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2화.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지. (2)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련주님.”
“흐음.”
배 위에 오른 장일소가 쓰게 웃었다. 그 표정을 본 호가명은 살짝 의아한 눈치로 물었다.
“문제가 있었습니까?”
“문제라……. 글쎄. 모르겠구나, 가명아. 이걸 문제라고 해야 할까.”
“…….”
“흑룡왕도 보내 주기로 했고, 전쟁도 멈췄으니 원하는 건 모두 얻었는데 말이다.”
“그럼 어째서…….”
“흐음.”
장일소가 슬쩍 매화도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말을 잘라 버린 그는 이내 심드렁한 얼굴로 지시했다.
“수로채 측에 전해라. 매화도에서 빠져나가는 이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곱게 보내 주라고 말이다.”
“예, 련주님.”
그대로 수하에게 지시를 내린 호가명은 가만히 장일소를 살폈다.
“왜?”
“……련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제가 감히 미루어 짐작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한데…….”
“쯧쯧. 빙빙 돌리지 말고 물으려무나. 뭘 새삼스레.”
호가명의 두 눈에 살짝 의혹이 일었다.
“흑룡왕이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없으면 수로채는 통제를 잃게 될 테니까요. 저희가 그들을 무난하게 흡수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하오문이나 흑귀보 역시 그걸 잠자코 지켜보지는 않을 테고요.”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저들을 이대로 보내 주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아닙니까? 적어도 피해를 입힐 순 있었습니다. 저들은 매화도에 발이 묶인 채 포위당한 상황이었으니까요.”
“흐음, 그렇지. 그 말이 맞지.”
“하면 어찌…….”
장일소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이유야 간단해. 첫 번째로는 저놈들이 이대로 죽는 것보다 무사히 강북으로 돌아가는 편이 내게 더 이득이라는 것.”
“…….”
“두 번째로는…….”
장일소가 피식 웃으며 호가명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너는 화산검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장일소의 입에서 화산검협이라는 말이 나오자 호가명의 안색이 굳어졌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니?’
매화도의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이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나올 대답이야 뻔하지 않은가?
“……괴물입니다.”
“그렇지.”
장일소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배에서 난 놈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전에 놈이 보여 주었던 무위가 아직 기억에 똑똑히 남아 있는데, 불과 삼 년 만에 저리…….”
화산검협은 홀로 흑룡왕을 쓰러뜨렸다.
그 말인즉, 저 화산검협이 이제 강호에서 손꼽히는 고수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길고 길었던 강호사에 수많은 무인들이 있었지만, 저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위치까지 올랐던 이가 또 있었던가?
무학이라는 측면에 한정한다면, 화산검협은 호가명의 인지와 상식을 훌쩍 뛰어넘는 존재라 해야 마땅했다.
“그렇기에 위험합니다. 더없이.”
“그래, 위험하지.”
장일소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지만 화산검협이 위험한 건 강하기 때문이 아니란다.”
호가명은 그 말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장일소는 고개를 슬쩍 돌려 화산검협 청명 쪽을 일별했다.
“강한 자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것일 뿐, 어렵지는 않다. 혼자 이길 수 없다면 둘이 싸우면 그만이고, 둘이서 이길 수 없다면 셋이서 노리면 될 일이지.”
이게 바로 사파의 방식이다. 호가명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일소가 느릿하게 말했다.
“무력이 강한 자가 강한 게 아니란다. 살아남을 줄 아는 자가 강한 거지. 그런데 문제는…….”
잠깐 말끝을 흐린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화산검협은 살아남을 줄 아는 이라는 점이지.”
“……예?”
그런 장일소의 얼굴에는 어렴풋하게 귀기가 어려 있었다.
“가명아.”
“예, 련주님.”
“너는 정말 화산검협이 아무런 대책 없이 저 매화도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하니?”
“…….”
“아니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뱃속에 구렁이를 수십 마리는 품은 마귀 같은 놈이 대책없이 충동적으로만 덜컥 움직일 리가 없다. 시작은 충동이었다 해도 이곳까지 뛰어오는 동안 계산을 끝냈을 터.”
“그, 그게…….”
“저기 오는구나.”
장일소가 강 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린 호가명이 이내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한눈에 보아도 수십 척이 넘는 배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 저건……?”
“화산검협이 부른 배겠지. 매화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 하지만 이미 수로채에게 근방의 배들을 모조리 접수하라는 명을 내려 두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 방해를 뚫고도 저 정도 배는 구해 올 만한 수완이 있는 놈이 하나 있지 않니.”
“……예?”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박쥐같이 정파 놈들에게 찰싹 달라붙고도, 아직 얼굴 한번 비추지 않은 놈 말이다.”
호가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임소병.”
“그래. 그놈이다.”
장일소가 쿡쿡 웃어 댔다. 하지만 그런 그와는 달리 호가명의 얼굴에서는 순간 핏기가 싹 가셨다.
그럼 저 화산검협이라는 놈은 남궁을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전력으로 달려오는 와중에 녹림왕 임소병을 통해 배를 마련했다는 건가? 매화도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오기 위해서?
“하지만 수전은…….”
“수전 따위는 치를 필요 없다. 적당히 배를 뿌려 놓기만 해도 저놈들은 널빤지를 타듯, 배를 타고 넘어갈 수 있는 놈들이니까.”
“…….”
호가명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장강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천하에 위명을 떨치는 무인들이다. 하지만 이 많은 이들 중, 이 전투의 뒤에 이리 많은 안배가 숨어 있단 걸 눈치챘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 그럼?”
뭔가를 깨달은 듯 호가명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련주님께서는 임소병이 배를 몰아 오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시면서도 홀로 매화도에 들어가신 겁니까?”
“그렇지.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느냐?”
“아, 아니…….”
“그건 어차피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저놈이 대단하다고 해도, 배가 도착할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니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배를 믿고 도박을 할 수는 없겠지.”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선단을 보며 호가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하지만 더욱 괴이한 것은…… 한 치만 어긋났으면 제 목이 달아났을 위험에서 겨우 빠져나온 장일소가 어쩐지 유쾌한 얼굴로 웃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이해하겠느냐? 내가 왜 저들을 그냥 보내 주는지?”
“예, 련주님.”
배를 마련해 둔 이상, 저들은 피해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저 섬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되었다면 흑룡왕은 당연히 목숨을 잃게 되었을 터.
‘그건 명확하게 우리 측의 손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흑룡왕을 돌려받고 저들을 순순히 보내 주는 쪽이 낫다.
“이런 기분을 느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련주님.”
“흐음.”
장일소가 미묘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매화도를 두 눈에 담았다.
“가명아.”
“예.”
“준비한 것을 보내 줘라. 어쨌거나 모양새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선물 하나쯤은 줘야겠지.”
“그리하겠습니다.”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버린 장일소가 느릿하게 걸었다. 불어오는 강바람을 헤치며 선수에 오른 그의 두 눈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 시선의 끝엔 매화도가 놓여 있었다.
“세상일이란 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지.”
그의 붉은 입술이 가만히 호선을 그렸다.
“네가 무엇을 잃었는지 지금의 네가 알고 있을까?”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 그건 안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 * *
“빨리도 오네, 저 쓸모없는 인간이!”
난간에 붙은 청명이 다가오는 선단을 보며 이를 갈았다. 저 머저리 같은 놈이 일각만 빨리 도착했어도 저 망할 장일소 놈의 모가지를 따 버릴 수 있었는데.
“쯧.”
이젠 꽤 멀어진 매화도가 보였다. 매화도에 가득 찬 수적들은 그들이 배에 올라 빠져나오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화산의 손에 흑룡왕이 인질로 잡혀 있고, 장일소까지 입을 뗐으니 그들도 별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한 사람이 청명을 향해 다가왔다.
“도장.”
“음?”
고개를 돌리니 비틀대며 걸어오는 남궁도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위태위태하게 청명의 바로 앞까지 걸어와서는 길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무인의 인사인 포권이 아니라 직접 고개를 숙이는 인사였다.
이는, 남궁세가 소가주인 남궁도위가 아니라 한 인간인 남궁도위가 표하는 예의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청명은 표정 없는 얼굴로 그런 남궁도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던 오검이 저들끼리 속닥대기 시작했다.
“쟤 왜 저러는 겁니까?”
“내버려 둬. 살면서 누구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 봤겠냐. 엿 같다는 소리야 밥 먹듯이 들었겠지만.”
저 새끼들이?
청명이 막 눈을 부라리려는 순간 남궁도위가 고개를 들었다.
“도장께서 나서 주신 덕분에 남궁이 그 이름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는 나중에.”
“……예?”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건 원한이겠지.”
청명이 시선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흑룡왕의 모습이 보였다.
“어때, 지금이라도? 굳이 사파 새끼랑 한 약속 같은 건 지킬 필요 없잖아?”
흑룡왕을 죽여 보겠냐는 뜻이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호오?”
여전히 힘겨워하고 있지만, 남궁도위의 두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리 흑룡왕을 죽이는 건 남궁의 복수가 아닙니다. 제 분풀이에 불과하겠지요. 언젠가 제힘으로 당당히 흑룡왕을 꺾어,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릴 것입니다.”
청명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궁도위는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아버지께서도 그걸 바라실 테니까요.”
남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배 위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청명은 남궁도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그럴 거다.”
남궁도위가 살짝 입술을 깨문 바로 그때였다.
“청명아!”
“응?”
“배 한 척이 접근해 온다.”
“뭐?”
청명이 갑판을 박차며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놀라 달려간 것이 무색하게도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배는 겨우 한 사람을 태운 작은 조각배였다. 조금 전 장일소가 타고 있던 바로 그 배.
“……뭐야?”
청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배에 타고 있는 것은 장일소가 아니었다. 장일소의 곁에서 몇 번 모습을 보인 적이 있는 자다.
조각배가 청명이 탄 배의 지척에 이른 순간,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산검협!”
청명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련주께서 보내신 선물이다.”
배에 탄 이가 조각배에 실린 커다란 물체를 잡아 들었다.
‘관?’
청명의 눈이 살짝 커진 순간, 그 커다란 관이 배 위로 날아 들었다.
턱!
청명은 말없이 그 관을 받아 들었다.
가만히 그를 노려보던 호가명은 제 용건은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배를 돌려 돌아갔다.
묘한 침묵이 배 위에 내려앉았다.
관을 조심스레 내려 둔 청명은 남궁도위를 바라보았다. 남궁도위 역시 짐작한 바가 있는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관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가주님!”
“크흐흐흐흐흑! 가주님!”
“으아아아아아아!”
관이 열린 순간, 남궁세가의 검수들에게서 일제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남궁황.
처참하기 그지없는 몰골이었지만, 관 안에 든 것은 분명 그의 시신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크흐흑…….”
시신을 부여잡은 남궁도위가 주저앉아 오열했다.
이 차가운 강물 아래 꼼짝없이 가라앉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장강을 떠나야 한단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던 참이었다.
그런데 남궁황의 시신이 이리 생각지도 못하게 관에 담겨 돌아온 것이다.
오열하는 남궁도위와 남궁의 식솔들을 어두운 눈으로 바라보던 청명이 시선을 돌렸다. 저 먼 곳에 있는 배 쪽으로.
‘……망할 놈이.’
증오스럽다.
그가 장일소를 이해할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평행선을 달릴 테니까.
하지만…….
“한 번씩은 사람다운 짓거리도 하는군.”
씹어뱉듯 말한 청명이 몸을 획 돌렸다.
강북의 뭍으로 나아가는 그 배 위에선 서글픈 오열이 한동안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