“구파일방을 이루는 두 축이 소림과 무당 아닙니까?”
“그렇지.”
“소림의 방장은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정면으로 들이받아 버렸고, 무당의 장문인은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올라타 두들겨 패 버렸는데! 저놈들이 미쳤다고 우리랑 잘 지내 주겠습니까!”
“…….”
모두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돌아갔다.
“왜? 뭐!”
하지만 청명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어깨를 쫙 폈다.
“그러니 공연히 애쓰다 헛물켜지 마십시오. 애초에 저 양반들 머릿속에는 우리와 잘 지내 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래야 합니까.”
“으음.”
내내 잠자코 듣기만 하던 운검이 빙긋 웃었다.
“말씀이야 좀 과격하셨지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제 저들과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왔습니다.”
“…….”
“그리고 설사 저들이 그걸 원한다 해도, 장문인의 말씀대로 저들의 길은 화산의 길과 다릅니다.”
“네!”
“맞습니다, 장문인!”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말이 쏟아졌다. 현종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화산이 강해졌기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다. 화산은 나약한 문파가 가지는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문파다. 그렇기에 옳지 않은 길로는 가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면.”
이번에는 현종이 모두에게 물었다.
“너희는 화산이 어떤 문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
이번에는 모두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간단히 대답하기에는 너무 깊은 질문이었다.
그때, 현종의 시선은 다름 아닌 윤종에게로 향했다.
“윤종아.”
“예, 장문인.”
“대답해 보거라. 네가 바라는 화산은 어떤 곳이더냐?”
현종의 질문에 윤종의 눈빛이 아득하게 깊어졌다.
“장문인.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대단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으음. 그렇더냐?”
현종이 아쉬운 마음에 되물으니 윤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목소리에 확신이 어려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윤종에게로 향했다.
“이번에 남궁 소가주가 도움을 청해 왔을 때, 저는 누구보다 그를 돕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돕기 위해 장강으로 달려가는 화산이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이제껏 저는 화산에서 수많은 것들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만큼 제가 화산의 문도라는 것이 뿌듯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랬더냐?”
“예, 장문인.”
윤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저는 제가 느낀 것을 행하려 합니다. 비록 어렵고 고단한 일일지라도 제게 도움을 청해 오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과거 화산이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힘들고 지친 이들을 돕기를 마다하지 않으려 합니다.”
현종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양심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저 행하는 곳. 제가 생각하는 화산은 그런 곳입니다.”
윤종의 말이 끝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내 화산이 있고, 윤종이에게는 윤종의 화산이 있을 것이다.”
그가 화산의 모든 제자와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의견으로 모아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각자가 이루고자 하는 화산을 이뤄 나간다면 결국은 그 누구의 생각보다 나은 곳이 될 수 있으리라…….”
현종이 살짝 말끝을 흐렸다가 눈을 감으며 뇌까렸다.
“나는 그리 믿는단다.”
묵직한 침묵이 방 안에 내려앉았다.
현종의 말에 어린 깊은 울림이 모두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래. 그러면 될 것이다.’
앞으로도 그들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아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관철해 나간다면 그 숱한 어려움도 언젠가는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들도, 세상도 모두 알게 되리라. 화산이 어떤 문파인지 말이다.
현종이 막 입을 다시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돼요?”
“…….”
슬그머니 눈을 뜨니 청명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각자가 이루고자 하는 화산?”
“…….”
“진짜요? 그럼 저도 자제 안 해도 되는 거죠?”
“…….”
아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꾸나, 청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