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9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지. (4)
그그그극.
배가 모래톱에 긁히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잠시 후, 멈춰 선 배 위에서 붉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천천히 내려섰다.
“……장일소.”
백천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저 사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저 목에 검을 찔러 넣고 싶었다. 그의 옆에 선 다른 제자들도 그와 다르지 않은지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때, 백천의 눈에 청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고요하게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그 등을 본 순간 백천은 참았던 숨을 훅 토해 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웃는 낯의 장일소와 무표정한 청명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장도, 표정도 지독할 만큼 서로 대비되는 두 사람이 조우한 순간, 섬에 있는 모두가 숨을 죽였다.
장일소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반지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다란 손가락에 다시 반지를 천천히 낀 장일소가 흑룡왕을 일별했다.
“……걸레짝이 되었군.”
그의 시선이 잘려 나간 흑룡왕의 어깻죽지에 가 닿았다. 못 볼 꼴이라도 본 듯, 장일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시 청명을 보았다.
“어때, 화산검협? 꼭 그 목을 거두어야겠나?”
장일소의 은근한 목소리에 청명이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필요하다고?”
청명의 발이 흑룡왕을 짓눌렀다.
“끄으으윽…….”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흑룡왕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게?”
장일소가 살짝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인재가 구름처럼 쏟아지는 정파에 속한 분이니 내 심정을 모르시겠지만, 사파에서는 그만한 놈도 찾기가 쉽지 않거든.”
“…….”
“벌레든 병신이든 주워 쓸 수 있는 건 어떻게든 주워 써야 하는 게 내 입장이란다. 가엾지 않니?”
“여전히 주둥아리는 잘도 놀려 대는군.”
“인정해 주니 기쁘네. 그게 특기라서 말이야.”
장일소가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니까…… 죽이는 건 참아 주면 어떻겠니?”
“…….”
“팔이 잘려 나가 병신이 되어 버린 흑룡왕이라면 네 입장에선 딱히 위협적일 것도 없잖니. 그러니 대충 여기에 버리고 가면 내가 잘 주워다 쓸 생각이 있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청명의 싸늘한 시선이 금방이라도 장일소를 꿰뚫을 듯했다. 그렇게 잠시간 노려보던 청명이 피식 웃었다.
“아니, 아니지.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공격을 받은 늑대처럼 이를 드러낸 그가 장일소를 쏘아보았다. 담을 수 있는 모든 적의를 담아.
“그 하찮은 목이라도 대가로 내어 놓을 생각이 있다면 말이야.”
“하하하핫.”
장일소가 제 하얀 목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이런, 이런. 이 목에 그리 가치가 있는 줄 몰랐군. 천하의 화산검협이 탐낼 정도라니.”
그의 색 옅은 눈에 광기가 형형하게 어렸다. 담이 작은 사람은 그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겁을 집어먹을 만했다.
“하지만 그건 어렵지. 아무리 하찮은 목이라고 해도, 벌레 같은 놈 하나의 목숨과 바꾸기에는 또 귀하거든.”
흑룡왕은 청명의 발에 밟힌 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장일소 덕에 가까스로 숨을 쉬고 있다곤 하지만, 장강의 절대자였던 그에게 이런 취급은 너무도 가혹했다.
하지만 그는 입조차 열 수 없었다.
그가 노기를 토하는 순간 청명의 검이 여지없이 목을 잘라 내 버릴 테니까. 직접 청명을 상대해 본 흑룡왕은 알 수 있다. 이놈은 살인 앞에 망설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 지껄여 봐.”
청명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툭 던지듯 말했다.
“그 잘난 주둥아리로 한번 지껄여 봐. 내가 왜 이놈을 살려 줘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왜…….”
그의 투명한 시선이 장일소를 꿰뚫었다.
“네놈을 살려 줘야 하는지 말이야.”
장일소의 붉은 입술이 섬뜩한 호선을 그렸다.
‘오싹하군.’
농담이 아니라 저 눈을 마주하니, 한순간 등골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범쯤은 되어 돌아올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범이라기보다는 숫제 괴물이다.
소매 아래로 늘어진 장일소의 새하얀 손이 조여들자 반지들이 서로 마찰하며 까라락 하는 소리를 자아냈다.
장일소는 슬쩍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전신을 장신구로 치장해 두면, 제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손이 의지와 무관하게 절로 조여들었다는 건, 그가 지금 청명에 대한 극심한 살의를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죽이고 싶은가?’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 그가 계획했던 모든 것을 집어던져서라도 제거할 가치가 있나? 그만큼 저 화산검협이 위협적인가?
그의 머리는 아직 화산검협에 대해 고민을 끝내지 못했지만, 그의 본능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저 화산검협을 죽여야 한다고.
본능이 관장하는 건 삶에 대한 의지다. 지금 그의 본능은 저 작은 검수를 지금까지 그가 만난 그 누구보다 확연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장일소가 작게 실소하며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얼굴에 드러날지 모르는 살의를 누구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얼굴은 가렸지만, 긴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선 서늘한 빛이 흘러나왔다.
잘라 내고 싶다.
저 목을 베고, 그 피로 손을 흠뻑 적시고 싶다.
하지만…….
“대가라…….”
당연히 장일소는 제 마음의 소리를 거부했다.
충동을 절제하지 못하여 앞뒤 분간하지 못하고 제 본능대로만 움직이는 것. 그건 그가 가장 혐오하는 개돼지들이 해 대는 짓거리니까.
“무엇을 원하나, 화산검협?”
“…….”
“말해 봐. 원하는 걸 말이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설사 그게…….”
독을 품은 매끄러운 목소리가 청명의 귓가에 감겼다.
“바닥에 머리를 조아려 살려 달라 빌지 않아도 너희를 이 섬에서 내보내 주는, 과분하기 짝이 없는 자비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모든 화산 제자들의 몸에서 새파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두 눈에 핏발을 세운 그들은 당장이라도 장일소에게 달려들듯 검을 쥔 채 발을 내뻗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던 분위기를 제압한 것은 다름 아닌 운검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산의 제자들을 휩쓸던 노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럴 수밖에.
운검의 말은 언제든 묵직했지만, 특히나 저 만인방과 장일소의 앞에서는 그 무게가 한층 더 가중되었다. 운검의 앞에서 더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시 평정을 되찾은 화산의 검수들이 입을 꾹 닫았다. 하지만 그들의 검은 여전히 새파란 빛을 내뿜으며 장일소를 겨누고 있었다.
그때 청명이 다시 입을 뗐다.
“장일소.”
“으음?”
청명의 눈은 과도하게 무감정했다.
“착각하지 마라.”
장일소가 짙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착각? 내가?”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순간 장일소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청명의 말이 허세로 가득 찬 헛소리가 아닌, 의미심장한 말로 들린 것이다.
청명이 말을 이었다.
“네가 이 섬에 발을 들이고도 목이 떨어지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장일소는 가만히 청명을 내려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당연히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 나가기 위해서 네 제의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나?”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멍청한 사파 새끼가, 세상이 제 뜻대로만 돌아가는 줄 아는군.”
그 막말에 장일소가 희게 웃으며 제 턱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럼 이유가 뭐지?”
“…….”
“중원의 협의를 수호하시는 화산검협께서 이 간악무도한 사파 수괴의 목을 붙여 놓으시는 그 대단하신 저의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한껏 이죽거리며 던지는 도발에도, 청명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하게 답했다.
“멍청한 놈에게 답을 알려 주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그것 역시 도인의 의무겠지. 귀를 씻고 똑똑히 들어라, 머저리 놈아.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
“그게 내 권한이 아니니까.”
장일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건 아주 작은 표정의 변화였지만, 지금껏 장일소를 봐 온 이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제 행동에 확신을 가지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떠오른, 의구심 어린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알 일이지만.”
청명이 싸늘하게 일갈했다.
“너 같은 머저리에게는 풀어 말해 줘야겠지. 나는 그저 화산의 검. 화산의 검이 누구를 겨눌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한 분뿐이다.”
“…….”
그 순간 장일소의 시선이 움직였다. 청명을 넘어, 그 뒤쪽에 있는 한 사람에게로.
“그 구차한 목숨 부지해서 돌아가고 싶다면, 그 머리를 조아려 장문께 빌어라. 그분이 아니면 이곳의 누구도 너를 살려 주지 못할 테니까.”
그극.
흑룡왕의 목 옆에 닿아 있던 암매검이 모래를 긁었다. 마치 장문의 명만 있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장일소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는 경고 같았다.
늘 그린 듯 매끄럽던 장일소의 얼굴에 미약한 당혹감이 스쳤다.
‘장문의 명대로 움직인다고?’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물론 그는 사파고 이들은 정파다. 힘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사파와는 달리, 정파에게는 나름의 지켜야 할 규율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지금껏 장일소도 그 사실을 이용해 막대한 이득을 취해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화산검협쯤 되는 이를 저 평범하다 못해 우둔한 장문인이 통제할 수 있을 리 없다. 현종은 객관적으로 봐도 평범한 축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물이 아닌가.
그런데 천하를 지배하는 구파와 오대세가의 수장들마저 발밑으로 깔볼 만큼 오만하고, 사패련의 수장인 그의 앞에서도 살기를 여실히 드러낼 만큼 표독스러운 저 화산검협이 현종의 명을 따른다고?
장일소는 황당하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괴상한 말이 진실임이 금세 증명되었다.
청명의 그 우스꽝스러운 말에도, 화산의 누구도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의혹 어린 빛조차 스치지 않았다.
그건 이들이 청명의 말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단순한 임기응변이 아니라, 저 화산검협이 그 말을 지금껏 지켜 왔다는 의미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장일소의 등에서 식은땀이 배어났다. 이렇게 당황하고 긴장한 것이 몇 해 만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나는 지금 내 발로 호굴에 들어온 셈이구나.’
그는 협상의 주체가 당연히 화산검협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곳에 홀로 들어올 수 있었다. 머리가 비상한 화산검협은 장일소가 이곳에서 죽는 것이 화산에게 손해라는 것을 외면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 협상의 대상이 현종이라면?
장일소는 순간 입술을 뒤틀며 실소하고 말았다.
‘어쩌면 여기가 내 무덤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는 서서히 허리를 폈다. 그리고 이쪽을 주시하는 현종을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펄럭.
그의 장포 자락이 거칠게 휘날렸다. 가볍게 의관을 정제한 장일소가 현종을 향해 깊이 포권 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예를 담아.
“사패련의 장일소.”
그믐달 같은 눈으로 장일소가 현종을 바라보았다.
이미 조우한 적 있는 사이. 하지만 그는 마치 현종을 처음 만난 것처럼 예를 갖추었다.
“천우맹의 맹주이자, 화산의 장문을 뵙습니다.”
낮은 한숨을 내쉰 현종이 그런 장일소를 향해 예를 표했다.
“천우맹의 맹주이자, 화산의 장문인 현종입니다. 다시 뵙습니다, 패군.”
역시 더할 나위 없이 깍듯했다.
하지만 그 속에 감춘 칼날의 싸늘함이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든 이의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