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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86화 (987/1,567)

986화.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1)

법정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저…….’

제 할 말만 쏟아 내고 몸을 돌려 버린 청명을 보니 달군 숯이라도 삼킨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미 돌아선 청명을, 저 말에 반박하기 위해 붙잡는 게 얼마나 구차해 보일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

‘화산검협!’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젠 누구도 화산검협의 말에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제 와 법정이 아무리 목청을 높인다고 한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그의 논리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법정은 청명이 아닌 다른 이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이게…… 이게 천우맹의 뜻입니까?”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를 쓰며 현종과 당군악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화산검협의 말에 아무리 무게감이 실린다고 해도, 그는 공식적으로 천우맹에서 어떠한 직책조차 받지 못한 이다. 그의 말이 곧 천우맹의 뜻이 될 수는 없다는 의미다.

결국 천우맹의 뜻은 현종과 당군악이 정하는 것.

법정은 기세를 내뿜으며 그 둘을 압박했다.

“대답해 보십시오. 이게 정녕 천우맹의 뜻입니까?”

현종이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천우맹의 뜻이라기에는 조금 과격하기는 합니다만, 글쎄요…….”

그 의뭉스러운 대답에 법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장문인!”

다급하게 다그쳐 보았지만, 현종은 그저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저 아이의 말대로 우리는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고민 없이 매화도로 향할 것입니다.”

“…….”

“저희가 한 일에는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만약 세상이 우리를 비난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저희가 한 모든 것은 세인들에게 내보이기 위함이 아니었으니 감수할 수밖에요.”

법정이 두 눈을 부릅뜨고 현종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세인들에게 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비난을 감수하겠다?

이게 한 문파를, 나아가 맹을 이끄는 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지금…… 그 선택이 정말 옳다고 생각하시오?”

“방장.”

현종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

“그렇기에 완전히 옳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내가 과연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법정을 꼬집어 한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법정은 현종이 ‘그대는 정말 스스로 옳다 생각하시오?’라고 묻는 것처럼 느꼈다. 견딜 수 없는 불편함이 속을 갉아먹었다.

반면 현종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깊디깊은 눈에 어려 있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제 가슴은 제가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남의 눈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소림의 방식을 저희에게 강요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천우맹은 천우맹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겠습니다.”

“…….”

“대답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현종이 뒤로 물러섰다.

물론 법정은 그를 잡아 두고 싶었다. 이대로 천우맹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현종의 뒤에서 나온 누군가가 법정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원래 순백색이었을 무복을 자신이 흘린 피로 검붉게 물들인 이. 절뚝거리는 걸음마다 진득한 원한이 담긴 이.

아무리 법정이 다급하다 해도 이자를 무시하고 현종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다름 아닌 남궁도위였기 때문이다.

“……남궁 시주.”

법정의 앞에 선 남궁도위는 두 눈에 원독을 가득 담아 노려보았다.

왜 아니겠는가?

소림은 남궁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했다.

차라리 이 강변에 아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곳까지 와서 철저히 유린당하는 남궁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처사였다.

물론 법정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그 지옥을 겪은 남궁세가에게 통하겠는가?

법정조차도 남궁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남궁가 사람들 중에서도 소림에 가장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을 남궁도위를 마주하니 말문이 막힐 수밖에.

법정이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남궁도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결탁이라.”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장의 말대로라면, 저희 남궁세가는 사패련과 천우맹이 결탁한 대가로 구차한 목숨을 구한 것이 되는군요.”

“시, 시주.”

“어찌하리까?”

퀭해져서 우묵하게 파인 남궁도위의 눈에서 일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더러운 결탁 덕에 살아 나온 이 구차한 목숨, 이제라도 자결해 그 명예라도 되찾아야 합니까?”

“남궁 시주. 내 말은…….”

“하하……. 하하하핫.”

남궁도위가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죽어 나자빠졌어야 할 것들이 괜히 살아 돌아와 방장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 같습니다. 사죄드립니다.”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정말 아닙니까?”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한 남궁도위가 다그쳤다.

그의 눈이 묻고 있었다.

소림은 정말 남궁세가가 저 섬에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랐었냐고. 남궁세가의 구출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차라리 생존자가 없기를 바라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법정은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남궁도위 하나만이 문제라면 귄위로 어떻게든 찍어 누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남궁의 생존자들이 하나같이 그를 철천지원수 보듯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입이 열 개라 해도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저희가 사라져 드리는 게 도리겠지요.”

남궁도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곳의 모두를 돌아보았다.

“남궁의 소가주로서……. 그리고 지금 부재한 가주를 대리하는 가주 대행으로서!”

그의 목소리가 웅혼하게 퍼져 나갔다.

“현 시간부로 남궁세가는 오대세가를 탈퇴하고 천우맹으로 그 적을 옮길 것입니다.”

“나, 남궁 시주!”

법정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구파에게 응당 악감정을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자리에서 이런 선언을 할 줄 법정이 어찌 알았겠는가?

“이건 감정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오!”

“예, 이성적이어야지요. 여기에서 매화도를 철저하게 지켜만 보시던 방장처럼 이성적이어야지요!”

“…….”

말문이 막힌 법정을 향해 남궁도위가 이를 드러내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러니 천우맹이 사파와 결탁했다는 주장을 하실 때, 꼭 이 말도 함께 해 주십시오. 남궁세가도 사파 놈들의 주구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

“보중하십시오, 방장.”

더는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남궁도위가 몸을 획 돌렸다.

법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 이래서는 안 된다.’

남궁세가만은 천우맹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 아니, 설사 남궁이 천우맹에 합류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게 지금이어서는 안 된다!

누가 믿겠는가?

남궁이 천우맹에 합류해 버리는 순간, 법정이 한 모든 말은 헛소리가 되어 버릴 것이다. 심지어 그가 지금 천우맹을 의심했다는 사실조차 추문이 되어 버릴 터!

모든 명분은 천우맹이 가져가게 되고, 소림과 구파의 위상은 말 그대로 두엄 더미에 처박히게 될 게 분명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것만은!

“남궁 시주! 생각을 다시 하시오! 남궁…….”

“그만두십시오!”

그 순간 누군가 법정의 어깨를 잡아챘다.

돌아보니 어느새 옆까지 다가온 종리형이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때가 아닙니다, 방장.”

“……장문인.”

“의혹을 제기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저기 신음하는 부상자들이 있습니다. 불가의 자비를 논하셔야 할 방장께서 사건의 진위를 밝혀 소림의 체면을 살리는 일을 부상자의 치료보다 우선시하신다면, 천하가 방장을 어찌 보겠습니까?”

“말씀이 과하시오!”

법정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종리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더한 막말을 퍼부어 버리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추한 꼴을 보였다고 한들, 소림은 구파의 북두다.

그리고 공동은 구파, 그중에서도 소림 외에는 달리 비벼 볼 만한 곳이 없는 문파다.

싫든 좋든 소림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에게 이 이상의 지적은 불가능했다.

“……지금은 그냥 보내시지요, 방장.”

그는 더 몰아붙이는 대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보는 눈이 많지 않습니까.”

그 말에 법정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소림과 공동 뒤에 선 개방의 거지들이 눈을 빛내며 이 광경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다.

저들은 천하 곳곳으로 말을 퍼 나르는 것이 업이다. 그 말이 제아무리 개방주에 의해 통제된다고는 하나, 저 많은 눈과 입을 모조리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저들의 눈빛이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기서 더 무리수를 둔다면 저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 천하로 퍼져 나갈지 모른다.

‘빌어먹을.’

법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소매 아래로 감춘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장강에서 저지른 실책이 너무도 컸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대가가 너무 지독하고 가혹하지 않은가?

법정은 억울함에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들 역시 남궁을 구하기 위해 이 먼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왔다. 소림에게도 남궁을 향한 선의가 있었음을 어째서 몰라준단 말인가?

“그럼 보중하십시오, 방장.”

현종이 법정을 향해 깊게 포권 했다.

그 지극한 예는 떠나는 순간까지 조금의 책도 잡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몸을 세운 그는 법정의 예를 기다리지도 않고 휙 돌아서며 소리쳤다.

“숙소를 수배해 부상자들을 옮겨라!”

“예, 장문인!”

구파의 제자들을 일별한 천우맹의 맹도들이 현종의 지시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던 당군악 역시 법정에게 더없이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는 몸을 돌렸다.

법정은 핏발 선 눈으로 앞만 응시했다. 극심한 굴욕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도열한 천우맹은 일사불란하게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결국은…….’

짓깨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결국은 이리되는가?’

법정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쯤 되니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저들을 품을 수 없구나.’

화산과 마찰이 있었을 때도 불같이 화가 치밀기는 했지만, 어쨌든 마음 한구석에는 천우맹을 결국 그가 바른길로 이끌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남아 있었다. 의견이 잠시 갈려서 생긴 다툼쯤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봉합될 것이라고.

하지만 이 순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저들은 결코 구파와 함께 갈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결국, 그 말대로군.”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법정의 눈빛이 불자답지 않게 써늘한 한기를 머금었다.

오늘, 바로 이 순간.

구파와 천우맹, 강호의 정의를 대변하는 양대 세력 사이에 더는 봉합할 수 없는 균열이 생겨났다.

사파가 발호하는 난세에 발생한 이 균열이 강호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지금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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