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귀환-983화 (984/1,567)

983화.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지. (3)

남궁황의 시신을 수습한 남궁세가의 식솔들은 통곡하다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한계까지 몰린 이들이었으니 더는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당가가 전력을 다해 돌보았다.

“좀 어떠합니까?”

당군악이 담담한 눈으로 현종을 돌아보았다.

“부상이 심한 이는 많지만, 다행히 더 목숨을 잃는 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현종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 다행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게 정말 다행이라 해도 될 일인지는 그도 의문이었다.

‘남궁이 너무 많은 대가를 치렀구나.’

가주와 장로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게다가 매화도로 진입했던 이들 중 살아남은 이는 삼분지 일에 불과했다. 매화도까지 온 것이 남궁세가의 거의 모든 전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건 수습하기 힘든 피해다.

현종은 의식을 잃은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많이 지쳐 보이고 상했지만, 그럼에도 눈을 감고 있으니 까마득하게 젊은 게 훤히 보였다.

‘짐이 너무 무겁구나.’

지금이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슬픔이 가시고 평정을 되찾은 후에는 현실이 밀려오기 시작할 터.

무엇보다 가문의 주축이 되어 주어야 할 선대를 거의 모두 잃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직 남궁명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가주의 역할을 대신할 정도는 되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설사 남궁도위가 천고의 기재라 남궁세가를 다시 이끌 수 있다고 해도, 아직은 너무 어리다. 그가 남궁황을 대신하기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십여 년 이상은 필요할 터.

‘강호의 승냥이들이 그때까지 남궁세가를 내버려 둘 리가 없다.’

화산이 이미 겪지 않았던가?

힘이 없는 문파에게 과거의 찬란한 위명은 오히려 해가 된다. 그 유명세만큼이나 노리는 이들도 많아질 테니까.

막대한 피해, 그리고 선대와의 단절.

그건 마치…….

생각에 잠겨 있던 현종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이 그와 같은 고통을 겪게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아무쪼록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군악이 작은 미소를 지었다.

부탁하는 태도가 마치 자신의 제자를 의원에게 맡기는 사람 같았다. 눈에 염려와 자애로움이 한껏 담겨 있었다. 현종에게 남궁세가와의 인연이란 작디작은 것에 불과할 텐데, 어찌 이리 진심을 담을 수 있을까?

‘보면 볼수록 대단한 분이다.’

아니, 대단한 건 현종만은 아니었다.

당군악은 난간 쪽에서 장강을 바라보고 있는 화산의 제자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굉장한 건 오히려 이쪽이지.’

화산이 강해졌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화산검협이 무려 삼 년 동안 봉문 하며 조련한 이들이 강해지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검을 들고 보여 준 모습은 익히 짐작하고 있던 당군악마저도 놀라게 했다.

‘대체 어떤 수련을 해야 이렇게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공이 강해지고 초식이 정교해지는 건 당연하다. 모든 무인들은 그걸 위해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할애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들의 강함은 단순히 그런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여하튼 신기한 사람이라니까.’

당군악은 조금 쓰게 웃고는 돌보던 환자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에게야 그저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뿌듯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당군악이 화산이라는 문파를 웬만큼은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본의 아니게 화산과 매화도까지 동행해 버린 자오개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화산이 이렇게나 강했었나?’

그의 눈에는 매화도에 진입할 때와 지금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화산과 당가는 말 그대로 별 피해도 없이 매화도에서 남궁세가를 구출해 나와 버린 것이다.

“……파란이 일겠구나.”

천우맹의 수장은 분명 화산이다. 하지만 그게 화산이 천우맹에서 가장 강한 문파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화산이 수장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천우맹의 구심점이자, 천우맹이 추구하는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는 문파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간 천우맹의 실질적인 무력은 사천당가가 담당해 왔다는 의미.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 장강에서 벌어진 일이 세상으로 알려지면 누구도 그리 생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제 화산이라는 문파는 명실상부한 천우맹의 수좌로 올라섰다. 저 구파일방의 수장들과도 비견될 수 있을 만큼 진정한 대문파가 된 것이다.

‘이 사태를 저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오개의 시선이 강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직도 소림과 공동, 그리고 몇몇 개방의 거지들이 남아 진을 치고 있었다.

* * *

법정은 다가오는 두 척의 배를 넋을 놓은 채 바라보았다. 눈가가 옅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제 발로 사지로 걸어 들어갔던 이들이 유유히 섬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히 앞길을 가로막아야 할 수로채의 배들이 오히려 그들이 나올 길을 열어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대체…….’

법정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라고 해서 이곳에 영원히 발을 붙이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일단 화산과 당가가 매화도에 발을 들인 이상, 예상할 수 있는 결과는 둘 중 하나였다.

매화도에서 남궁과 함께 몰살당하든가.

천신만고 끝에 매화도를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하지만, 저 차디찬 장강에서 수로채와 만인방의 공격을 받아 하나하나 죽어 나가든가.

전자의 경우는 그도 손쓸 수 없지만,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후자의 경우가 벌어진다면 당연히 장강으로 뛰어들어 저들을 도울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저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끝까지 구경만 하다 빠져나왔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그가 예상한 것과 완벽하게 어긋났다.

“어찌…….”

현기가 흐르던 건 아주 옛말인 것처럼, 그의 눈은 이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이 일을…… 이 일을 대체 어찌…….’

이곳에 서서 내렸던 그의 판단은 절대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다시 복기해 봐도 실수한 부분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 매화도로 들어간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화산과 당가, 그러니까 천우맹이 제 발로 매화도로 뛰어들어 남궁을 구출해 나와 버린 이상, 그의 냉철한 판단은 어리석은 자의 오판이 되어 버릴 것이고 마지막까지 참아 냈던 인내는 겁쟁이의 외면이 되어 버릴 것이다.

구파일방 전체가 천하의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을 피할 길 따윈 없었다. 아니, 지금 구파일방이 문제가 아니다.

“…….”

법정이 슬쩍 뒤쪽을 바라본다. 뒤에 도열한 소림의 무승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오는 두 척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말이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이들은 혜방의 이탈 때도 자리를 지킨 이들이었다. 그 순간에도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이들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들마저도 법정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 어리석은 놈들이!’

법정이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기 위해 속으로나마 연신 불호를 외어 젖히던 그때였다.

“……방장.”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종리형이 떨리는 눈으로 법정을 돌아보았다. 그도 한 문파의 장문인이다.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일 리 없었다.

“이, 이제 어찌할 것입니까?”

“…….”

법정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위해서 준비된 말일 것이다.

“이럴 거면 차라리 저 화산이 매화도로 향할 때, 저희도 함께하는 것이 낫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돌아간다면 이제 세상 사람들이 저희를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쏟아지는 책망에도 법정이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자 종리형이 답답하다는 듯 목청을 높였다.

“방장!”

“진정하십시오!”

법정이 노기 어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 날선 눈빛에 종리형은 순간 흠칫했다.

법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말했다.

“……저들이 곧 도착할 것입니다. 우리끼리 목소리를 높여야겠습니까?”

“하나…….”

“기다려 보십시오.”

이제 배는 강변에 막 닿을 참이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니.”

법정의 두 눈에서 새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그 와중에 드디어 천우맹을 실은 배가 강변에 와 닿았다.

쿵!

배의 앞부분이 모래톱에 살짝 걸쳐 오르는 소리가 흡사 천둥과도 같았다.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고요한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배 위로 향했다.

“부상자들을 조심해서 옮겨라!”

“예!”

녹색 무복 차림의 사천당가 무사들이 남궁세가의 생존자들을 안아 든 채 배에서 뛰어내렸다.

종리형이 눈을 딱 감았다.

‘정말로 구해 냈구나.’

멀리서 볼 땐 알 수 없었다. 저 배에 정말 남궁세가가 타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이 순간 천우맹이 남궁을 구출해 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기뻐해야 할 일이다. 더없이 기뻐하고 상찬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종리형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고통받던 이들이 사지에서 살아 돌아왔음에도 그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가슴을 헤집었다.

아마 지금 그의 뒤에 도열한 공동의 문하들도 그와 같은 심정이지 않을까?

그 와중에도 배에서는 연이어 남궁의 생존자들이 날라졌다. 평평한 곳을 찾아 의식을 잃은 남궁세가의 식솔들을 눕힌 당가인들은 그들의 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 뒤로 마침내 화산의 검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무복을 입은 그들은 배에서 우르르 뛰어내려 그 자리에 도열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이곳에 있는 이들에 대한 무시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저들이 아무리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고 돌아온 이라고는 하나, 소림과 공동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는 건 분명 예의에 벗어났다.

하지만 이곳에 선 이들은 차라리 감사했다. 도저히 저들과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들의 뒤로 화산의 장문인 현종이 그 모습을 드러낸 바로 그때였다.

저벅.

잠자코 저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법정이 먼저 발을 움직였다.

의미심장하게 걸어 화산으로 향한 그는 앞으로 나선 현종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 했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장문인.”

현종이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장강으로 오기 전 극심하다고 해도 좋을 만한 갈등을 겪은 두 사람이건만,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지난 사건의 악감정 같은 건 조금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법정은 잠깐 말을 잃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현종이 꺼낸 건 흔한 겸양의 말이다.

하지만 그 말 중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부분이 법정의 속을 있는 대로 긁어 놓았다. 그 말인즉, 소림은 당연히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물론 현종에게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법정이 아는 현종은 사람의 면전에서 일부러 비아냥거리고 비꼬는 이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악의 없음이 오히려 법정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법정의 두 눈이 날카로운 빛을 흘렸다.

“다만.”

천천히 허리를 곧추세운 그는 화산과 당가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직 장강 위를 점거하고 있는 수로채의 선단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한 가지 해명을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현종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해명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장문인. 사소한 것일지 모르나 또한 중요한 것이라.”

“……무엇입니까?”

법정이 차가운 눈으로 현종을 쏘아보았다.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수로채와 만인방이 스스로 천우맹이 빠져나올 길을 열어 준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현종이 입을 다물었다.

질문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법정의 말에 날이 서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소승의 상식으로는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방장, 지금…….”

“그러니 해명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장문인.”

두 눈을 일그러뜨리며 법정이 힘주어 말했다.

“천우맹이 저 매화도에서 사파와 결탁한 것은 아닌지, 하는 제 의문에 대해서 말입니다.”

순간 강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