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89화 (990/1,567)

989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4)

천우맹의 회의에 껴 있는 낯선 인물은 남궁도위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나?’

자오개가 어색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우선 스스로 나오겠다고 선언한 뒤라 개방으로는 돌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그 자리에 뻔히 서 있는 것도 영 모양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당히 이곳에서 뭉개다가 눈치가 보인다 싶으면 은근슬쩍 빠져나가 다른 갈 곳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오늘 아침 적첩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직통으로 날아온 적첩에는 ‘거기 붙어 있어.’라는 단출한 글씨만 쓰여 있었다. 당당한 개방주의 직인과 함께 말이다.

‘썩을.’

자오개가 입을 오물거렸다.

‘병상에 누워 있는 양반이 대처도 빠르지.’

물론 그는 이제 개방의 소속이 아니지만, 그래도 방주의 명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본디 장로쯤 되는 이가 방을 나가기 위해서는 무공을 전폐하는 게 기본. 나중에 은근슬쩍 복귀할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한다.

뭐 거기까지는 좋다. 여기까지는 좀 곤란해도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니까.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기에 있냐고!’

이곳은 천우맹이 회의하는 자리가 아닌가? 그런 곳에 천우맹의 소속도 아니며, 이제는 개방 소속도 아닌 그가 대체 왜 앉아 있단 말인가?

그냥 맹주가 부른다고 해서 왔고, 앉으라고 해서 앉았을 뿐이다. 그 뒤에 여럿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이런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더 이상한 것은, 이 양반들 중 누구도 그가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는단 점이었다.

‘정말 이래도 되나?’

천우맹 아닌가, 천우맹!

이제는 못해도 강호에서 네 손가락……. 아니, 세 손가락 안에는 드는 거대 세력이 천우맹이다. 그런 곳의 회의가 이런 식으로 진행돼도 정말 괜찮은 건가?

“첫번째로 확인해야 할 것은…….”

그 순간 현종이 입을 열었다. 자오개도 일단 상념을 모조리 지워 내고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장강에 있는 구파가 어찌하고 있는가 하는 점인데.”

그렇지.

자오개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 구파와 마찰을 겪었으니 그 부분부터 확인하는 게 먼저다. 확실히 화산 장문인은 맥을 잘 짚고 있었다.

“그, 혹시 확인해 보신 분이 있으십니까?”

“…….”

“…….”

그 순간 대전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현종이 시선을 줄 때마다 다들 슬쩍 시선을 피하거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리 보셔도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는 주장이나 펼치고 있었다.

“……없으시오?”

“크흠.”

당군악이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했다.

“맹주님께서 워낙 강경하게 몸을 돌리셔서 다시 강변에 얼굴을 들이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긴 한데…….”

그쯤 되니 자오개는 머릿속이 다 아득할 지경이었다.

보통 구파의 회의는 그렇다. 일단 안건이 무엇이건 간에 격식을 차리고, 서로 간의 품위를 지키며, 물밑에선 각자의 자존심이 맹렬히 충돌한다.

부드러운 말에 날카로운 진의를 숨긴, 말로 하는 비무가 바로 구파의 회의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 회의는 뭐랄까, 그…….

‘주먹구구식이라고 해야 할지,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과히 인간적이라 주먹구구식으로 보이는 걸지도 모른단 뜻이다.

“그럼 어……. 지금 구파가 지금 어찌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건데.”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 볼까요?”

“……그것도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이게 현종과 당군악, 그러니까 현 강호를 뒤집어 놓은 천우맹의 일인자와 이인자의 대화다.

‘진짜 괜찮나 여기?’

매화도로의 진격을 명하던 현종은 분명 산전수전 다 겪고 늙어 버린 자오개의 가슴마저 뛰게 했었는데…….

그때 임소병을 야무지게 밟아 대던 청명이 고개를 획 돌렸다.

“뭘 그런 걸 우리끼리 이야기해요. 저기 거지 할아버지 있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의 시선이 자오개에게로 쏟아졌다.

따갑고도 뜨거운 시선을 받은 자오개는 사레가 들린 듯 연이어 마른기침을 했다.

“한데 저분은 개방에서 나오시지 않았느냐?”

백천이 말을 꺼내자 청명이 코웃음을 쳤다.

“개방을 나와?”

“나는 그렇게 들었다.”

“근데 왜 해도 뜨기 전부터 거지새끼들이 여길 기웃거려?”

“응?”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어 댔다.

“나는 그게 개방에서 정보를 주러 온 건 줄 알았는데……. 우리 정보를 빼 가는 거였나, 혹시?”

청명이 환하게 웃으며 자오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니죠?”

“…….”

자오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화산검협.’

천하에서 청명을 가장 잘 아는 문파는 당연히 화산이다. 하지만 천하에서 청명에 대한 악명이 가장 높은 곳은 화산이 아니라 개방이다.

화산과 교류하는 화음의 거지들이 토해 내는 울분과 서글픔에 천하의 거지들이 눈물짓던 게 벌써 몇 해던가?

자오개의 등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홍대광 그놈이 뭐라 그랬더라?’

정파의 탈을 쓴 대 마두? 제 소속을 잘못 정한 사파의 거두? 사파에 투신했으면 오백 년은 회자될 만큼 전설적 인물이 될 놈이 문파를 잘못 선택해서 검으로 꽃꽂이나 하고 있다 했던가?

“왜 대답이 없으실까?”

그중 자오개의 기억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이 말이었다.

- 그 새끼는 노인을 공경하는 게 아니라 공격하는 놈입니다. 남녀노소를 안 가립니다. 괜히 앞에서 체면 따지다가 대가리에 혈화 피고 후회하지 말고, 알아서 사리십쇼.

그 순간 자오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이보게, 소협.”

“……네?”

그는 근엄하게 청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 지금은 소속이 없으나 그래도 한때는 개방의 장로였던 이네. 문파를 벗어났다고 해서 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의미지. 나는 개방의 장로이고, 자네는 화산의 삼대제자가 아닌가?”

청명이 목을 좌우로 꺾었다.

우득. 우득.

그리고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요?”

“그러니!”

자오개의 두 눈이 새파란 빛을 뿜었다.

“아는 것도 많지. 뭐든 물어보게나! 내 다 말해 주겠네!”

“…….”

거지에게 자존심 같은 건 사치일 뿐이다.

“현재 구파일방은 구강의 강변에서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음. 그게 좀 복잡합니다만.”

자오개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유야 너무 많지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째는 저 수로채와 만인방이 아직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는 것. 수로채는 여전히 장강 위에서 선단을 유지하고 있고, 만인방도들은 하선은 했으나 강변에 진을 쳤습니다. 마치 언제라도 북상할 수 있다는 듯 말입니다.”

“으음.”

현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 소림도 쉽사리 물러날 수 없을 겁니다. 아직 장강늑약의 효력이 다하지 않았으니 강남으로 넘어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엉덩이를 빼자니 그 틈을 타 만인방이 북상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 말을 들은 청명이 피식 웃었다.

“여하튼 지독한 놈이라니까.”

상처는 최대한 빨리 치료하는 게 좋다. 그게 몸에 남은 상처든 마음에 남은 상처든 말이다. 제때 치료하지 못한 상처는 곪아 들어가 깊은 흉을 남기는 법이다.

아무래도 장일소는 소림의 발을 좀 더 잡아 둘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들이 입은 상처가 강변 위에서 좀 더 곪을 수 있도록 말이다.

“두 번째로는, 후퇴할 명분이 없다는 겁니다.”

“명분이라 하셨습니까?”

“예. 맹주님. 이게 그…… 음, 말씀드려도 되는 부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소림의 방장께서는…….”

“방장께서는?”

청명의 눈깔이 또 획 돌기 시작하자 자오개가 재빨리 말을 바꿨다.

“그 방……장 놈은.”

청명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튼 방장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구파 전체에 소집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호응한 문파는 몇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저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장강까지 갔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니,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소림으로 복귀해 버린다면 그 위신이 어찌 되겠습니까?”

“……으음.”

자오개가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소림은 더는 구파의 북두를 자처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수장이란 본디 그 명에 힘이 실릴 때에나 자처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자오개가 현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만인방이 발을 빼기 전까지는 구파 역시 이 강변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쯤이면 팽가 역시 합류했을 테니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으음.”

현종이 침음성을 흘렸다.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려서였다.

“감사합니다, 걸개.”

“아닙니다. 천우맹에서는 누구나 제 밥값은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얻어먹은 밥 값은 해야겠지요.”

자오개가 빙긋 웃고는 입을 닫았다. 제 역할은 끝났다는 듯이.

현종이 당군악을 돌아보았다.

“당가주님.”

“예, 맹주님.”

“저희는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군악은 잠시 고민하며 제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사실 지금 저희에게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남궁세가에 위중한 자가 너무 많습니다. 겨우 안정이 된 정도라 급하게 움직였다가는 상처가 다시 덧나고 벌어질 겁니다. 그때는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습니다.”

“아…….”

“적어도 저희 당가는 이곳에서 저들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적어도 닷새 정도는 움직이기 어렵지요. 그러니 우선은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천천히 지켜보면 될 것 같습니다.”

현종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견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현종이 다른 이들을 보며 말했다.

“애초에 우리가 매화도까지 갔던 목적은 남궁세가의 구출이었으니, 그들이 제 발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이곳에 머무르도록 하자꾸나.”

“예, 장문인.”

“대신!”

현종이 눈을 부라렸다. 물론 그가 눈을 부라릴 때 보는 이는 오직 한 명뿐이다.

“너는 절대 이 장원 밖으로 나가지 마라! 알겠느냐?”

“아, 왜요!”

“왜? 왜? 몰라서 묻느냐? 바로 앞에 구파가 진을 치고 있는데 네놈이 밖으로 나가면? 퍽이나 가만히 있겠구나!”

“아, 제가 뭐 애도 아니고…….”

청명이 투덜거리는 순간 그를 잘 아는 모든 이들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애가 낫지.”

“아암. 낫고말고.”

“적어도 애는 스님 대가리에 칼은 안 박잖아.”

“근데 이것들이?”

현종이 영 못 미덥다는 듯 청명을 보다가 백천을 돌아보았다. 눈빛이 언제 그랬냐는 듯 더없이 부드럽고 온화하게 풀어졌다.

“와! 눈빛으로 차별하는 것 좀 봐!”

“시끄럽다, 이놈아!”

또다시 극적인 눈빛 변화를 보여 준 현종이 백천에게 신신당부했다.

“이놈이 장원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거라.”

“……유 사매와 백상, 윤종, 조걸, 소소 정도는 붙여 주셔야 합니다.”

“운검까지 붙여 주마.”

“그 정도면 가능합니다.”

“아니, 안 나간다고요!”

“시끄럽다니까!”

청명의 입이 앞으로 댓 발은 더 튀어나왔다.

굉장히, 매우, 무척이나 많이 못 미덥다는 눈으로 그를 흘끗 본 현종은 혀를 차고는 안색을 정비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번엔 현종의 시선이 남궁도위에게 닿았다.

청명이 구박받는 모양새를 내내 얼빠진 얼굴로 지켜보던 남궁도위가 퍼뜩 놀라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침내 현종의 입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나왔다.

“남궁세가의 천우맹 가입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오.”

온몸을 타고 오르는 긴장에, 남궁도위가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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