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2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2)
“부상자들은 어떻습니까?”
남궁도위의 물음에 남궁명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죽는 이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워낙 뼈대가 튼튼한 녀석들이라.”
“다행입니다.”
“당가가 와 준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사천당가의 의술이야 중원에서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예, 그렇지요.”
사천당가는 독의 조종이지만, 의술의 조종이기도 하다. 암기를 다루는 특성상 수많은 중독과 부상에 시달리다 보니, 자연히 의술도 함께 발달한 것이다.
“다만…….”
슬쩍 말꼬리를 흐렸던 남궁명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매화도에서 돌아온 여든둘 중, 열 정도는 다시 검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남궁도위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한 일이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그 매화도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니까.
“그리고 남은 이들 중에서도 이전의 무위를 회복할 수 없는 이들이 꽤 될 겁니다.”
“……그렇군요.”
남궁명은 한숨을 억지로 참아 냈다.
생각했던 이상으로 피해가 크다. 그나마 전력의 삼분지 일은 보존했다고 생각했는데, 남궁명의 말대로라면 사분지 일이나 남았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그들이 제아무리 창천남궁세가라지만, 이 정도의 전력으로는 세가라는 이름을 쓰기도 민망하다.
‘다른 때 같으면 봉문을 하고 가문을 정비하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하다. 원한이 있는 이들이라고 해도, 문파가 봉문을 선언하면 한발 물러서 두고 보는 것이 강호의 관례다. 하지만 그 관례를 저 사파 놈들이 지킬 리가 없다.
지금 남궁세가가 봉문을 선언하면 다른 문파와의 관계가 끊어진 틈을 타 저 사패련이나 수로채가 습격해 올 확률이 높다. 그리되면 남궁세가는 정말로 끝이다.
“대주님.”
“말씀하시지요, 소가주.”
“안휘를 떠나야겠습니다.”
남궁명의 입에서 무거운 침음이 흘러나온다.
지금 당장은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문이 뿌리내린 곳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저 사천당가가 사천을 떠나는 것만큼, 저 화산이 섬서의 화음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 방법밖에는 없겠지요.”
“예.”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휘를 떠나며 많은 것을 잃게 될 겁니다.”
당장 안휘를 떠나게 된다면, 그곳에 구축해 놓은 상권이나, 문파들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떠나지 않으면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겁니다.”
“……으음.”
“대주님. 아니, 숙부. 남궁세가가 남궁세가이기 위해 내린 결정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남궁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가주. 소가주는 지금 가주의 대행이십니다. 제게 허락을 구하지 마시고 그저 명하십시오.”
“……숙부님.”
“저는 소가주께서 내린 결정이 옳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궁명이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가주께서도 이 결정을 지지하셨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궁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니까요. 어디에서든, 정신이 살아 있다면 남궁은 남궁일 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남궁도위를 보며 남궁명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소가주.”
“……예, 숙부님.”
“소가주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가주께서 살아 계셨다면 안휘를 떠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지요?”
남궁도위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남궁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 생각 마십시오, 소가주.”
“…….”
“가주는 가주시고, 소가주는 소가주입니다. 저는 소가주가 선대를 뛰어넘는 가주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숙부님.”
부담되는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힘이 나는 말이기도 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남궁세가의 미래를 위해서.
이미 한번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는 남궁세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남궁도위가 굳건해야 할 테니까.
“그래. 가문을 떠나면 어쩌실 셈입니까?”
“화산에 의탁할 생각입니다.”
“……의탁이라 하셨습니까?”
“예.”
남궁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안휘를 떠나는 것까지는 찬성이다. 하지만 굳이 화산에 의탁할 것까지는 없잖은가?
“소가주. 남궁세가에 쌓인 재물이라면 분쟁 없는 지역에 새로 자리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한데 왜 굳이…….”
남궁도위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남궁을 위해서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지금껏 화산보다 더 급격하게 성장한 문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배워야 남궁의 미래를 밝힐 수 있습니다.”
“……화산의 장문인 현종진인께서 그리 각박한 분이 아니시니, 굳이 의탁하지 않아도 조언은 충분히 해 주실 것입니다.”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남궁도위의 두 눈에 단호한 빛이 어렸다.
“적당히 조언을 받아 노력하는 정도로는 남궁세가는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수 없을 겁니다. 지금껏 세가는 수많은 고난을 극복해 왔지만,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백 년 안에 처음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남궁명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피해로 따지자면 과거 마교와의 전쟁 때 입은 피해가 더 극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을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때는 이 문파 저 문파 할 것 없이 모두가 피해를 입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강호 내에서 남궁세가의 입지가 추락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남궁을 제외한 다른 문파들의 힘이 넘쳐나지 않는가.
“불편함 같은 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제 대에서 남궁의 이름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소가주.”
“도와주십시오. 숙부님. 숙부님께서 도와주셔야 가솔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남궁명이 남궁도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 굳건한 두 눈을 외면하지 못하고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궁도위의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남궁명이 한숨을 쉬었다.
“그 선택으로 가장 힘이 들 사람은 소가주시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검수들은 몰라도 가솔들을 모두 데리고 화산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가솔들은 화음에 장원을 짓고 머무르게 할 생각입니다. 이해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이미 대책을 다 세워 놓은 모양이었다. 이쯤 되자 남궁명은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화산에서 무엇을 보신 겁니까?”
“본 게 아닙니다.”
“예?”
“보러 갑니다, 숙부님.”
남궁도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화산은 제가 알던 문파들과는 다릅니다. 소림과도 다르고 남궁과도 다릅니다.”
“…….”
“다르다는 것은 알지만, 어째서 다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가려 합니다. 그들이 왜 우리와 다른지 충분히 알고 배우기 위해서요.”
못 말리겠다는 듯 남궁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따뜻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가주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이 숙부도 열심히 한번 배워 보겠습니다.”
“예. 숙부님!”
“대원들을 설득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그 순간 남궁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가 이렇게 소란하지?”
아까부터 자꾸 밖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인들이 있는 곳에서 병장기 소리가 나는 게 뭐 그리 대단하겠냐마는, 이 소리는 남궁세가에서 자라온 남궁명이 듣기에도 평범하질 않았다.
“혹시 뭔 문제라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그들이 있던 방의 문짝이 폭발하듯 부서지더니 안쪽으로 한 사람이 날아들어 왔다.
“뭐, 뭐야!”
“적습인가?”
두 사람은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솟구치듯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검을 움켜잡은 그들의 바로 앞에, 날아온 이가 철푸덕 엎어졌다.
“억?”
“조, 조걸 도장?”
조걸이 입에서 피를 뿜어 내며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남궁도위의 눈에 경악이 스친 바로 그 순간, 조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남궁도위가 황급히 물었다.
“도, 도장! 괜찮으시오?”
“개…….”
“개?”
“개…….”
“…….”
“개…새끼…….”
툭.
조걸이 끝내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이미 기절했음에도 입에서는 빨간 게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
남궁도위가 멍한 눈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아아! 이 개자식아아아!”
마침 화산정검 백천이 얼굴을 걷어차여 뒤로 쏜살처럼 튕겨 나가고 있었다. 백천의 얼굴을 밟아 버린 청명은 눈을 희번덕대며 다음 먹잇감을 찾았다.
“마, 막아!”
먼저 소리를 내는 쪽이 위험하다는 건 흔하디흔한 진리다. 윤종의 잘못은 그 흔한 진리를 몰랐다는 것뿐이다.
그 대가로 윤종은 담벼락에 사람 모양의 구멍을 만들어야 했다.
“혼난다!”
유이설이 허공을 내밟으며 청명에게 달려들었다. 남궁명은 마른침을 삼켰다.
“……제정신인가?”
충격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곳은 장강에 인접한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구파뿐 아니라 사패련의 무력대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곳에서 이리 요란하게 수련을 한다고?
‘심지어 매화도에서 전투를 치른 지 이제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거늘?’
서로 검을 휘둘러 대는 모양새가 한눈에 봐도 보통 기세가 아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수련 정도가 아니라, 정말 누가 하나 다쳐도 이상하지 않은 수련을 해 대고 있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와 장소가 있는 법.
이 수련은 때도 어긋났고, 장소도 어긋났다. 게다가 가장 이상한 건, 누구 하나 이 상황을 이상하다 여기지 않는 것 같단 점이었다.
“야, 이 새끼야아아아아!”
다들 입으로야 불만이 가득하지만, 누구 하나 물러나지 않는다. 수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저 몸을 돌려 장원 밖으로 나가 버리면 된다는 걸 모를 이들이 아닐 텐데…….
게다가 청명 역시 남궁명을 놀라게 했다.
저 화산검협은 흑룡왕을 이길 정도의 강자다. 못해도 남궁황과 비견될 만한 강자라는 의미다. 물론 남궁세가 역시 남궁황이 있었으니 강자의 존재 유무에서는 밀릴 것이 없다.
하지만 그 남궁황이 세가의 검수들과 직접 검을 맞대며 수련을 한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던가?
절정에 오른 검수들은 대련보다는 자신의 검을 돌아보는 것을 우선시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실력이 높아질수록 자연히 직접적인 대련의 횟수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건 검가에서 살아온 남궁명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절정고수 하나를 더 보유하는 게, 어설픈 고수 백을 보유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건 상식이기에 검문에서도 오히려 절정 검수의 고립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남궁명에게 제 실력의 반도 되지 않는 이들과 악다구니를 쓰며 싸워 대는 청명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래서 강한 거구나……. 이래서…….”
화산이 가진 강함의 비밀이 지금 살짝 엿보인 것만 같았다.
저만한 고수가 하루가 멀다 하고 대련을 해 주는데 어떻게 강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저 청명이라는 이의 목적이 제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화산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부럽네요, 숙부님.”
“소가주…….”
남궁도위는 아련한 표정으로 앞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제 아버지인 남궁황과 대련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뭐…… 지금부터도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니까요.”
“예? 소가주, 설마 지금……?”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남궁도위가 검을 뽑아 들었다.
“아,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데!”
남궁명이 급히 만류했지만 남궁도위는 들은 척도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신이 난 듯 입가에 맺힌 웃음을 본 남궁명은 그를 만류하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화산이라.’
어쩌면 화산에 의탁하기로 한 남궁도위의 선택은 최선일지도 모른다. 남궁세가의 입장을 떠나 남궁도위의 입장에서 말이다.
“뜻대로 하십시오, 소가주.”
남궁명은 그저 남궁도위라는 용을 품기에 화산이라는 호수가 충분히 넓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저 그것만 바라…….
쾅!
“방금 뭐야? 이상한 새끼 하나 있었는데?”
“…….”
청명의 검에 처맞아 순식간에 장원 밖으로 날아간 남궁도위를 보며 남궁명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자.’
왠지 호수에 독이 풀려 있는 것 같다.
……좀 치명적인 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