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0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지. (5)
딱히 위압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매화도를 점령하고 있는 다수는 수로채의 수적들이지만, 오히려 그들은 이미 기세를 잃었다. 반면에 그들 안으로 파고든 화산과 당가의 문도들은 엄정한 기세로 현종의 주변에서 장일소를 압박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둘러싸인 것은 오히려 장일소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장일소와 대면하는 순간, 현종은 제 몸이 태풍에 휩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아야 했다.
이미 과거 천우맹의 개파식 때 한차례 느꼈던 감각.
하지만 지금 그가 느끼는 감각은 그때보다 더욱 크고 강렬했다. 장일소를 상대로 마주 서는 것이 과연 그에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는 의심이 불쑥 머리를 들 만큼.
천우맹의 맹주. 그리고 화산의 장문인.
그 이름은 분명 사패련의 련주와 독대할 만한 자격이 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의 현종은 장일소를 맞상대하기에 너무도 작았다.
그렇기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홀로 당당히 매화도에 들어온 장일소가, 그가 아닌 청명을 상대로 협상을 걸 때에도 현종은 그저 침묵했다. 그게 더 온당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장일소를 굳이 그의 앞으로 보냈다. 그를 상대해야 하는 것은 현종이라는 듯이.
‘청명이 녀석이 아이들에게 누누이 말했었지.’
검을 손에 든 이들은 제 손에 들린 검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고. 손에 든 것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기 위한 무기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 당연한 말이 지금의 현종을 새삼스레 찔렀다.
청명은 말했다. 그는 화산의 검이라고.
그가 검이라면 더없이 날카로운 검일 것이다. 세상 다시 없을 만큼. 그렇다면 그 검을 손에 잡은 현종 역시 그 무게를 알아야 한다.
그 말인즉…….
현종은 슬쩍 청명을 보았다. 여전히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봐 오는 그를.
‘나 역시 그 검을 손에 쥘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겠지.’
청명의 의도는 그게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현종은 그리 느꼈다. 그건 스스로 쭉 느껴 오던 부담이었으니까.
이제 화산은 결코 과거와 같은 문파가 아니다.
그저 버텨 온 것만으로 화산의 장문이라는 과분한 자리를 손에 넣은 그에게도 당연히 과거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나는 감당할 수 있는가?’
이 날카로운 검들을?
그저 청명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백천이라는 검, 유이설이라는 검, 윤종과 조걸이라는 검까지……. 화산의 그 모든 검을 올바르게 휘두를 능력이 그에게 과연 있는가?
세상에 눈먼 칼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분수에 맞지 않는 칼을 손에 쥔다는 것은 어쩌면 저주에 가까운 일이다. 그에게도, 손에 들린 검에게도.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도 전에 장일소가 입을 열었다.
“맹주라 부르는 게 옳겠습니까? 아니면……?”
“장문으로 족합니다.”
현종이 선을 그었다.
이 자리에는 당가가 있다. 호칭이 맹주가 되는 순간, 현종의 선택은 당가의 의지마저 결정하게 된다. 그건 현종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장일소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겸양은 좋은 것이지요.”
“…….”
“비겁이 아니라면.”
현종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만약 이곳에 선 이가 법정이었다면 모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남궁황이었다면 불같이 화를 내었을 테고,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당군악이라 해도 살기를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현종은 장일소의 말에 어떠한 분노도 느끼지 못했다. 장일소의 말 한마디에 굴욕을 느끼기에는 그간 겪어 온 게 너무 많았고, 또한 그와 장일소 간의 격차가 너무 컸다. 오히려 그렇기에 담담할 수 있는 것이다.
“제 그릇이 그리 크지 못합니다.”
그 차분한 목소리에 장일소가 눈썹을 슬쩍 치켜세웠다. 그 대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이.
말없이 한참 현종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좋습니다. 장문인.”
빙그레 미소 짓는 장일소의 얼굴에서 적의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가식으로 느낄지 모르고, 누군가는 그 미소 속에 숨어 있을 음험함을 경계할 것이다. 하지만 현종은 그 미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장일소는 현종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굳이 현종을 향해 적의를 드러낼 필요가 없다.
현종에게는 익숙했다.
청명이 들어오기 전, 이름만 남은 화산의 장문인이던 시절. 그를 대하는 이들은 언제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간의 적의란 위협에서 시작하는 법. 위협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것 역시 인간이다.
그렇기에…… 현종은 저 미소가 온당한 동시에 아팠다.
“사패련의 련주로서 화산의 장문인께 정식으로 요청드립니다. 화산이 제압하고 있는 사패련의 부련주, 흑룡왕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장일소의 말에 현종은 침음했다.
답을 구하려는 듯 슬쩍 시선을 돌렸지만, 청명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평소 선택할 일이 있을 때마다 표정으로라도 어떻게든 제 뜻을 전하려던 청명이 아니다. 어울리지 않는 무표정으로 그저 현종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듯 그저 이행할 뿐이라는 듯, 그 검을 흑룡왕의 목에 가져다 댄 채로.
심호흡한 현종이 장일소를 응시했다.
“본문의 제자가 했던 질문을 련주께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
“저희가 어찌하여 련주의 말씀대로 흑룡왕을 놓아주어야 합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장일소가 살짝 어두운 시선으로 현종을 빤히 보았다.
“그게 화산과 당가, 그리고 남궁이 이 섬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현종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리 틀리지 않은 말이다.
분명 흑룡왕은 제압되었다. 하지만 흑룡왕을 제외한 수로채의 전력은 아직 상당수 보전되어 있다. 흑룡왕이 목숨을 잃게 되면 그들은 우선 저 장일소의 명을 따를 터.
상식적으로야 지휘권이 이양되는 과정에서 혼란이 벌어지겠으나…….
‘상대가 장일소니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겠지.’
사패련의 련주라는 직위, 그리고 패군이라는 명성까지. 장일소는 지금 사파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흑룡왕이 아니라 장일소가 수로채를 지휘하게 된다면 오히려 사기가 오르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게다가 저 장일소가 이 상황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하지 않았을 리도 없다.
그러니 결국 이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수로채의 잔당과 지금껏 움직이지 않았던 만인방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심지어 발판마저 이젠 모두 상실하지 않았는가.
현종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강 너머로 향했다.
강변에 있는 소림이 움직여 준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바라기 어렵다.’
현종은 직감했다. 소림이 움직이지 않을 것임을.
함께할 생각이 있었다면 상황이 이리 깊어지기 전에, 화산이 이 섬으로 치고 들어올 때 함께 움직였어야 한다. 때를 놓쳐 버린 그들은 그저 관망할 것이다.
“흑룡왕을 놓아주면 저희를 강북으로 고이 돌려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장일소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 말의 진위 여부는 가릴 필요가 없다.
현종이 장일소를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장일소를 가장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꼽으면 그중 하나가 현종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믿을 수 있다.
큰 거짓말쟁이는 작은 일에 거짓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세상을 속이려는 이는 평소에는 오히려 진실하기 마련이다.
현종의 입장에서는 흑룡왕의 목숨이 걸린 일이 작은 일일 수 없다. 그러나 장일소의 입장에서는 분명 자신에 대한 세상의 신뢰를 깎을 정도로 큰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시겠습니까?”
장일소가 슬쩍 현종을 압박해 왔다.
“흑룡왕을 풀어주고 고이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장일소의 손톱이 제 입술을 천천히 할퀴듯 쓸었다.
“이곳에서.”
손톱이 입술에서 떨어진 그때, 장일소의 입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곳에서 모조리 죽여 드리리까?”
이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등골을 타고 냉기가 흐를 정도의 겁박.
현종은 뛰는 제 심장을 억지로 눌렀다.
협의를 위해 흑룡왕의 목을 베고 장일소를 노려야 하는가?
아니면 화산과 당가, 그리고 남궁의 안전을 위해 이들을 살려 둔 채 이대로 물러나야 하는가?
세상 그 누구도 쉽사리 결정 내릴 수 없는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현종은 화산의 문도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하나같이 신뢰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온다 해도 그저 믿고 따를 것이며, 설사 그 선택의 대가가 그들의 죽음이라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눈빛이다.
화산을 대표하는 자리에 설 이는 저 눈빛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없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종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나는 작은 사람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외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저들이 바라는 훌륭한 이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화산의 장문인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종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했다.
현종은 마지막으로 청명을 한번 바라보았다.
‘괜찮겠느냐?’
그 눈빛의 진의를 이해한 청명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그걸로 충분하다 말하는 듯했다.
현종이 마침내 작게 심호흡하고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결의를 다져도 장일소는 여전히 벅찬 존재다.
하지만 굳이 현종이 장일소보다 대단할 필요는 없다.
“그래…….”
장일소가 슬쩍 고개를 꺾었다.
“결심은 하셨습니까, 장문?”
여전히 부드러운 그 미소를 마주하며 현종이 담담히 입을 뗐다.
“련주님.”
“말씀하시죠.”
“화산은…….”
잠시 뜸을 들인 현종이 단호히 말했다.
“련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그 순간 장일소가 우뚝 모든 행동을 멈췄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얼어붙기라도 한 듯, 완벽히 멈춰 버린 장일소의 시선은 현종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그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실로 극적인 변화였다.
“……뭐라고 지껄였느냐?”
화려한 옷처럼 걸치고 있던 예의를 벗어던지고 장일소가 으르렁대자 현종의 뒤를 지키던 화산의 검수들이 일제히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협상은 결렬됐다.
장일소의 얼굴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바로 그때.
“하지만…….”
현종이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흑룡왕은 풀어드리겠습니다.”
장일소는 현종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현종의 심중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화산은 사패련과 협상하지 않습니다.”
“…….”
“그럼에도 흑룡왕을 풀어주는 이유는, 우리가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작정이었다?”
“예.”
“이유는?”
현종이 천천히 시선을 돌리니, 그 끝엔 손이 희게 질리도록 검을 콱 움켜쥔 남궁도위가 있었다.
“이 복수는 화산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화산은 남궁의 부탁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명성을 높이고자 함이 아니었고, 강호의 판도를 뒤흔들고자 함도 아닙니다. 그저 한 사람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장일소는 순간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현종을 보았다. 살면서 그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떠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리라.
“그러니 흑룡왕에 대한 복수는 남궁의 이름으로 이뤄짐이 온당합니다. 화산은 그 기회를 뺏을 자격이 없지요.”
“…….”
“그러니 흑룡왕은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패군께서도 이만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그대와 우리가 나설 자리가 아닙니다.”
“하……. 하하…….”
순간 장일소의 얼굴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웃는 것 같기도, 낙심한 것 같기도,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귀신이라도 본 듯 그렇게 현종을 보던 장일소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청명.
그가 장일소를 보며 희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