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88화 (989/1,567)

988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3)

“도장.”

“가라.”

“그…… 도장.”

“아, 가라고.”

“도장…….”

“아오 씨!”

청명이 몸을 획 돌려 남궁도위를 걷어찼다.

쾅!

“컥!”

남궁도위가 청명의 발길질에 얻어맞아 데굴데굴 굴렀다.

“근데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청명이 두 눈을 희번덕대며 남궁도위를 노려보았다.

“야! 우리가 만만하냐? 네가 받으라고 하면 우리가 받아야 해? 천하의 남궁세가가 합류해 주신다는데 어디 천우맹 거지새끼들이 거절을 하냐 이 소리야?”

남궁도위가 식겁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도, 도장!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아니면? 아니면 뭐! 장문인이 허락하셨냐? 당가주님이 허락하셨냐? 오호라! 그것도 아니야? 이제 네가 남궁세가 가주니까 화산 장문인이고, 당가주고 별거 아니다 이거냐?”

“제, 제가요?”

제가 감히요?

“그래, 너! 너 이 새끼야! 여기에 너 말고 남궁이 또 있냐?”

남궁도위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청명을 보았다.

그가 살면서 언제 이런 몰아가기를 겪어 보았겠는가? 남궁세가의 소가주로서 언제나 기대와 떠받듦 속에서 살아왔던 그에게 청명이라는 인간의 존재는 너무도 가혹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청명은 남의 입장 같은 건 신경을 써 주지 않았다.

“이 새끼가 누굴 호구로 보나! 한창 잘나갈 때는 오대세가 수장이니, 안휘의 패자니 하면서 주둥이 털고 다니더니! 끗발 다 떨어지니까, 뭐? 한 식구? 한 식구우우우우? 내가 너랑 같이 밥 먹은 적도 없는데 무슨 얼어 뒈질 한 식구야, 이 새끼야!”

“그, 그런 게 아닙니다. 도장! 우선, 제 말을 좀 들어 보시고…….”

“필요 없어!”

이 광경을, 오검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남궁세가 차기 가주로서의 체면도 모두 집어던진 채 청명을 잡고 늘어지는 남궁도위를 빤히 보며 조걸이 묘한 표정으로 백천을 돌아보았다.

“그…… 사숙.”

“응?”

“저 양반, 저런 사람이었나요?”

“…….”

‘난들 알겠냐?’라고 말하려던 백천이 말끝을 흐려 버렸다.

뭐랄까……. 그 비무대회에서는 뭔가 참 말끔하고 멋있었던 것 같은데…….

윤종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분은 왜 저러고 있는 겁니까?”

백천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남궁 소협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천우맹에 가입해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꼭이요?”

“그래. 다른 방법이 없다.”

백천이 남궁도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안휘는 너무 위험하다.’

절강성 안휘는 장강에 맞닿아 있다. 수로채의 직접 활동권과 완전히 겹치지는 않지만, 수로채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선단을 이끌고 상륙을 시도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수로채는 지금 독이 머리끝까지 올랐겠지.’

물론 수로채야 사기가 땅에 처박혔지만 흑룡왕은 눈이 돌아가 있을 확률이 높다.

왜 아니겠는가?

그 모든 것이 장일소의 계획이었다고 한들, 결과적으로 수로채는 천우맹에 무참하게 패배했고, 흑룡왕 역시 청명에게 패해 한쪽 팔을 잃었다.

흑룡왕은 그 분풀이를 어디에든 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남궁세가는 그 분풀이에 딱 좋은 상대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남궁세가가 수로채를 공격한 데서 시작했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전력은 지금 삼분지 일도 채 남지 않은 상태다.

“수로채가 남궁을 공격?”

유이설이 자신도 짐작했다는 듯 말하자 백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수로채가 공격해 온다 한들 두려워할 남궁세가가 아니지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다.”

매화도에서 너무 많은 전력을 상실한 것도 문제지만, 구파일방과 완전히 척을 져 버린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수로채가 남궁세가를 공격한다 한들, 과연 구파가 남궁세가를 도우려 하겠는가?

생각을 이어 가던 백천이 일순 차게 조소했다.

‘아니, 모르지. 척지지 않았다고 한들, 그들이 과연 남궁을 도왔을지는…….’

백천 역시 보아 온 것이 있는지라, 더는 구파일방을 신뢰할 수 없었다.

“수로채가 패배했다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흑룡왕이 이번 일로 수로채에 대한 장악력을 꽤 잃었을 거란 점이지. 내환이 생겼을 때 외부의 적을 공격하여 내부를 단속하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지 않으냐.”

“예, 사숙.”

윤종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로채의 입장에서는 지금 남궁세가가 가장 만만한 먹이란 의미시군요.”

“그래.”

그때 조걸이 입을 열었다.

“그뿐만은 아닐 겁니다.”

“응?”

백천이 조걸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조걸이 뭔가 알 것 같다는 듯이 조금 씁쓸한 눈으로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본디 세가라는 것은 힘을 바탕으로 서는 곳이죠. 아무리 청렴결백하려 한들,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원한이 다시 고개를 들 수도 있다는 거로구나.”

“예. 애초에 강호라는 곳이 힘없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곳이 아니잖습니까.”

당소소 역시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 말이 맞아요, 사숙.”

“음.”

백천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 사실을 화산만큼 뼈저리게 실감한 문파도 없겠지.’

화산이 마교의 습격으로 힘을 잃은 이후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화산에 남은 걸 모조리 털어 대려 했던 이들이 특별히 원한이 있어 그랬겠는가.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

힘을 가진 자가 힘을 잃는 순간, 웃는 낯으로 마주하던 이들이 강도로 돌변하는 곳이 강호다. 아마 이대로라면 수로채가 잠잠하다 해도 남궁세가 역시 과거의 화산과 비슷한 꼴을 겪게 될 것이다.

“구파와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이상, 남궁세가를 도울 문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오대세가들은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고……. 알다시피 오대세가라고 해서 서로 다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잖느냐.”

“그렇죠.”

“그러니…… 지금 남궁소협은 지붕이 필요한 거란다. 본인이 아니라, 살아남은 남궁세가의 식솔들이 쉴 수 있는 지붕이 말이다.”

“으음.”

윤종이 알겠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숙.”

“왜? 또 의문이 남았느냐?”

“……제가 궁금했던 건 그게 아닙니다.”

“그럼 뭐?”

윤종이 떨떠름한 얼굴로 남궁도위를 보며 말했다.

“천우맹에 가입을 하고 싶으면, 장문인이나 당가주님께 말을 하면 될 텐데, 왜 굳이 청명이 놈에게 저러고 있냐는 거죠. 애초에 저놈이 장문인 말씀에는 꼼짝도 못 한다는 걸 이미 봤을 텐데요.”

“…….”

남궁도위는 지칠 줄도 모르고 놈에게 들러붙다 발에 차여 밀려나고 있었다. 백천은 묘한 얼굴로 그 양을 지켜보다 말했다.

“……부상이 깊으시잖냐. 판단이 잘 안 되시겠지.”

“…….”

그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과거 수많은 산적이 회계를 위해 정신없이 붓을 놀리던 대전에 꽤 많은 인원이 모여 둘러앉았다.

현종의 배려로 이곳에 낄 수 있게 된 남궁도위는 모인 이들의 면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무게감이 남다르다.

과거의 남궁도위였다면, 이곳에서 이리 큰 압박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 내야 했다.

남궁황을 잃고 기로에 선 남궁세가가 초라하게 느껴져서?

그런 게 아니다.

‘이분들의 위상이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속물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게 사실이니까.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은 아마 잘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남궁도위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앉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남궁도위는 슬쩍 현종을 바라보았다.

‘저분만 해도 그렇지.’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이름도 없는 문파의 장문인에 불과했다. 비무대회 참가 문파의 수장들이 모인 상석에 오르긴 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 상석에서 언제 쫓겨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던 이가 현종이었다.

하지만 장강에서 다시 만난 그는 무당마저 쓰러뜨리고 강호의 핵심 문파가 되어 버린 대 화산의 장문인이 되었고, 이제는 천우맹의 맹주로서 소림의 법정과 사패련의 장일소에게 당당히 맞서는 이가 되었다.

그런 이를 앞에 두고 긴장을 하는 게 뭐가 이상하겠는가? 오히려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정신이 나간 것이다.

‘현종 장문인뿐만이 아니다.’

그 옆에 앉은 당군악, 당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군악은 과거에도 드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전의 당군악을 과연 지금 천우맹의 이인자인 당군악과 비교할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순 없다.

오대세가의 힘은 남궁도위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오대세가는 나란히 이름이야 올리고 있지만, 결국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구파일방과 비견될 수 없는 존재였다. 그 말인즉, 남궁황도 감히 저 소림의 법정과는 대등할 수 없었단 뜻이다.

하지만 천우맹은 다르다. 그들은 이미 구파일방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 좌우를 지키는 화산의 문도들과 당가의 문도들도 쟁쟁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

천우맹의 저력은 아직 남아 있다. 이들은 언제든 남만야수궁과 북해빙궁을 불러들일 수 있으니까.

이러니 새삼스레 천우맹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를 실감할 수밖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궁도위의 시선이 온 얼굴로 귀찮은 티를 팍팍 내는 청명에게로 향했다.

‘흑룡왕을 이긴 젊은 검수라니.’

모르긴 몰라도 이 사실이 강호에 퍼지는 순간 전 강호에 큰 파란이 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파란이 일다 못해 뒤집혔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청명은 유명했다. 그동안 천하제일후기지수라 불린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음에도 청명만이 유독 유명해진 이유는 하나다.

‘저 사람은 결코 가능성에 머물 이가 아니니까.’

달리 말해, 청명은 후에 반드시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를 이였다는 의미다.

현재 강호에는 천하제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현재뿐 아니라 대부분의 시기에 천하제일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더 강한지는 결국 겨뤄 봐야 안다. 하지만 한 문파의 최고수들은 그 이름에 걸린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쉽사리 누군가와 승부를 낼 수가 없다.

패한다면 잃을 게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천하제일인이라 불릴 만한 이들은 존재하지만 확고부동한 천하제일인은 존재하기 어렵다. 그래서 천하삼대검수, 천하오대도객 따위의 말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청명은 아니다.

청명은 자신이 언젠가는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를 이라는 것을 비무대회에서 각인시켰고, 뒤이은 행적으로는 그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인정하게 했다.

‘그리고 흑룡왕까지.’

이젠 모두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천우맹이 곧 확고부동한 천하제일인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강호에서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 못 할 이는 없다.

‘정말 강호의 질서가 바뀔 수도 있다.’

바로 저 청명의 손에 의해서!

남궁도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따라가기 너무 벅찬 사람이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다. 저 사람이 걷는 길이 바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그러니까 반드시 천우맹에…….’

남궁도위가 다시금 결심을 굳히려던 찰나였다.

“후후후후. 이렇게 다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뭐, 이게 다 제가 제시간에 선박을 준비해 온 덕분이지만, 굳이 감사의 인사는 받지 않겠습니다. 같은 천우맹끼리 돕는 건 너무 당연……. 켁!”

너스레를 떨어 대던 임소병의 턱주가리에 청명의 주먹이 냅다 틀어박혔다.

“이 새끼가 그냥 넘어가 주려니까 그걸 또 긁어 대네? 야, 이 새끼야! 네가 일각만 일찍 왔어도 장일소 모가지를 땄어! 내가 빨리 배 긁어 오라고 했더니 그거 하나 똑바로 못 해서 지각을 해?”

생각하다 보니 또 분한지 청명은 아예 임소병의 배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렀다. 얼굴로 쏟아지는 주먹을 필사적으로 막아 내며 임소병이 항변했다.

“아, 아니! 그게 왜 제 잘못입니까? 저는 최선을 다했……!”

“오호, 너도 사파 새끼라 사파 대장 모가지 날아가는 건 못 보겠다 이거냐? 변명 그만하고 죽어, 이 새끼야! 죽어!”

“아니, 나는 그 새끼랑 원수라고요! 아악! 미치겠네!”

남궁도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이게 무슨……?’

어떻게 이만한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크흠.”

그 순간 현종이 나지막이 헛기침했다.

남궁도위가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현종을 획 돌아봤다. 그래, 당연히 저건 벌을 받아야…….

“회의를 시작하지요.”

“예.”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일단 첫 번째 현안으로…….”

임소병을 후려 까는 청명과 그 광경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논의를 시작하는 다른 이들.

그 기막힌 광경을 망연히 보던 남궁도위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오대세가에 다시 끼워 달라고 할까?’

확실히…… 적응이 쉽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하…….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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