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1화.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지. (1)
조롱이 가득 담긴 눈.
그 눈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모두 제 발아래에 있는 양 굴던 네가 과연 이 상황을 예상했느냐고 말이다.
턱!
장일소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덮었다.
본능적으로 지금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만인방의 방주. 그리고 사패련의 련주.
한낱 화산의 장문인 때문에 얼굴을 일그러뜨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때, 청명의 입이 열렸다.
“장문인께서 명하셨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흑룡왕은 풀려날 것이다. 하지만.”
꾸욱.
청명이 흑룡왕의 머리를 밟고 있던 발에 힘을 주었다. 흑룡왕의 입에서 끊어질 것 같은 신음이 새어 나온다.
그 신음 소리를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던 청명이 장일소를 노려본다.
“나는 네 놈을 믿지 않아.”
“…….”
“흑룡왕이 풀려나는 건 우리가 강북에 도착한 이후다.”
장일소가 말없이 청명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요동친다.
“그러니까 이제 꺼져. 내 인내심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장일소가 낮게 웃었다.
잔잔하게 떨리던 그의 어깨가 이내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웃음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
소리 없는 광소.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들이 알 수 없는 섬뜩함에 주먹을 움켜잡았다.
한참 동안 소리 없이 웃어 댄 장일소가 천천히 얼굴에서 손을 뗀다. 그의 얼굴은 그새 평온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흐음.”
장일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현종을 바라보았다.
“장문인.”
“말씀하십시오, 련주.”
“장문인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현종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할 것입니다.”
장일소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사파와 협상을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지만……. 그건 장문인의 입장. 저도 체면이 있는 사람인지라 장문인의 말만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니 제 나름대로 제 입으로 한 말을 지켜야겠습니다.”
장일소가 살짝 손을 들어 올린다. 그러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단에서 두 척의 배가 매화도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화산의 검수들이 안색을 굳히자, 장일소가 입가를 비튼다.
“빈 배입니다.”
“…….”
“대업을 이루신 분들이 금의환향하는데, 꼴사납게 자맥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제 호의라 생각하십시오.”
화산의 제자들이 의혹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도무지 장일소라는 이름과 호의라는 단어가 맞아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종은 그저 깊이 포권하며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
장일소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 현종을 말없이 바라본다.
조금 어색한 공기가 흐를 정도로 꽤 오래 현종을 빤히 쳐다보던 장일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화산의 장문. 천우맹의 맹주.”
그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묘한 울림을 담고 퍼져 나갔다.
“……현종.”
장일소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여진다. 항상 그가 보여 주던 과장된 모습이 아니었다.
“그 이름 제대로 기억해 두겠습니다.”
“……패군께서 기억하실 정도로 대단한 이름은 아닙니다.”
“큭큭.”
낮게 웃은 장일소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린다. 그가 청명의 뒤쪽에 있는 자신의 조각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필연적으로 그가 청명을 향해 다가간다. 그의 눈과 청명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번에는.”
장일소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방 먹었다. 화산검협.”
청명이 입가를 뒤틀었다.
“이번에는?”
묘하게 장일소와 닮아 있으면서도 명백히 다른 미소가 피어나는 순간 청명의 입이 다시 열린다.
“겨우 목숨이나 구해서 돌아가는 놈 주제에 잘도 지껄여 대는군.”
“…….”
“꺼져.”
장일소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는 청명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몸이 청명을 지나 더는 그의 얼굴을 볼 이가 없어지는 순간.
까라라라락!
그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들이 맞닿아 조여지며 귀곡성과 같은 소리를 흩뿌려 댄다.
마치 원귀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 대듯이.
저벅. 저벅.
그가 성큼성큼 걸어 조각배에 오르자 배가 절로 움직여 강을 향해 나아간다.
‘화산 그리고……. 현종.’
장일소의 얼굴에 새파란 귀기가 어린다.
겉으로만 보자면 그에게 나쁠 것이 없는 결과다. 어쨌거나 그는 흑룡왕의 죽음을 막아 냈고, 그에게 커다란 빚을 하나 지워 두었다.
물론 그 위기 자체가 장일소와 만인방의 방관으로 빚어진 일이라고 한들, 그가 흑룡왕의 목숨을 살렸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이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눈에는 장일소가 적진이나 다름없는 매화도에 홀로 들어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세 치 혀만으로 흑룡왕을 구출해 낸 양상으로 보일 것이다.
장일소의 명성은 더욱 드높아질 게 분명하다.
그래. 겉으로 보면. 겉으로만 보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 장일소의 속은 어찌할 수 없는 굴욕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내가…….’
장일소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이 내가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했던 놈의 자비로 목숨을 구걸해 살아났다 이건가? 이 장일소가?’
현종은 그의 계산 아래 없던 존재다.
화산과 당가가 매화도에 진입하고 흑룡왕이 위기에 처하는 것까지는 그가 계산했던 바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뒤는 그가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화산검협이라면. 화산의 문도들을 제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손에 잡힌 이득을 결코 놓치지 않는 화산검협이라면 그가 내민 중재안을 절대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건 화산검협에게 절대 나쁘지 않은 제안이니까.
화산의 문도들을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살려 돌아갈 수 있고, 매화도에서 남궁을 구출했다는 명성을 얻을 수 있다.
이 업적 하나만으로 천우맹과 화산은 저 소림과 구파일방을 상대로 명분적인 우위를 획득할 수 있다.
머리가 있는 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제안이다.
특히나 화산검협처럼 영민한 놈이라면 제 감정과는 별개로 어쩔 수 없이 장일소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그렇기에 장일소는 홀로 호위 하나 없이 매화도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산검협이 절대 이 제안을 거부하지 못할 거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현종.’
현종은 그의 중재안을 거절했다.
이득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이라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저 현종이라는 작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처박았다.
그건 장일소의 사고방식으로는 어떻게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냉정하게 보자면 그 순간 장일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종이라는 변수를 놓치고, 제안이 거부당한 순간 장일소는 스스로의 두뇌를 과신하여 범의 아가리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은 광대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살아남은 것은 그저 천운일 뿐이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제 손안에 쥐어 마음대로 흔들어 댔던 장일소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목숨만 건져 빠져나온 모양새가 된 것이다.
“큭큭큭큭.”
장일소의 두 눈에 다시금 새파란 살기가 어린다.
“……현종이라.”
광인이 광인이라 불리는 이유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의 눈에는 장일소가 광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장일소의 눈에는 저 현종이 광인이었다.
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계산할 수도 없는 미친 인간.
그런 인간이 화산의 장문인이자, 천우맹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저 화산검협의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받으며.
장일소가 혀로 제 입술을 핥는다. 피처럼 붉은 그의 입술이 좀 더 요사스러운 색으로 물들어 갔다.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거지.”
숯이라도 삼킨 듯 타오르는 뱃속을 억누르며 장일소가 억지로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의 두 눈동자는 더없이 음울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후우우우우.”
“아우…….”
장일소가 매화도를 떠나는 순간, 화산 제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바람이 새어 나왔다.
몇몇은 제 이마에 배어난 땀을 닦아 내고 있었고, 몇몇은 제 머리를 격하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만큼 장일소라는 이가 주는 압박감이 어마어마했으니까.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고, 피부가 예리한 칼날에 베여 나가는 것 같은 기분.
어째서 저 자가 사패련의 련주인지, 마주할 때마다 몸으로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장문인.’
현종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깊은 신뢰가 어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 장일소.
강남의 지배자이자 사파의 지배자인 장일소를 상대로도 현종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서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현종은 굳이 힘을 주어 장일소를 맞이하지도 않았고, 기세를 돋워 그를 밀어 내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의 현종처럼 담담하게 장일소를 상대했을 뿐이다.
누가 그럴 수 있을까?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그들의 장문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말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맹주님.”
다름 아닌 당군악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 말인즉슨, 당군악 역시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리라.
“아닙니다, 가주님.”
현종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패군은 패군입니다. 어찌 사람이 저리…….”
당군악이 작게 미소를 짓는다.
‘대단한 분이다.’
몸을 돌려 돌아가는 장일소의 등을 본 이라면 모두 당군악처럼 느낄 것이다.
세상에 어느 누가 저 장일소를 저리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이건 정말 대단한…….”
“죄송하지만, 말은 나중에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가주님.”
그 순간 현종의 시선이 남궁세가로 향한다.
“패군이 약속한 이상, 더 이상의 공격은 없을 것입니다. 우선은 남궁의 부상자들을 빨리 뭍으로 옮겨 치료해야 합니다.”
“예. 맹주님.”
웬만해서는 하던 말이 끊기는 일을 겪어 볼 일이 없는 당군악이다.
하지만 지금 당군악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단 한 점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검수들 중 부상이 깊어 죽는 이가 더 나올까 싶어 안달하는 현종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부상자들을 배로 옮겨라! 강북으로 돌아갈 것이다.”
“예!”
화산의 제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사천당가의 무인들마저, 그 말에 목을 높여 대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군악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다.
아마도 그의 식솔들마저 지금 이 순간 현종을 자신들의 맹주로 확실하게 인정한 모양이었다.
‘많은 것을 얻었군.’
충동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명성, 명분, 실적.
그래. 수많은 것들을.
그때, 그의 앞에 있던 현종이 애가 타는지 제 스스로 남궁세가의 검수들을 부축하기 위해 그쪽으로 달려간다.
그 뒷모습을 보며 당군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가 얻은 가장 큰 것은 바로 저분일지도 모르겠구나.’
거기까지 생각하니 새삼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당군악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기절한 흑룡왕을 한 발로 밟은 채, 강 너머의 만인방을 노려보고 있는 청명의 뒷모습이 보인다.
‘자네는 여기까지 보고 이곳으로 향한 건가?’
물론.
청명은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