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85화 (986/1,567)

985화.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지. (5)

화산검협 청명.

그 이름은 분명히 강호에서 큰 울림을 가진다.

정(正)을 표방하든, 사(邪)를 표방하든, 강호에 몸을 담은 이라면 이제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 바로 화산검협 아니던가?

하지만 그 이름을 알고, 화산검협이 강호에서 지니는 상징성을 이해하는 이들에게도 이건 명백히 어색한 광경이었다.

소림, 화산, 사천당가.

쟁쟁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세 문파의 수장들이 서로 이를 드러내고 격렬하게 다투는 숨 막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 끼어들기에는 아직도 화산검협의 이름은 아직 너무도 작아 보였다.

게다가 그가 보인, 무례함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언행은 다른 문파였다면 기사멸조의 죄로 다스려도 이상하지 않은 일.

하지만 화산은 그런 청명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실로 괴이한 일이지만, 그건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일일지 모른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 화산이 진정 어떤 문파인지 안다고 자부할 이는 일 할도 채 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이 진짜 의문을 품은 일은 따로 있었다.

‘왜 당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거지?’

바로 당가의 태도였다. 당군악이 노기를 폭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 삼대제자가 끼어들었다. 이는 당가의 입장에서는 모욕이라고 느끼기에 충분한 상황이지 않은가.

제아무리 화산검협이 사천당가와 친분이 있다고는 해도, 천하 어떤 문파도 따라가기 힘든 당가의 결속을 생각해 보면, 당가의 식솔들이 안색을 굳히며 청명을 공격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당가가 침묵하고 있다. 그저 앞으로 나서는 청명의 모습을 굳은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심지어 그 눈빛엔 더없는 신뢰가 어려 있었다.

이러니 보는 이들이 당혹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그럴 수밖에.’

적잖이 당황한 구파일방의 면면들을 본 자오개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당황한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매화도에서 화산검협이 어떤 이인 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면, 이들과 같은 얼굴로 서 있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만약 매화도에서 화산검협이 흑룡왕을 쓰러뜨리는 광경을 이들이 눈앞에서 직접 보았다면 그 반응이 확연하게 달라졌으리라는 의미다.

청명은 자신이 이 대화에 낄 자격이 있음을 제 손으로 증명했다. 문파에서 배분이란 더없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실력.

흑룡왕을 단독으로 상대해 쓰러뜨리는 이에게 누가 감히 건방지다는 말을 꺼낼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자오개는 그를 굳건한 눈으로 바라보는 천우맹과 의혹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구파의 반응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천우맹의 사이를 걸어온 청명이 긴 침묵을 뚫고 입을 열었다. 그의 두 눈은 법정을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결탁했으면?”

법정은 굳은 얼굴로 그런 청명을 마주 보았다.

“어쩌겠다는 거지?”

그 모습은 무척이나 상징적인 광경이었다.

법정은 소림의 방장이다. 현재 강호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지닌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소림의 방장에게 화산의 일개 삼대제자가 쏘아붙이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극심한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의혹과 실망 가득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붕괴하지 않았던 법정이라는 이의 위상. 그 위상이 지금 흙발로 쳐들어온 적도의 침범을 받고 있는 순간일지도 몰랐다.

“……시주.”

법정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실룩였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가 아는 청명이라는 작자는 참으로 경박하지만, 또 동시에 그 행동 하나하나에 의도가 어려 있다. 결코 청명의 생각대로 움직여 줘서는 안 된다.

“그 말은 무척 위험하게 들리는구려.”

그렇기에 법정은 되레 웃었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어린아이도 품어 주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렇다면, 시주는 지금 천우맹과 사파가 결탁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오?”

청명이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

“…….”

“그럼 어쩔 거냐고.”

만들어 낸 미소는 금세 깨지고, 법정의 얼굴에 노기가 드리워졌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라서 그리 말하는 거요?”

준엄한 질책. 스스로가 윗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내보이는 듯한 말투였다. 화산검협의 태도가 소림의 방장을 대하기에 적절치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할 만한 말투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옳은 이야기라 해도 적절한 태도와 예의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 빛이 바래는 법이 아니던가?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이도 있다.

“중요해?”

청명이 피식 조소했다.

“그래, 퍽 중요하겠지. 너희에겐 말이야.”

“이보시오. 시…….”

“그런데.”

싸늘한 청명의 목소리가 법정의 말을 끊어 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딴 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남궁을 어떻게 구해 내는가였을 뿐이지.”

사나운 맹수가 으르렁대는 듯한 그 말투에 법정의 입술이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너희가 여기에서 죽어 가는 이들을 구경만 하고 있을 때, 우리는 직접 저 강에 뛰어들어 목숨을 걸고 남궁을 구해 왔다. 그런데 뭐? 결탁?”

청명의 살기 어린 눈은 법정을, 아니. 정확히는 그 뒤에 숨은 채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는 구파의 제자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감히 청명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 위세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정과 협의를 숭상하는 이들이라면 저 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묻지.”

“…….”

“결탁했으면 뭘 어쩔 건데? 검을 뽑아 들고 우리 목을 모조리 베기라도 할 셈인가?”

“시주. 내 말은…….”

“해 봐.”

법정을 노려보는 청명의 눈에서 살기가 뚝뚝 흘렀다.

“해 보라고.”

그가 짐승처럼 이를 드러내니, 그 기세에는 천하의 법정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실 이들을 다그칠 때, 그에게 딱히 뒷일에 대한 대책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이 부분을 지적하면 구파가 받아야 할 비난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뿐.

하지만 억울하다 항변하고 길길이 날뛰어야 할 이들이 되레 이리 나와 버리니 오히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청명의 말 그대로다.

이들이 사패련과 결탁했다면 뭘 어쩔 것인가? 사분오열된 구파를 이끌고 이들을 징죄하기라도 할 텐가?

그 순간 법정은 깨달았다. 단 한 번도 그들의 상대가 되리라 생각해 본 적 없던 천우맹이 어느새 그들의 턱에 비수를 들이댈 만큼 커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구파가 자중지란에 빠져 그 세를 잃어서이든, 천우맹이 예상 이상의 성장을 보여 세를 불려서이든,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천우맹이 그들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보라.

청명이 적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음에도 현종과 당군악은 그를 말리려 들지 않는다. 천우맹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이 두 사람조차 구파와의 적대를 꺼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뿐 아니다. 그 뒤로 도열한 천우맹의 맹도들 역시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다.

그가 언제 이런 적의를 마주해 보았겠는가?

언제나 흠모와 신망이 가득한 눈빛만을 상대하던 법정에게 천우맹의 적의는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시주.”

“신물이 난다. 너희가 지껄여 대는 그 ‘도리’가.”

청명의 시선에 온기라고는 없었다.

법정은 지금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시작은 천우맹의 발목을 잡는 것에서 출발했지만, 이야기하면서 본인의 논리가 정당하다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걸 알아 더 속이 뒤집혔다.

죽어 가는 이들보다 제 고결함이 더 중요하다고 지껄여 대면서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함이, 그 잘난 원리와 원칙을 들먹이면서 칼에 찔려 죽어 가는 이들을 외면하는 비정함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논리 아래 죽어 갔던가?

사파와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 새외의 야만인들과는 협의할 수 없다. 무사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스스로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 전장에서 피를 흘려 본 적도 없이 후방에서 입만 놀려 대는 그 높은 놈들의 논리에 얼마나 많은 피가 땅을 적셨던가.

청명이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들이 그 희생에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결탁? 그럴지도 모르지. 이들의 눈에는 현종과 장일소의 합의가 결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반박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필요하다면 결탁 따위는 얼마든지 할 테니까.

화산의 제자들을 하나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청명은 장일소의 발을 핥는 일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천하가 그를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되레 그들을 차게 비웃어 줄 수 있다.

그러니 이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에 아등바등 핏대를 세울 이유가 없다.

“마음대로 지껄여 봐.”

“…….”

“어차피 우리가 뭐라 변명해도 그럴 거잖아. 아냐?”

청명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 노골적인 비웃음이 법정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멋대로 떠들어 봐. 우리가 사파와 결탁해서 강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고. 이 매화도에서 벌어진 모든 일이 천우맹의 수작이었다고.”

청명이 법정과 구파의 제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그게 너희 방식이잖아?”

“시주! 그게 협의를 숭상하는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요?”

법정이 더는 듣고 있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호통을 듣고도 청명의 얼굴은 그저 차갑기만 했다.

“협의?”

청명이 입꼬리를 뒤틀며 비웃었다.

“나는 그런 거 몰라.”

“……뭐라 했소?”

“나는 그런 거 모른다고. 협의니, 뭐니…… 너희들 마음대로 지껄여. 나는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

얼이 빠져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법정을 보며 청명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 뭔 줄 알아?”

뜬금없는 질문에 법정의 두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청명이 그 대답을 들려주었을 때, 그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여기에 있던 너희처럼 말이야.”

고요한 침묵이 강을 타고 흘렀다.

딱히 잘잘못을 가릴 것도 없다.

차마 앞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구파의 제자들과 당당히 고개를 들고 있는 천우맹의 맹도들만 보더라도 누가 옳은가는 명확하다.

“언젠가는 너희도 남궁과 같은 상황에 처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

“…….”

“그때도 똑같이 말해 봐.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목이 날아갈 때도 이게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면 적어도 그 신념만은 인정해 주지.”

구파 제자들의 몸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거면…….”

청명에게서 흘러나온 살기가 칼날처럼 모두의 가슴을 찔렀다.

“그 역겨운 주둥아리 닫고 꺼져. 더는 참아 주기 힘드니까.”

“시주!”

법정이 결국 몸을 움직인 순간, 청명이 그를 일별했다.

“…….”

한없이 차가운 시선에, 힘이 바짝 들어갔던 법정의 어깨가 절로 내려앉았다.

“삼 년 전에 죽였어야지.”

“이…….”

“그렇지?”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인 청명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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