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3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3)
장문인의 임시 처소에 화산파의 중진들이 모여 앉았다.
중진이라고 해 봐야 장로들과 운자 배, 그리고 오검 정도였지만, 어쨌거나 이들이 현 화산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들이니까.
“왜 부르셨답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현영의 질문에 현상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 불러 놓고 장문인은 어디 가셨고요?”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결국 현영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아니, 사형이 알아야 할 일이니까 묻는 것 아닙니까! 하는 게 뭐 있다고 다 모릅니까? 장문인이나 잘 따라다니실 것이지!”
“하, 하는 게 없다니, 이놈아! 나도 나름 바쁘다.”
“예?”
현영이 매섭게 눈을 부라리자 현상이 머쓱한 얼굴로 크게 헛기침을 했다.
“……재경각은 많이 바쁘냐?”
“많이 바쁘냐고요? 많이?”
“…….”
“다짜고짜 장원 차지하고 드러누우면 밥은 알아서 하늘에서 떨어진답니까? 이 많은 놈들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걸 누가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렁각시가 해 줍니까?”
“크, 크흠.”
현상이 말문이 막혔는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한번 터진 현영의 분노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장강 오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분명히 나한테 싸움박질은 안 할 거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건 내가 한 게…….
“그런데 싸움박질은 있는 대로 다 해서 옷 죄다 찢어 먹고! 갑자기 여기서 사람 치료해야 하니까 약재를 구해 오라고 하질 않나! 그리고, 뭐요? 남은 곡식이고 뭐고 다 팔아 젖히라더니 또 나중엔 여기에 한동안 머물 거니까 애들 먹일 준비를 하라고?”
현영의 눈이 서서히 까뒤집어지기 시작했다.
현상이 기겁하며 얼른 그를 만류했다.
“내, 내 너의 노고를 모르는 것이 아니잖으냐. 그저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흐르니까…….”
“상황이고 나발이고! 그럴 거면 여기서 좀 먼 데로나 가든가! 하필 저 구파일방 놈들 면전에 자리를 잡아서 애들 옷가지 하나까지 신경 쓰게 만듭니까! 저것들만 없었어도 애들이 알궁둥이로 다니든 말든 그냥 냅두면 되는데!”
“커흐흠!”
현상이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가 딱히 대단한 역할을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니는 현영에게 그런 해명을 하기도 민망했다.
“일을 벌일 거면! 뒤처리하는 사람도 생각을 해 주고 벌여야지! 그냥 다짜고짜 벌여 놓고는 아이고, 이제 나는 모르겠다고 손 떼 버리면? 그거 누가 수습합니까? 예? 누가 수습하냐고요!”
“지, 진정 좀 하거라. 애들이 보고 있잖느냐.”
현영이 슬쩍 오검을 돌아본다. 눈이 마주친 이들이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야! 숙여, 숙여!’
‘눈 마주치면 죽는다.’
이럴 때 잘못 걸리면 정말 뼈도 못 추린다.
제아무리 청명이 잘나가고, 백천이 인정받고, 장문인이 제 권위를 되찾아 가는 상황이라고 해도 화산이 인정하는 문파 내 최고 실권자는 단언컨대 현영이었다.
“끄응. 화산이 잘돼서 좋기는 한데……. 정말 좋기는 한데……. 옛날에는 그냥 어딜 가더라도 거적때기 하나 던져 주면 됐는데, 이제는 입히는 것 하나, 먹이는 것 하나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현영의 푸념과 넋두리에 모두가 민망한 낯으로 고개를 숙였다.
사실 다른 곳들은 이곳에서도 하는 일이 딱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경각은 인원은 그대로인데 하는 일만 몇 배로 불어난 상황이다 보니, 말 그대로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 인원을 조금 보충하는 게…….”
“내가 그걸 보충하고 싶다고 해서 보충이 됩니까? 재경각 일 좀 도우라고 하면 수련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눈알 돌아가는 놈들인데!”
“…….”
후욱 깊게 심호흡한 현영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장문인은 왜 안 오시는 겁니까! 바빠 죽겠는데 사람을 불렀으면 와 계시든가!”
물론 현영은 몰랐다.
문 근처까지 다가왔던 현종이 현영의 열받은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돌아섰다는 사실을 말이다. 천하의 현종조차도 머리에 열이 찬 현영은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화산에는 현영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는 있었다.
“에이. 뭐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러세요?”
“으응?”
오검의 얼굴이 순간 검게 죽었다.
‘와, 장로님 목소리 다른 거 봐.’
‘세상에 차별을 이렇게 대놓고 해도 되나?’
‘방금 목소리 인자해진 거 들으셨어요? 나 소름 돋았어.’
청명의 말을 들은 현영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건 무슨 말이냐?”
“뭐 그렇게 신경 쓸 것 없다는 거죠. 저희가 저 구파 놈들한테 굳이 잘 보일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그 말도 맞지.”
현영이 역시 청명이가 잘 안다는 듯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청명아. 구파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겠지만 세인들의 눈은 신경 써야 하는 법이란다. 지금 우리를 보려 하는 이들은 다들 우리가 매화도에서 활약한 것을 알 텐데, 추레하게 있는 모습을 보면 어찌 생각하겠느냐?”
“크으. 제가 그 생각은 못 했네요! 역시 장로님이세요! 장로님 아니었으면 저희는 다 거지꼴로나 다녔겠죠. 지금 화산이 여기저기서 좋은 말 듣고 다니는 것도 다 장로님이 힘써 주신 덕분 아니겠어요?”
“쯧쯧. 그게 무슨 말이냐? 그게 어찌 내 덕이야! 다 네 덕이지!”
“에이. 제가 뭘 했다고.”
도란도란 치사를 주고받는 두 노손을 지켜보던 백천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이게 참…… 틀린 말은 없는데. 아니, 따져 보면 정말 다 맞는 말인…….
“백천.”
“예? 예!”
백천이 화들짝 놀라 현영을 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표정이 왜 그러느냐?”
“무, 문제라니요, 장로님.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흐음.”
현영은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의 뒷머리에 식은땀이 축축하게 스몄다.
“어쨌든 너희는 방금 말한 대로 몸가짐을 정갈히 하고 다니거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장로님!”
오검이 기합 바짝 들어간 얼굴로 대답했다.
외부에서는 화산을 대표하는 고수로 칭송받기 시작한 오검이지만…… 안타깝게도 화산 내부에서 그들의 입지는 예전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설사 달라졌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장문인조차 눈치를 보게 하는 화산 최대 실권자에게 누가 감히 대항하겠는가?
“크흠!”
그 순간 커다란 헛기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내가 늦었구나.”
점잖게 말하는 현종을 보며 현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느낌이 아까부터 문 앞에 계셨던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 있느냐. 지금 막 도착한 참이다.”
“……그런 걸로 해 두시지요.”
“…….”
현종은 살짝 어깨를 움츠리며 상석에 앉았다. 두 눈에 순간적으로 비애가 어렸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자들은 그런 그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다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낼 뿐.
‘그런 눈빛 보내지 말거라. 울고 싶어지잖느냐?’
뭘 어쩌겠는가?
원인이야 간단하다. 워낙 없이 살던 시절에 재정에 대한 전권을 맡겨 놓았던 덕에 화산이 돈을 갈퀴로 쓸어 담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 전권을 찾아오지 못했다.
막말로 아무리 현종이 파렴치하다 해도, 빚에 허덕일 때는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맡겨 놨던 일을 돈 생기고 나니 돌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덕분에 현종은 이제 천우맹의 수장이자 전 강호를 질타하는 화산의 장문인임에도 현영에게 용돈을 받아 쓰는 처지를 면치 못했다.
소매로 눈가를 살짝 훔친 현종이 표정을 정제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함이다.”
그가 진지한 이야기를 꺼내자 제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현종은 새삼스레 자신이 권위가 과거와 비할 바 없이 높아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물론 그와 화산이 한창 바닥을 헤맬 때도 이 착한 녀석들은 그의 권위를 존중해 주었지만, 그때와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알다시피 우리는 이번 일로 구파와 크게 척을 졌다.”
“으음.”
이리될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천하의 구파일방 아닌가?
그런 곳과 척을 지는 것은 천하의 어떤 문파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저 사파들마저도 원치 않을지 모른다.
“하여 앞으로 우리의 입장을 확고히 정할 필요가 있겠구나.”
현종의 말에 운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장문인. 외람된 말일지는 모르지만…….”
“말하거라.”
“그런 일이라면 저희보다는 당가주님과 논의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이건 화산의 일이라기보다는 천우맹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치를 따지자면 그럴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나는 그것이 마뜩잖다.”
“……어째서입니까?”
“왜냐면 나는 천우맹의 맹주이기 이전에 화산의 장문인이기 때문이다.”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야 할 길이 확연히 보이지 않을 때이기에 더욱 그렇다. 논의를 해야 한다면 너희와 먼저 하고 싶구나.”
그 말에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입지가 달라진다고 해도 현종은 그저 현종일 뿐이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함께 배곯던 옛 시절에도 그들을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던 그 장문인 말이다.
“그래서 말이다, 청명아.”
“네?”
현종이 청명을 가만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흐음.”
청명이 제 뺨을 긁적였다.
화산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청명에게서 뭔가 특별한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이런 질문이 있을 때마다 청명이 놈은 언제나 남들은 생각지 못하는 발상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그러한 일의 반복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청명의 입이 열리는 순간 깨졌다.
“질문이 조금 잘못된 것 같습니다, 장문인.”
“으음? 질문이 잘못되었다?”
“예.”
청명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질문에 저는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가 없네요.”
그는 잠시간 말을 멈추고 현종을 지그시 보았다.
그 깊디깊은 눈을 보는 순간 현종의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장문인께서는 어찌하고 싶으십니까?”
“……나 말이더냐?”
“예, 장문인.”
현종이 살짝 대답을 머뭇거리자 청명이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둘러보앗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어찌하고 싶은지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화산이 가려는 길은 화산이 함께 정해야 하는 법이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전에, 무엇을 하려는가가 정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
그리 대단치 않은 말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 당연한 말이 이곳에서만큼은 큰 의미를 지녔다.
‘저 독불장군이…….’
‘……세상에.’
대부분이 놀라서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손을 뻗어 청명의 얼굴 앞에 대고 흔들어 댔다.
청명이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아니, 뭐 잘못 처먹었나 싶어서. 열은 안 나고?”
“…….”
다행히 청명이 나서기 전에 윤종이 조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낑낑대는 조걸을 두고 청명이 다시 말했다.
“같이 이야기해 보죠.”
모두가 청명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앞으로 화산이 가야 할 길에 대해서.”
굳은 의지 가득한 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