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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984화 (985/1,567)

984화.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지. (4)

뼈가 시릴 정도의 침묵 속에서, 백천은 넋을 잃은 얼굴로 법정을 보았다.

‘지금…….’

지금 저 작자가 대체 뭐라고 지껄인 거지?

결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린 건가? 천우맹이, 저 사파와?

백천의 두 눈에 순간 혈기가 몰렸다. 피가 거꾸로 치솟고, 심장이 타는 듯한 분노가 들끓었다.

“이…….”

핏발 선 눈으로 법정을 향해 나아가려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 잡아 지그시 눌렀다.

이를 악물고 돌아보니 운검이 서 있었다. 그 역시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내저으며 백천을 만류했다.

“……기다리거라.”

“사숙.”

“장문인께서 상대하실 일이다.”

하지만 운검 역시 노기를 참기 힘든 모양으로, 하나 남은 그의 손이 백천의 어깨 위에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법정의 말에 놀란 건 화산뿐만이 아니었다. 공동의 장문인 종리형 역시 경악하다 못해 황망한 얼굴로 법정을 바라보았다.

‘결탁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분명 이곳에서 저 매화도에서 벌어진 일을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순간, 침묵을 깨고 현종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의 얼굴에는 노기도, 억울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감정 없는 얼굴로 법정을 마주했을 뿐이다. 하지만 현종이 어떤 이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지금 그가 얼마나 큰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방장께서 무엇을 물으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말투에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실려 있지 않았다. 현종이 이렇게 말하는 건 좀처럼 듣기 힘들었다.

법정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말 그대로입니다.”

“…….”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수로채가 섬을 빠져나오는 천우맹을 공격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희가 흑룡왕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이지요.”

“그렇습니까?”

법정이 의외라는 듯 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화산검협이 아직 하선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달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대답이 되었는지요?”

법정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 대답에, 현종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장문인.”

법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설마 장문인께서 저 수적들에게 그만한 신의가 있다고 주장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방장.”

현종의 얼굴에 처음으로 노기가 어렸다.

사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지금 법정이 표하는 의문은 정당할 수도 있다. 그들이 섬을 빠져나오는 과정은 분명 이곳에서 보기에는 부자연스러웠을 테니까. 그걸 이해하지 못할 현종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지금 노기를 참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악의.

법정의 말끝마다 섬뜩한 악의가 진득하게 묻어나기 때문이다. 의문을 표하고 납득이 갈 만한 해명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대답이야 어찌되었든, 어떻게든 그들을 더러운 곳으로 처박아 짓밟고 말겠다는 악의가 도사린 것이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남궁을 구해 냈습니다.”

“남궁을 구출한 천우맹의 협의에는 저 역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법정의 시선이 현종의 뒤에 도열한 화산으로 향했다. 죽일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그 어린 검수들에게로 말이다.

“그래서 누가 목숨을 잃었습니까?”

“방장!”

현종이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지만, 법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천하의 만인방과 수로채가 점거한 곳으로 쳐들어가 희생 하나 치르지 않고, 유유히 빠져나온 이 상황이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냐는 말입니다.”

결국 현종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노기가 피었다.

이 미친 작자가 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상식적으로, 천우맹과 사패련 사이에 모종의 협약이 있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게 아니면 천우맹의 힘이 저 사패련을 상대로 희생 하나 치르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주장하실 셈입니까?”

법정의 얼굴은 엄중했다. 사심 하나 없는 듯 진중한 표정과 준엄한 질책을 듣고 있자면, 화산이 정말 뭔가 잘못하지 않았겠는가, 하고 절로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대화를 숨죽여 듣던 공동과 개방의 제자들이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법정이 하고 있는 말이 그리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단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하나뿐입니다.”

현종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산은 저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가 흑룡왕을 인질로 잡았기에 저들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흐음?”

법정의 두 눈이 묘하게 휘어졌다.

“그 말인즉…….”

그 눈빛을 본 현종의 얼굴이 순간 슬쩍 창백해졌다. 이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를 그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천우맹은 매화도에서 빠져나오는 대가로 천인공노할 악인인 흑룡왕을 살려 주기로 했다는 의미입니까?”

현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화산이 흑룡왕을 살려 주기로 한 이유는 그 복수가 남궁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하면 누가 믿겠는가?

이미 법정의 망측한 주장을 모두 들어 버린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악인을 순순히 풀어 주는 대가로 그들이 목숨을 구걸했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현종의 말을 순순히 믿기엔 현재의 강호가 너무도 각박하니까.

“과하시오!”

그 순간 누군가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자오개였다.

법정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천우맹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천우맹이 아닌 제 말은 믿을 수 있겠지요. 저는 저 섬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제가 본 바로는, 천우맹은 사파와 결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오개가 법정을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정은 그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대의 이름에는 그만한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 뭐라고…….”

“그대의 말을 증명해 줄 개방의 장로 직위를 버린 것은 다름 아닌 걸개, 당신이 아닙니까?”

순간 치미는 분노에, 자오개는 몸을 떨었다.

‘저 미친 작자가!’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논리랄 것도 없는 말에 무슨 수로 반박하라는 말인가?

“그리고!”

법정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눈과 귀가 모든 것을 대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우려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천하는 거대한 환란을 각오해야 합니다. 걸개께서는 정말 그 모든 말에 책임지실 수 있습니까?”

“이보시오, 방장!”

“그대가 나설 일이 아닙니다!”

법정이 무거운 기세로 자오개를 짓눌렀다.

아무리 체면을 구겼다고 하나 법정은 소림의 장문방장이다. 그가 작정하고 짓누르기 시작하니 자오개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신중하십시오, 걸개. 만약 이들이 저 사파와 일을 꾸몄다면 어쩌면 매화도로 들어간 것부터가 모두 계획의 일환이었을지 모릅니다. 그 안에서 벌어진 일만을 보고 판단을 내릴 일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자오개가 몸을 덜덜 떨었다.

하지만 역시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도 느껴 버린 것이다. 지금 법정이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음을.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자오개라고 모르겠는가. 법정이 저리 나오는 이유를 알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노기를 참기 힘들었다. 배 속에서 신물이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법정이 다시 현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천우맹이 흑룡왕을 풀어 주는 조건으로 사파와 협약을 맺은 것이 사실입니까?”

현종은 최대한 침착하려 애썼다. 여기서 괜히 노기를 터트렸다가는 법정이 원하는 대로 끌려갈 것이라는 직감이 든 것이다.

“……그리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협약이라 지칭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면 장문인께서는 흑룡왕의 목숨이 장일소에게 그토록 중요하다 여기신 것이로군요. 화산과 당가, 남궁을 모두 풀어 줘도 될 만큼?”

“그게 무슨…….”

“그리고.”

의미심장한 법정의 눈이 현종을 훑었다.

“그토록 중요한 흑룡왕을 살려 주는 대가로 그 목숨을 구걸해 나왔단 의미도 되겠군요.”

“방장.”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당군악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더는 이 짓거리를 참아 줄 수 없다는 듯이.

“그걸 어찌 협약이라 하시오. 그리 따지자면 소림 역시 장강에서 저들과 협약을 맺어 목숨을 구걸한 게 아닙니까?”

그 말을 들은 법정은 오히려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맞습니다, 가주님. 정확합니다.”

그 반응에 당군악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법정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본 순간 당군악은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무당은 봉문으로 그 책임을 졌으며, 남궁은 은거에 들었습니다. 소림 역시 막대한 대가를 치렀지요. 그래서 묻겠는데, 이 모든 상황이 지난 장강참변과 다를 게 없다면…….”

눈빛은 여전히 은근하고 의미심장했으나, 법정의 목소리엔 이제 명백한 힘이 실려 있었다.

“천우맹에서는 어느 문파가 저 사파와 협약한 대가를 치르시겠습니까?”

“이 개 같은……!”

험한 말을 내뱉은 당군악의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법정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제 그도 확실하게 이해한 것이다.

소림이 이전의 명예를 회복하기란 이제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이 장강에서 벌어진 일이 천하에 퍼진다면 세상 누구도 소림이 협의 있는 문파라고는 생각지 않게 될 터.

그에 반해 천우맹의 이름은 더없이 빛날 것이다. 더는 소림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정상적인 이라면 어떻게든 명예를 회복하고 자신들이 다시 위로 오를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법정의 노림수는 거꾸로였다.

화산도 함께 더러운 곳으로 끌어내리는 것.

말이란 아가 다르고 어가 다른 법이다.

화산이 사파로 둘러싸인 매화도에 쳐들어가 저 남궁을 구원해 내 피해 없이 빠져나왔다는 말은 큰 업적이 된다.

하지만 화산이 매화도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 위해서 흑룡왕을 살려 주기로 사파와 협상했다는 말로 소문이 퍼지면 어떻겠는가.

더러운 자에게 묻은 오물은 잘 보이지 않지만, 눈처럼 깨끗한 이의 몸에 튄 티끌은 너무도 생생히 보이는 법이다.

그 모든 의도를 깨달은 당군악이 죽일 듯한 눈으로 법정을 노려보았다. 화산과 달리 당가는 본디 소림과 악감정이 그리 깊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당군악의 눈빛은 철천지원수를 바라보는 이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저 지독한 악의에 그 역시 질려 버린 것이다.

법정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그리 흥분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천우맹이 저 사파와 고작 그런 일로 결탁할 만큼 어리석은 곳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당군악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람을 몰아칠 대로 몰아쳐 놓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습니다. 흑룡왕 하나의 목숨과 비교하기에는 화산과 당가, 그리고 남궁의 이름이 너무도 드높지 않습니까? 그 훌륭한 세 문파의 가치가 고작 수적 수괴 놈의 목숨과 바뀔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적당히 하시…….”

“혹여 흑룡왕의 목숨뿐 아니라…….”

그 순간 법정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더없이 선명하게 장강 전체로 퍼져 나갔다.

“더 많은 것을 내어 주시기로 서로 미리 밀약이라도 맺은 것이라면 모를까.”

“이 미친 작자가!”

결국 더 참지 못한 당군악의 입에서 우렁우렁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저 매화도에 들어갔다. 그런데 왜 그들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억지에 불과한 이 말은 어이없게도 효과를 보고 있었다. 법정의 뒤를 지키던 구파 문도들의 눈빛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구파의 제자라는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번엔 장강에서 저 화산이 활약하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해야 했다.

그들이 약하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 화산이 아무리 강해졌다 해도 그들은 구파일방이 아닌가? 화산보다 터무니없이 약할 리는 없다.

그런데 그들은 손도 써 보지 못한 상황에서 저 화산이 사파를 물리치고 남궁을 구출해 나온 상황을 어찌 해석해야 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화산이 지금까지 보여 준 협의가 있기에 의심만 하는 정도지, 화산이 아닌 다른 문파가 같은 일을 벌였다면, 이미 그들은 이 장강 위에 음모가 있단 결론을 내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군악의 얼굴에 핏기라고는 없었다.

‘빌어먹을.’

저들은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본인들의 눈에 명백한 시기가 어려 있다는 것을.

지금 법정은 이곳에서 장강을 지켜본 이들의 자존심을 교묘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삼인성호라 했던가.

소수의 주장은 힘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이곳에 있었던 이 많은 인원이 의심을 품는다면 그 목소리는 분명 힘을 가지고 퍼져 나가게 될 터.

‘어찌해야 하는가?’

강호에서 가장 권위 높은 이가 작정해 그들을 몰아치고, 천하에서 가장 신뢰받는 이들이 의심의 눈으로 바라봐 오는 상황을 대체 어찌 돌파해야 현명하겠는가.

천하의 당군악마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장문인.”

그때 법정이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현종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쐐기를 박겠다는 듯이.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화산은 정말 저 사패련과 아무런 협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현종은 아득한 심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섭구나.’

너무도 각박하고 무섭다. 이미 강호에 대해 알고 있다 생각했거늘, 이 지독한 악의는 또다시 그를 몸서리 치게 만들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현종이 막 힘주어 언성을 높이려던 바로 그때였다.

“……결탁했으면?”

싸늘한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강변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결탁했으면 어쩔 건데?”

화산검협 청명. 그가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북해의 칼바람보다 더 차가운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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