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91화 (992/1,567)

991화.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1)

“후후.”

“…….”

“후후후후.”

“…….”

“하하하. 하하하핫!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핫!”

“…….”

연신 앙천광소를 터트리는 임소병을 떨떠름하게 보던 조걸이 조용히 입을 뗐다.

“사형.”

“왜?”

“저분은 왜 저러시는 겁니까?”

“……좋으시겠지.”

“저렇게나요?”

그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눈치로 임소병을 보았다.

아니, 좋은 건 이해하겠는데…….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핫!”

저건 좀 심하지 않나?

하지만 임소병은 조걸이 이상하게 보거나 말거나 연신 커다란 웃음을 터뜨려 댔다. 평소 워낙 병약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라 녹림왕이라는 느낌이 잘 살지 않았었는데, 하늘을 보며 광소를 터트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반면에…….

“쟤는 또 왜 저럽니까?”

“……뭐가 또?”

“쟤요, 쟤.”

윤종의 시선이 녹림왕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우울한 모습의 청명이 보였다. 얼마나 우울해 보이는지 머리 위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환상이 보일 정도였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바닥에 나뭇가지로 뭔가를 끼적끼적 그려 대는 그를 향해 임소병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보란 듯이 손에 들린 서약서를 휘둘러 대는 꼴이, 흡사 승자가 패자를 향해 깃발을 휘두르는 모양새 같았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핫!”

땅을 파고 들어가는 청명과 승리의 나팔을 불어 대는 임소병을 번갈아 보던 윤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개판이네.”

“그러게요.”

그때 백천이 피식 웃으며 임소병에게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아아! 백천 도장!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좋다마다요!”

임소병이 제 부채를 촤악 펼쳤다.

“천우맹에 한번 들어 보겠다고 버텨 낸 그 모진 세월, 굴욕, 그 고통!”

“…….”

“그 모든 걸 한 번에 보상받았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저희 녹림도 당당한 천우맹 소속이잖습니까.”

“……공표는 좀 나중에 하는 걸로 했는데도…….”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이제 드디어 방패막이가 생겼다는 거죠.”

“방패막이라 하시면?”

백천의 물음에 임소병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백천 도장. 만약 지금 이 상황에서 녹림이 화산과 친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예? 그야…….”

백천은 무언갈 잠깐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임소병이 하는 말을 이해한 것이다.

“확실히 위험했겠군요.”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지금 정파와 사파의 관계는 최악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거기에 구파일방은 사패련에 있는 대로 망신을 당해서 어떻게든 명예를 회복할 방법이 필요한 판이지요. 이런 상황에 녹림이 천우맹에 속하지 않았으면 눈이 돌아간 소림에 박살이 났을 겁니다.”

이건 비단 소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명예 회복을 원하는 문파는 한둘이 아니니까.

“다른 사파들이야 적당히 강남으로 내려가 사패련에 들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녹림은 그게 불가능합니다. 녹림은 기본적으로 산을 끼고 살아야 하는 문파가 아닙니까? 그리고 중원의 산지는 대부분 강북에 몰려 있습니다.”

“그렇죠.”

이건 중원에 존재하는 거대 사파 중 녹림만이 유일하게 강북을 거점으로 활동한다는 뜻이다. 물론 강남에서도 녹림이 활동하기는 하지만, 그 세력은 전체의 삼 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저희 녹림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둘 중 하나지요. 고이 가꿔 온 강북의 거점을 모두 버리고 강남으로 이주해 저 사패련에게 고개를 숙이든가. 그게 아니면 강남을 끊어 버리고 이 강북에서 구파의 눈치 속에서 살아남든가.”

백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버티는 건 어렵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녹림이 아무리 잘나 봐야 저 구파일방만 하겠습니까? 구파 놈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온 산의 산적이 씨가 마르는 데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을 겁니다.”

“…….”

“그리고 다른 방법도 마찬가지지요. 사람으로 태어나 어떻게 장일소한테 고개를 숙입니까? 그 마귀 새끼한테!”

“…….”

장일소와 임소병이 원수나 다름없다는 건 워낙 유명한 일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임소병이 혼자 원한을 불태우는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렇지만!”

촤라라라락!

이번에 활짝 펼쳐진 것은 부채가 아니라 현종의 직인이 찍힌 서약서였다.

“이제는 우리도 당당한 천우맹의 일원이다 이겁니다! 제아무리 구파라고 해도 천우맹 소속인 우리를 건드리진 못하겠죠!”

“…….”

목놓아 말하던 임소병의 두 눈에 순간 눈물이 맺혔다. 백천이 당황해서 물었다.

“왜, 왜 우십니까?”

“아닙니다, 백천 도장. 돌연 설움이 밀려와서…….”

“예? 설움요?”

“예!”

그는 젖은 눈으로 먼 곳을 보며 말했다.

“그 모진 세월……. 밖의 마귀 놈은 하나라도 더 부려 먹으려고 악을 써 대고, 안의 머저리들은 왜 우리가 정파 놈들 하인 짓이나 해야 하냐고 닦달을 하고……! 장로라는 것들은 선대는 이렇지 않았다는 개소리나 해 대고! 녹림왕의 자격이 없다느니! 녹림이 변질되었다느니!”

“……고생이 많으셨네요.”

“아니죠, 아니죠! 이제는 그 고생이 다 끝난 겁니다! 그 장로 놈들 면상에다 이 서약서를 딱! 따아아아악! 들이밀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 궁금해서 몸이 달을 지경입니다! 으하하하하하핫! 선대가 묻힌 데다 같이 산 채로 파묻어 버릴 테다. 망할 영감탱이들!”

백천은 식은땀을 조용히 훔치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반응이 너무 격해서 좀 부담스러울 정도긴 하지만, 어쨌거나 좋아하는 거니까…….

그러면서도 백천은 새삼 임소병을 다시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대단한 사람이군.’

저 말인즉, 임소병은 청명을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어느 정도 예감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 녹림의 처마가 되어 줄 수 있는 문파로 화산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임소병의 선택이 조금만 늦었거나 잘못되었다면, 아마 녹림의 처지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묘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분명 녹림의 수장으로서 최선의 선택을 해 온 사람이라는 게 새삼스레 실감되었다.

반면에…….

백천이 반대편으로 눈을 돌렸다. 이젠 나무둥치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청명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말도 못 하게 서글퍼 보였다. 어느 정도냐면, 저 마귀 놈이 불쌍하게 보일 정도였다.

“……청명아?”

“…….”

“저기…… 청명아?”

두 번이나 부르고서야 청명의 고개가 힘없이 백천 쪽으로 향했다.

“사숙…….”

“그, 그래, 청명아. 괜찮으냐?”

백천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응?”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

청명의 두 눈에 물기가 촉촉하게 맺혔다.

“내가 살다 살다 사파 새끼랑 한솥밥을 먹는 날이 오네. 차라리 구더기를 키우지. 아무리 이게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지만, 내가 어떻게 사파 새끼랑…….”

“지, 진정 좀 해 봐.”

“장문인도 너무하시지! 아무리 양심에 찔려도 그렇지. 저 사파 새끼를 받네. 그것도 한둘도 아니고 그 바글대는 산적 새끼들을……. 아이고. 아이고오. 화산이 어찌 되려고. 아이고 사혀어엉. 화산은 망했소. 화산이 망했다고오오오…….”

백천은 너무 충격받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동안 청명이 악을 쓰는 모습이야 워낙에 자주 봐서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고, 간지럽지도 않다. 하지만 얘가 이렇게까지 서러워하고 절망하는 꼴은 처음 보았다.

“죽어야지, 죽어야지. 내가 그냥 혀 깨물고 죽어야지. 내가 무슨 꼴을 보겠다고 이 나이까지 살아서는…….”

“너 아직 어려, 이 미친 새끼야! 무슨 인생 다 산 할아버지 같은 말을 하고 있어!”

혼돈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조걸이 새삼스럽다는 듯 물었다.

“……사파랑 한솥밥 먹게 된 게 어지간히 충격인가 보네요.”

“쟤 사파 혐오병 있잖아.”

안 그래도 사파라고 하면 사람 취급도 안 하던 놈인데, 최근에는 장일소의 등장 덕분에 그 증세가 몇 배는 심해졌다.

그래도 나름 임소병 정도면 온건사파(?)라고 불리기에 충분할 텐데도 저만한 반응이면, 장일소나 흑룡왕 같은 놈들은 얼마나 싫어하는 건지 상상도 잘 가지 않을 정도다.

“일단 잘 달래 봐.”

“그냥 내버려 두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저 새끼가 저러다가 ‘화산의 정의가 죽었다. 이럴 바에는 장문인을 몰아내고 내가 장문인이 되어서 화산의 정기를 다시 세우겠다.’ 같은 개소리를 할까 봐 겁난다.”

“……일단 주둥아리에 당과부터 좀 물려 놓겠습니다.”

가능성이 없기는 한데, 그렇다고 무시하기에는 그 뒤에 일어날 참상이 너무 무서운 이야기였다.

저 청명이 장문인인 화산이라니.

그건 단순히 화산만이 아니라 전 중원에 걸친 대참사다. 중원의 평화를 위해서도, 중원을 넘어 구주팔황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막아 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화산 제자들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신기한 광경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녹림이 천우맹에 가입했다는 건 딱히 그들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동안 녹림을 봐 오면서 은근히 거부감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그저 천상천하유아독존 날뛰던 놈이 크게 한 방 먹었다는 사실이 즐거울 뿐이었다.

‘저 새끼도 당하는 날이 오네.’

‘이제 장문인이 전권 잡으신 거니까 우리도 좀 편해지겠지.’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그때 당소소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마음 좀 곱게 쓰라고 했잖아요, 사형. 심보가 고약하니까 골탕을 먹는 거지! 호호호호!”

“……재밌냐?”

“호호호호!”

“재밌냐고.”

“호……. 호호.”

과장되게 악당처럼 웃던 당소소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며 희게 질렸다. 내도록 절망하던 청명이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숙.”

“……으응?”

백천이 불안한 얼굴로 청명의 안색을 살폈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응.”

“이 참사가 벌어진 이유는 하나인 것 같아.”

“뭔데?”

“우리가 약해서야.”

“…….”

저기요? 저희 불과 이틀 전에 저 그…… 장강을 한달음에 뛰어넘어서 수로채를 박살 내고 남궁을 구해 왔는데요?

그런데 저희가 약해요?

백천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청명아……. 내 생각인데, 그건 판단이 잘못된 것 같다.”

“아니, 맞아.”

청명이 굳건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잖아. 우리가 사패련이고 구파고 그냥 다 때려 부술 수 있었으면 저런 사파 새끼들하고 어울릴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문파 하나가 그걸 다 할 수 있으면 그게 화산이냐? 마교지.”

“아, 안 돼!”

“응?”

옆에서 들려온 비명에 백천이 잠깐 어리둥절하다 저도 모르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지른 건지 이해한 것이다.

“……마교?”

“…….”

“마교오오오오오?”

아니나 다를까 청명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 눈빛을 본 이들이 하나같이 백천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저, 씨바. 말을 해도!’

‘저 새끼 마교 소리 들으면 발작하는 거 뻔히 알면서!’

’주둥이를 아주 묶어 버리든 해야지!‘

원망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백천이 슬쩍 고개를 돌려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명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옳지, 마교. 그래. 마교도 이겨야지. 그럼 이리 놀고 있을 시간이 없네.”

눈이 완전히 회까닥 돌아 버린 청명이 암매검을 움켜잡았다.

백천은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모든 사태를 촉발한 임소병더러 좀 말려 보라고 할 셈이었다.

하지만…….

“이, 이 양반 어디 갔어?”

“녹림왕이요? 아까 마교 소리 나오자마자 부리나케 토끼던데요?”

“…….”

아.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내가 오늘 또 하나 배우네.

스릉.

암매검을 뽑아 든 청명이 히죽 웃으며 모두를 훑어보았다.

“자.”

“…….”

“즐거운 수련 시간이다.”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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