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0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5)
‘드디어!’
남궁도위의 두 눈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사실 긴장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상식적으로야 천하의 어떤 세력이 감히 남궁세가를 거절하겠는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남궁세가가 오늘 사파로 전향한다고 선언이라도 하면 사패련주 장일소조차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강을 헤엄쳐 건너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남궁도위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남궁명의 얼굴은 여유만만했다.
‘그래. 저게 정상이긴 한데…….’
하지만 남궁도위는 전혀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이곳은 천우맹이니까.
지금까지 지켜본 대로라면 이 천우맹에는 강호의 일반적인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막말로 지금까지 천우맹이 그가 생각한 상식대로 움직인 경우가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후우.”
남궁도위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진심은 통할 것이라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써는 그 방법뿐이다.
“가주 대리님.”
현종이 가만히 남궁도위를 불렀다. 아직은 정식으로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기에, 지금은 가주 대리라는 호칭이 적절했다.
“예, 맹주님.”
“먼저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남궁세가에서 천우맹에 가입을 요청하시는 것이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남궁도위가 심호흡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다시 정식으로 요청드리겠습니다. 저희 남궁세가는 천우맹에 정식으로 가입을 신청합니다.”
“으음.”
현종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 문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저희의 결정은 확고합니다.”
남궁도위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지금의 남궁세가는 천우맹이 아니고서야 발붙일 곳이 없다. 그리고 감정적으로도 저 구파와 함께하느니 천우맹과 함께하는 편이 훨씬 낫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천우맹을 외치고 있는데 망설일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저들에게 더는 협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남궁도위가 단호한 눈으로 모두를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선친께서 매화도로 향하신 것은 지난 장강참변에 대한 책임을 지고, 땅에 떨어진 강호의 협의를 다시 일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창천남궁세가라는 여섯 글자는 협의라는 바탕이 없고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게 선친의 가르침이셨습니다.”
“음.”
당군악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남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생각할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구파일방은 협의보다는 자신들의 이득을 우선시했습니다. 그게 잘못은 아닙니다. 저도 저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남궁도위의 얼굴에 확신이 어렸다.
“선친께서도 만약에 비명에 횡사하지 않으시고 이 땅을 밟으셨다면, 분명 구파가 아닌 천우맹과 함께하려고 하셨을 것입니다. 남궁세가의 미래는 구파일방, 오대세가가 아니라 천우맹과 함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하면 됐다고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남궁도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비단 지금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한 결정이 아닙니다. 남궁세가에서 자라난 아이들에게도 자긍심을 심어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명분이나 실리가 아니라 협의를 추구하는 문파라는 자긍심을!”
뒤쪽에 있던 화산의 제자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자긍심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득을 추구하여 얻을 수 있는 막대한 것들에 비한다면 딱히 써먹을 곳도 없는 자긍심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깨를 펴게 만들어 준다.
소림은 차마 천우맹과 남궁세가 사람들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소림의 안에 자긍심이 없고, 문파에 대한 자부심이 없기 때문이다.
화산의 제자들은 그 자부심이라는 것은 결코 강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그러니 감히 간청드립니다.”
남궁도위가 고개를 숙였다.
“저희 남궁세가를 천우맹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맹주님의 그 결정이 반드시 옳은 일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현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구나.’
남궁도위가 매화도를 빠져나온 지 며칠이나 되었던가? 아무리 대단한 이라고 해도 선친을 여의고 가솔들이 눈앞에서 떼로 죽어 나간 충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더없이 의지견정 했다. 지금 그가 논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재를 딛고 일어난 그는 남궁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소속을 떠나 훌륭한 후기지수를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장강으로 온 이후 내내 굳어 있던 현종의 얼굴이 처음으로 환히 펴졌다.
“어찌 생각들 하십니까?”
그러니 그 목소리에도 기꺼움이 묻어났다. 현종이 즐거워한다는 것을 안 당군악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맹주님께서 벌써 마음을 굳히신 듯한데, 제 의견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민망합니다.”
현종의 말에 당군악은 미소를 띤 채 남궁도위를 보았다.
“안 될 이유가 없겠지요. 남궁세가라면 저희가 먼저 함께해 달라고 고개를 숙여야 할 문파가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런 문파에서 요청하는데, 천하의 어느 세력이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찬성입니다.”
현종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반대하는 분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저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모아 답했다. 이들 중에는 딱히 남궁세가에 원한이 있는 이들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천우맹의 입장에서도 남궁세가를 받아들여 세력을 넓히는 게 나쁠 리가 없다.
냉정하게 이해득실만 계산하더라도 이건 큰 이득이었다.
전력이 급감하기는 했어도, 그래도 남궁세가다. 일반적인 문파들이 감히 대적해 볼 수준은 아니다. 오대세가의 수좌라는 말은 골패 쳐서 딴 수식어가 아니니까.
“이 문제는 저희의 의견만으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나, 새외에 계신 다른 문파의 장문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맹주의 권한으로 남궁세가의 가입을…….”
“안 됩니다!”
“……허락…….”
시원하게 가입을 허하려던 현종은 움찔하며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부채를 살랑거리며 여유만만하게 웃곤 하던 임소병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모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노, 녹림왕…….”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어…….”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저는 절대로 좌시할 수 없…….”
뻥!
지체없이 임소병을 걷어차 버린 청명이 눈을 뒤집었다.
“근데 이 새끼가 어디 입을 열어? 여기가 사파들 설치는 데야?”
옆구리를 얻어맞은 임소병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지만, 조금도 기죽지 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막말로 남궁이 천우맹에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저 새끼들은 그냥 안휘에서 지들끼리 놀다가 사파에 얻어 처맞아서 힘들다 싶으니까 천우맹의 처마 아래로 들어오려는 거 아닙니까!”
임소병이 두 눈에서 귀화(鬼火)를 뿜어냈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현종은 물론이고 당군악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임소병의 기세 같은 건 조금도 신경도 쓰지 않는 인간이 있었다.
눈을 부라린 임소병을 가만 보던 청명이 그의 눈을 두 손가락으로 뽁 찔렀다.
“아악!”
임소병이 제 눈을 감싸고 뒤로 나자빠졌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제 눈을 감쌌다.
“이 사파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눈알을 부라려? 확 뽑아 버릴라!”
“크, 크윽!”
임소병은 찔린 눈에서 눈물을 줄줄 뽑아내면서도 원독에 찬 눈으로 현종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청명에겐 말해 봐야 소용도 없을 게 뻔하니, 말이 통할 만한 사람을 물고 늘어질 작정이었다.
“아무리 우리가 사파라지만! 지난 삼 년간 그렇게 개처럼 일했는데! 짐 나르라면 짐 날라! 사람 나르라면 사람 날라! 호위하라면 호위해!”
임소병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현종은 조금씩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자그마치 삼 년을 굴렀는데! 예? 남궁을 천우맹에 들인다굽쇼? 우리는 아직 가입도 못 했는데? 어떻게 우릴 놔두고 남궁세가의 가입을 허락하십니까?”
“…….”
현종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난 삼 년 동안……. 아니, 그 전부터. 화산은 녹림을 있는 대로 부려 먹었다. 어지간한 사파나 상인도 이만큼이나 한 세력을 알뜰살뜰하게 부려 먹고 벗겨 먹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그 모든 일은 사실 화산이 행한 일이라기보다는 청명이 저지른 일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청명이 화산의 소속이면 그 책임도 화산에 있는 게 맞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임소병이 일갈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현종이 아니라 청명에게서 나왔다.
“아, 억울하면 정파 하시든지. 이 새끼야! 그러니까 누가 사파 하래?”
평소라면 이 말에 입을 닫았을 임소병이지만, 오늘은 눈에 뵈는 게 없는 듯 바락바락 고함을 쳐 댔다.
“아니,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녹림왕인 걸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내가 이걸 뭘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철회해 주십시오, 다시 태어나렵니다 합니까? 도장은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사파의 수괴인 사람의 기분을 알기는 하십니까?”
“나야 모르지. 나는 고아니까.”
“……아, 그럼 확실히 모르실 수밖에 없네요.”
임소병이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경을 모두가 얼빠진 듯 보는 와중, 임소병이 다시 말했다.
“저도 양갓집 자제로 태어나서 과거 응시하고 출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산적 두목인데 제가 무슨 수로 손을 씻습니까! 태생이 이 꼴인데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바르게 살아 보려고 하면 좀 도와주고 그래야지! 출신이 그렇다는 이유로 사람을 이렇게 괄시해?”
“…….”
“사파 차별 철폐하라! 악덕 맹주 물러가…….”
뻐억!
그건 너무 나갔다 싶었는지 청명이 임소병을 후려 깠다.
“아니, 이 새끼는 좀 들어 줄 만하면 선 넘네! 오냐, 너 오늘 나한테 죽어 보자!”
“그, 그만하거라, 청명아.”
차마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광경이라 생각했는지, 현종이 얼른 청명을 만류했다.
“크, 크흠.”
당군악도 민망한지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고 연신 헛기침을 했다.
“사실…… 녹림왕께서 하신 말씀 중에…… 그리 틀린 건 없지요…….”
화산의 제자들도 천장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민망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현종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임소병을 향해 말했다.
“녹림왕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도리상 이제는 녹림을 천우맹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 장문인!”
“다만…….”
현종의 얼굴에 살짝 곤란하고 어색한 표정이 스쳤다.
“구파가 지금 저희를 사파와 결탁했다고 매도하려 하는 판국인지라, 바로 지금 가입을 승인해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이 아니라 상황이 조금 잠잠해지면 처리하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아, 차후 승인이요?”
“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실로 타당한 말이었다.
어떻게든 천우맹을 사파와 엮으려 하는 법정에게 녹림의 가입은 좋은 건수가 될 테니 말이다. 머리 하나는 기막히게 굴러가는 임소병이 이 정도도 이해 못 할 리 없었다.
다만.
그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웬 종이를 꺼내 활짝 펼쳤다. 그리고 곧바로 현종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서약섭니다.”
“……서, 서약서요?”
“예. 녹림을 천우맹에 받아들이겠다는 서약서입니다! 일 년 내에 공표도 하겠다는!”
“…….”
현종이 떨리는 눈으로 그 서약서를 바라보았다. 깨알 같은 글씨가 얼마나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지 눈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노, 녹림왕?”
“찍으십쇼, 지장.”
“…….”
“당장!”
“…….”
그렇게 남궁세가의 가입을 승인하는 자리에서, 녹림의 가입이 승인되었다.
미묘한 여지와 찝찝함을 남기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