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7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2)
기세 좋게 강변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사실 화산과 당가는 그리 멀리 이동하지 않았다.
부상이 심한 남궁세가를 돌보기 위해서라도 가까운 곳에 숙소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고, 그들이 구강에 건설한 마을은 그런 화산과 당가가 기거하기에 딱 알맞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구파랑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불편하지 않을까?”
“불편하면 저기 다리 부러지게 서 있는 새끼들이 불편하지. 우리가 왜 불편해?”
“그 말도 맞네.”
그리하여 화산은 과거 녹림이 사용하던 장원에 자리를 잡았다.
짐을 풀 시간도 없이 부상자들을 돌본 끝에 해가 질 무렵에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부상자들이 말이다.
화산 말고.
“생각할수록 빡치네, 미친 문어 대가리 놈이!”
청명의 눈이 희번덕댄다.
“뭐? 결탁? 결타아아아아악? 저 미친 중놈 새끼가 진짜 터진 입이라고 막 떠들어! 주둥아리에 목탁을 처박아 버릴라! 어디서 모함질이야!”
“크흠, 청명아.”
“왜!”
백천이 나지막이 헛기침했다. 그 분노야 이해하지만 소림의 방장에게 너무 험한 말을 하는 건 사숙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강호의 어른에게 말이 너무 지나치구나.”
“사숙 돌았어?”
“그 말이 아니라…… 병일 수도 있잖느냐. 치매가 왔다거나.”
“…….”
조걸이 의아한 듯 옆에 있는 윤종에게 물었다.
“사형. 무인도 치매가 옵니까?”
“나도 안 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요?”
“오늘 일을 보고 나니 올 수도 있는 거구나 싶더라.”
“아…….”
화산의 문도라면 누구라도 익숙하게 여길 만한 평범한 대화였다.
다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지금 그들의 앞에 반들거리는 대머리가 한 명 있다는 점이었다.
차마 이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던 혜연은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눈을 굴리고 있자니, 아니나 다를까 불똥이 튀었다.
“야. 어떻게 생각하냐? 땡중아.”
“아, 아미타불……. 무, 무슨 말씀이신지?”
“방장 새끼가 아주 회까닥 돌아 버린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혜연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도 눈이 있는 사람인지라 화산과 소림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볼 수밖에 없었다. 법정이 그들을 사파와 결탁한 무리로 몰아 갔을 때는 저도 모르게 방장의 면전에다 쌍욕을 박아 버릴 뻔하지 않았던가?
그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면 소림의 역사에 길이 남을 기사멸조의 순간이 되었을 것이다.
“아, 어떻게 생각하냐고.”
혜연은 고뇌에 휩싸였다. 아무리 이젠 소림 소속이라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지만, 법정은 그에게 어버이나 다름없었던 이다. 그런데 다른 이들 앞에서 마구잡이로 험담을 늘어놓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청명은 그런 혜연의 사정을 눈곱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았다. 생각은커녕 고개를 삐딱하게 꺾은 채 제 얼굴을 혜연의 앞에 들이밀었다.
“귀가 먹으셨어? 머리가 반질반질하니, 고막도 반질반질하신가?”
조걸이 윤종에게 다시 속삭였다.
“사형. 고막이 반질반질하면 더 잘 들리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의원이 아니라 거기까진 잘…….”
혜연은 슬쩍 그 둘을 보며 입술을 꽉 물었다.
저 새끼들이 더 밉다, 저 새끼들이.
“왜 대답을 못 해?”
그때 잠자코 청명이 하는 양을 보던 백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청명아.”
“아, 또 왜!”
“혜연 스님이 대답하기 곤란해하시잖느냐. 그만 물어보거라.”
청명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하지만 무어라 욕을 하기도 전에 백천이 담담히 말했다.
“원래 사람이란 다 그렇다. 몸이야 화산과 함께하시지만, 마음만은 소림과 함께하시겠다는데 우리가 그걸 어찌 막겠느냐? 그것마저 이해해 주어야 진정한 친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 그런 거야? 여전히 소림이 더 좋으시다?”
혜연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백천 저 새……. 아니, 백천 도장이 더 싫다.
“히야아.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었네. 그러니까, 우리보고 사파랑 결탁했다고 하는 놈을 아직도 싸고돌겠다는 거잖아? 이 새끼 알고 보면 법정이랑 짜고 화산에 파고든 첩자 아냐?”
“음?”
“어?”
“흐으으음?”
오검의 눈빛이 일제히 한곳으로 쏟아졌다. 눈을 껌뻑이던 혜연이 펄쩍 뛰었다.
“처, 첩자라니요! 불자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습니까?”
“왜 못 해, 이 새끼야! 네 방장은 딱 보니까 나라도 얼씨구나 팔아 먹겠더구만! 네가 그 꼴을 보고도 그 말이 주둥아리에서 나오냐? 소림 놈들은 양심에 털 나서 태어나는 게 기본이야?”
“그, 그건…….”
혜연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그래서, 아까 네 방장 하는 꼴 봤어, 못 봤어?”
“저, 저는…….”
“그래, 너는.”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
그 순간 모두가 멍하니 혜연을 바라보았다. 혜연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못 보셨어?”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난 청명이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단숨에 혜연의 머리를 내리쳤다.
“꺄울!!”
“잡아!”
“내 이럴 줄 알았지!”
기겁한 오검이 혜연에게 달려드는 청명을 잡고 늘어졌다.
“놔! 안 놔? 저 땡중 새끼 콱 그냥!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뭐? 못 봐? 이 새끼야! 어차피 그 눈 쓸모도 없는 것 같은데 오늘 아주 내가 뽑아 드려?”
“청명아! 진정해라!”
“인마, 그런다고 사람을 패냐!”
“그래, 청명아! 다른 건 모르겠는데, 혜연 스님이 검은 머리 짐승은 아니잖느냐! 머리가 없는데.”
“…….”
“…….”
순간 정적이 흘렀다. 달려들던 청명도, 그를 부여잡던 오검도 모두 멍하니 조걸을 돌아보았다.
“……왜요?”
“……미친놈.”
“대단하다.”
“시주, 그건 좀…….”
“넌 닥쳐, 이 새끼야!”
청명이 다시 눈을 까뒤집고 혜연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것쯤이야 이제는 화산의 일상이나 다름없는지라, 아무도 이곳에 눈길을 주고 있지 않았다.
단 한 사람은 빼고 말이다.
“…….”
남궁도위는 이로 혜연의 머리를 물어뜯고 있는 청명을 멍하니 보았다.
‘뭐지?’
저 사람이 내가 보던 그 사람이 맞나?
빤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마침 근처에 지나가는 당패를 붙잡았다.
“저, 저기, 소가주님.”
“예?”
“……여긴 원래 이럽니까?”
그의 질문에 당패가 슬쩍 고개를 들어 청명과 오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 곧 익숙해질 거요.”
그러더니 안쓰럽다는 듯이 남궁도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쌩하니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이제 청명은 혜연을 아예 패대기치고 있었다.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남궁도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생각해 보니…….’
원래 저런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비무대회라든지. 비무대회……. 그렇지, 비무대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장 어제 매화도에선 흑룡왕을 쓰러뜨리며 영웅적인 활약을 보여 준 이가 아닌가? 그때 그가 보였던 검은 여전히 남궁도위의 뇌리에 전율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 죽어! 이 박쥐 새끼!”
“바, 박쥐가 아닙니다!”
“박쥐가 아니야? 도포 입은 대머리가 어디 있어! 머리를 기르든가! 옷을 벗든가! 둘 중 하나만 해야 할 거 아냐!”
“그, 그건…….”
저러고 있네.
어, 저러고 있어.
머리로는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가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아, 좀 진정하라고 인마! 소림에 대한 화풀이를 왜 스님한테……. 어?”
그 순간 윤종이 멀뚱히 서 있는 남궁도위를 발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예. 안녕…하십니까, 도장.”
윤종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해 왔지만, 그 인사를 받는 남궁도위의 표정은 영 떨떠름했다.
“뭐야? 저거 부상자 아냐? 왜 또 기어 나와 있어?”
청명의 관심이 자기한테 쏠리자 남궁도위가 재빨리 목을 가다듬었다. 인간이 이상한 건 이상한 거고, 일단 할 건 해야 했다.
“도장. 정식으로 다시 감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남궁도위가 깊이 포권 했다.
그 모습을 뚱하니 보던 청명은 백천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숙.”
“응?”
“원래 명문 애들은 저런가? 했던 인사를 막 몇 번씩 다시 하고?”
“……그걸 왜 하필 나한테 묻지?”
“그야 사숙은 뼈대 깊은 종남 출신이잖아.”
“아니라고, 이 새끼야! 나는 뼛속부터 화산인이라고!”
“저, 저 아주 모옷된 패륜아 같으니. 쯧쯧. 동룡이라는 좋은 이름을 내려 주신 부모를 배신하고.”
“너한테만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어, 그렇지.
그러고 보니 저 사람이 그 장강에서 수적들을 상대로 길을 뚫었던 그 화산정검이지.
그때는…… 참 멋있고 든든했는데.
‘아니, 그런데 이름이 동룡인가?’
사람의 이름이 굳이 얼굴과 어울릴 필요는 없겠지만, 이 정도면 얼굴과 이름이 불협화음을 이루다 못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지경이 아닌가.
“그래. 뭐. 예의 바른 게 나쁜 건 아니니까.”
청명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건성으로 말했다. 말과는 달리 눈엔 ‘저 쓸데없는 짓거리나 해 대는 애송이를 대체 어디다 써먹어야 하지?’라는 빛이 노골적으로 어려 있었다. 남궁도위 눈에도 훤히 보일 만큼.
“그래서, 용건 끝?”
“아, 아니요.”
남궁도위는 자꾸 삐질삐질 배어나는 땀을 훔쳤다.
“아, 앞으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하러 왔습니다.”
남궁도위가 다시 깊이 허리를 숙였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그는 마음 깊이 확신했다.
‘화산은 더없이 강해졌다.’
원래 화산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강호에 이름조차 없던 문파가 바로 화산이었다.
‘그리고 비무대회 때만 해도 그냥 좋은 후기지수를 보유한 문파에 지나지 않았어.’
하지만 이번에 이들이 장강에서 보여 준 모습은 그런 남궁도위의 생각을 완전히 부숴 놓았다. 이들은 불과 몇 년 만에 남궁세가와도 대등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가는 전력을 갖춘 문파가 된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지만 두 눈으로 본 것을 부정할 도리는 없다.
‘그건 달리 말하자면, 지금 천하에서 문파를 재건하는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게 바로 화산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찰싹 달라붙어야 한다.
반쯤 무너져 버린 남궁세가를 완벽하게 재건하기 위해서라도 화산, 그리고 화산검협에게 배워야 한다.
‘청명 도장은 반드시 도와줄 것이다. 반드시.’
청명은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 깊은 협심을 생각한다면, 절대 남궁세가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남궁도위는 그리 생각했다.
문제는…….
“사숙.”
“응?”
“얘 뭐라는 거야?”
“이제 천우맹에 가입했으니까 잘 부탁한다잖아.”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냐고.”
“소림 방장 앞에서 오대세가 때려치우고 천우맹 들어온다고 했잖아. 안 듣고 있었어?”
“아아, 그거?”
청명이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그겁니다.”
남궁도위가 환한 얼굴로 청명을 응시했다.
“그러니 앞으로…….”
“야.”
“……예?”
다시 고개를 숙이려던 남궁도위가 순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만 살짝 들었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꺾은 채, 세상 모든 아니꼬움을 모조리 쑤셔 박은 듯한 얼굴로 바라봐 오는 청명을 말이다.
“가입?”
“……예. 가입…….”
“누가 받아 준대?”
“예?”
청명이 귀를 휘휘 후벼 파더니 손가락을 훅 불었다.
“안 사요.”
“예?”
“안 산다고.”
“…….”
그래, 문제는…… 청명이란 놈이 남궁도위의 생각 이상으로 이상한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무척 슬프게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